싯다르타

스리랑카 강가라 사원의 벽에 조각되어 있는, 깊은 명상에 잠긴 붓다. 스리랑카는 아소카의 자손들에 의해 불교로 개종했다.

1. 싯다르타 고타마라

자연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태도는 호모 사피엔스가 문명을 개조해 자연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네 사람에 의해 널리 퍼졌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은 종교를 창시했고, 두 사람은 그 종교가 세계로 널리 퍼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는 싯다르타 고타마라는 인도의 왕자였다. 그는 기원전 563년부터 483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오늘날의 네팔에 있는 룸비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그가 죽고 400년 정도 지났을 때 그의 추종자들이 쓴 문헌에서만 찾을 수 있어, 오랜 세월 구전되면서 일부 상세한 것들은 신화와 합쳐졌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그가 태어나고 며칠 안 되어 죽어, 그는 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왕이거나 부족의 추장이었던 슈도다나는 아들의 탄생을 기념해 궁전을 세 채 짓도록 했다. 슈도다나는 싯다르타가 종교적 가르침에 노출되지 않고 인간의 고통도 모르게 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가 강한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2. 붓다 – 깨달음을 얻은 자

그러나 싯다르타는 스물아홉 살에 궁전을 떠나 백성들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빈곤과 고통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싯다르타는 처음 나갔을 때 늙은 사람을 보았다. 그때까지 그는 노년의 시련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다음에 나갔을 때는 병든 사람죽어가는 사람을 만났다. 결국 자기가 본 것에 점차 괴로워하다가 싯다르타는 사치스러운 궁전에서 벗어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수도사로 살았다. 그러다 은자가 되었고, 두 스승의 도움으로 명상을 함으로써 마음을 비우는 것을 배웠다.

다음으로 싯다르타는 함께 도를 닦던 다섯 사람과 함께 세속의 것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으려고했다. 그것에는 먹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하루에 잎사귀 한 장이나 견과 한 알밖에 먹지 않았다. 그러나 강에서 쓰러져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뒤에 싯다르타는 ‘중도‘로 알려지게 된 것을 발견했다. 중도란 방종이든 자기 부정이든 극단으로 치달을 필요 없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다.

싯다르타는 마을 소녀에게 우유죽을 얻어먹은 뒤 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진리를 발견했다. 49일 동안의 명상 끝에 서른다섯의 나이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고, 그 뒤로 그는 붓다로 알려지게 되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뜻이다.

3. 힌두교의 확장

타푸사발리카 두 상인이 그의 첫 제자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이 붓다의 수염을 몇 가닥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지금은 미얀마의 랑군에 있는 쉐다곤 파고다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45년 동안 인도의 북동부와 네팔의 남부에 있는 갠지스 강 유역의 평원을 걸어다니며 왕족에서부터 테러리스트와 거지에 이르기까지 범위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리를 가르쳤다. 수많은 개종자를 만든 뒤 여든 살쯤 죽었는데, 사인은 아마 식중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사실 힌두교에서 전통적으로 믿었던 많은 것들을 확장하거나 대중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호소력이 있었고, 특히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랬다. 

붓다는 자신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따르면 이 사람들이 사제나 왕 같은 어떤 매개자 없이도 내면의 욕망을 없애고 영혼을 영원히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다.

4. 자이나교

싯다르타 고타마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한 왕자도 자신의 왕국을 포기했다. 그는 깊은 침묵과 명상 속에서 12년 반을 떠돌다가 영혼의 깨달은을 얻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위대한 영웅‘을 뜻하는 마하비라로 알려졌고, 자이나교의 스물네 번째 예언자이자 마지막 예언자가 되었다.

자이나교의 경전은 오랜 시기에 걸쳐 쓰였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800여 년 전에 우마스바티라는 인도 승려가 쓴 것이다. 그의 <타트바르타디가마 스토라>에는 자이나교의 주요 특징을 설명하면서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모든 생명은 신성하다는 것이 자이나교의 중심 사상이라고 말한다.

자이나교도에게는 아무리 화나게 하고 위협을 해서 죽였어도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들은 불필요하게 무자비한 행위로 얻은 식량은 모두 거부한다. 자이나교도는 채식주의자이며 동물의 행복도 열렬히 지지한다. 

오늘날 인도의 많은 도시에서 동물보호소를 운영하는 것은 자이나교도들이다. 뿌리를 뽑으면 식물 전체가 죽기 때문에 뿌리채소는 피하지만, 사과 같은 열매는 따도 나무에 해가 가지 않으므로 그것은 받아들인다. 비폭력과 종교적 관용, 자연의 존중은 자이나교 철학의 세 토대이고, 힌두교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자이나교도 깨달음을 통한 개인 영혼의 해방에 관심을 기울인다.

깨달음은 일련의 행동 규범을 통해 얻어지는데, 여기에는 다섯 가지 서원도 포함된다.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거셍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는 것, 순결하겠다는 것, 물질적 소유로부터 초연하겠다는 것이다.

5. 인도 공화국

붓다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마하비라의 가르침도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만질 수 있는 사람과 만질 수 없는 사람을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사람은 누구나 해탈할 수 있고 해탈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불교나 자이나교나 세속의 어떤 통치자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 역사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서쪽에 있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동쪽에 있는 방글라데시까지 인도아대륙이 마하자나파다로 알려진 열여섯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쿠루 왕국처럼 오늘날 인도의 수도인 델리 근처에 중심을 둔 일부 왕국은 예술과 철학의 중심이 되었다. 전설적인 쿠룩셰트라의 전투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이 왕국들은 대부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통합되어 인도 최초의 제국이 되었다. 중국과 달리 인도의 중앙집권화는 왕국들 간의 권력투쟁보다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기원전 500년경부터 페르시아 군과 그리스 군이 그들의 국경을, 그 중에서도 특히 북서쪽에 있는 국경을 쉴 새 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03년 찬드라굽타가 병사 60만에 기병 3만, 코끼리 9천 마리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이나교 승려가 되었고, 결국 굶어 죽었다고 한다.

6. 아소카 대왕

찬드라굽타가 자이나교를 인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가문이 좋아하는 철학으로 만들었다면, 그의 손자 아소카 대왕은 자이나교의 확산에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는 그도 여느 황제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하고 난폭했다. 그는 힘으로 백성들을 위협해 제국을 통치했다. 사실 ‘아소카’라는 이름도 산스크리트어로 ‘슬픔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주 피비린내 나는 큰 전쟁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완전히 바뀌었다.

칼링가 전쟁은 유명한 칼링가 전투로 끝났는데, 이때 전장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날 아소카가 밖에 나가 도시를 돌아보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불탄 집과 죽은 말, 흩어져 있는 시체들뿐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하고 그는 울부짖었다.

그 순간부터 아소카는 자신의 삶과 치세를 비폭력에 헌신했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불교도가 되었고, 그 뒤 20년 동안 이 강력한 종교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죄수들을 풀어주고 땅을 돌려주었다. 

불교의 비폭력 원칙인 아힘사가 그가 다스리는 영토 전역에서 채택되어 불필요한 동물의 살육이 금지되었다. 재미로 동물을 죽이는 행위가 금지되고, 동물에 낙인을 찍는 것이 불법이 되었으며, 채식주의자가 공식 정책으로 장려되었다.

아소카는 집을 지어 여행자와 순례자가 쉴 수 있게 하고, 대학을 세워 사람들이 더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인도 전역에 병원을 지어 사람과 동물 모두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다.

7. 다르마

그는 불교 신자들을 위해 기념비와 사원도 8만4천 개가 넘게 세웠고, 이것들은 붓다의 삶과 연관이 있는 곳에 많이 세워졌다. 아마 그가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오래 간 것은 그의 석주 조칙일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 전역에 사암을 깎아서 만든 기둥 수십 개를 세우고 평민들이 널리 쓰던 프라크리트라는 언어로 불교의 다르마 개념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새겨 널리 알렸다. 기둥에는 칼링가 전투 뒤에 그가 개종하게 된 사연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비폭력 정책을 쓴 것도 자세히 새겨져 있다.

” 어디에나 모든 종교가 존재해야 한다. 종교는 모두 자제와 긍정적 본질, 관용의 장려,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를 바라기 때문이다.”

바라나시라는 인도의 성스러운 도시 바로 북쪽의 사르나트에 있는 아소카의 기둥은 황제가 이 도시를 방문한 것을 기록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것에 새겨진 네마리 용과 법륜은 2천 년도 더 지난 뒤에 현대 인도 공화국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아소카는 새로운 개념의 왕권을 주창했다. 그는 통치자의 합법성이 신성한 신의 너그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이상을 지지하고 사원을 세우고 수도자를 지원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데서 온다고 했다.

아소카의 치세 뒤에 불교는 널리 퍼졌다. 서기 100년에는 불교 승려들이 중국에 발판을 마련했다. 중국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이 도교라는 비슷한 철학과 융합했다. 도교는 제자백가 시대에 살았던 노자라는 철학자가 세웠다. <도덕경>이라는 그의 책은 왜 폭력을 피해야 하고, 사람이 침묵과 명상을 통해 격정과 욕망을 제거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8. 불교의 전파

아소카의 영향이 지금은 인도보다 인도 밖에서 더 강력한 것 같다. 중국에서 다양한 갈래의 불교가 한국과 베트남, 태국으로 퍼졌다. 서기 538년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일본 열도에 전파되었고, 9세기에는 자바 섬에 있는 보로부두르에도 전파되었다. 오늘날에도 자바 섬에는 수없이 많은 불탑이 언덕을 이루고 있는 보로부두르 사원이 남아 있다.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와트사원은 그로부터 300년 뒤에 세워졌다. 힌두교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이곳에는 웅장한 불교 조각품들이 있다. 아주 종교적인 문명의 절정기에 세워졌지만 지금은 밀림 속에 파묻혀 있는 이 유적은 40제곱마일에 이르는 땅에 드넓게 펼쳐져 있다.

오늘날 불교 왕국의 가장 빛나는 예는 히말라야 산 속에 높이 자리 잡고 있는 부탄 왕국이다. 부탄과 티베트에는 서기 747년에 파드마삼바바라는 승려가 붓다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부탄의 4대 왕 지그메 싱계 왕추크는 그의 국민들에게 국민총생산보다 국민총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사회복지와 환경 보존, 문화 보호에 대한 관심을 경제 성장보다 우위에 놓았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 작고 영적인 부탄 사회는 물질적 정신적 번영을 자연환경 보호와 나란히 두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지구 온난화는 특히 부탄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히말라야의 높은 산에 있는 빙하들이 현재 거의 녹기 일보직전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빙하의 쓰나미가 이 사람들과 이들의 사회를 쓸어버릴 것이다. 3500년 전에 크레타섬에 살았던 미노아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고 대책을 세워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그것이 그렇게 느닷없이 일어나지는 않으리라는 것뿐이다.

힌두교

어떻게 한 문명이 인간이 자연과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재발견하고 그 깨달음을 전파하려고 했을까?

1. 생물과 지구의 협력

약 4천만 년 전부터 인도 대륙판이 아시아 대륙판의 남쪽 면과 충돌해 생긴 산맥이 지난 몇 천 년 동안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고 한 이야기나 그동안 인간들 사이에 벌어진 일들과 무관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히말라야 산맥은 그것에 대해 대답해줄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웅장한 산맥의 어마어마한 높이가 지구의 기온을 조절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지나면서 차가워져 거대한 계절풍이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기 속에 있는 이산화탄소가 수십 억 톤 빗물에 녹아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갔고, 바다 속 생물들은 그것을 세포를 만드는 재료로 썼다. 

그리고 이것들이 죽으면 탄소가 풍부한 껍질과 시체가 해저로 떨어져 지구의 진흙 속에 깊이 파묻혔다. 대기 속 이산화탄소의 양은 이렇게 자연의 힘과 생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조절되었고, 이로써 갈수록 뜨거워지는 태양 앞에서도 지구의 기온은 시원하게 유지되었다.

어쩌면 생물과 지구의 이런 오랜 협력 관계가 이 거대한 산맥의 기슭 너머에서 한 인간 사회가 약 2천 년 동안 자연과 아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 것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2. 인도 갠지스 강

히말라야 산맥은 분명 우리가 지금 인도라고 부르는 곳에서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던 사람들을 중앙집권화하고 정복하고 병합하려는 중국의 군사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서쪽에서는 히말라야 산맥의 방벽 효과가 감소한 탓에, 그곳 사람들은 걷거나 말을 타거나 마차로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북쪽에서 몇 차례나 침입자들이 밀려왔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마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 살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거기서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질러 인도북부에 있는 갠지스 강 유역으로 밀려 들어왔고, 그들을 막은 것은 하늘 높이 치솟은 히말라야 산맥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이 침략의 역사를 꿰맞추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고고학적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 남아 있는 증거는 대부분 문헌에 있는 것이다.

베다라고 하는 경전은 원래 중동에서 생긴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 베다는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해준다. 이 책은 브라만이라고 하는 승려들에게 신에게 희생제를 지내는 법을 가르치는 용도로 쓰였다. 베다에는 기원전 1700년경부터 1100년경까지의 생활이 기술되어 있다. 베다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기원전 4000년경에 쓰였다고 믿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말이다.

베다는 이 초기 침략자들이 말과 바퀴, 금속의 형태로 가져온 도구들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말해주고, 귀족들이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전장을 질주하며 서로 일제히 활을 쏘아 대결하는 이야기도 해준다. 

베다에는 갠지스 강의 밀림을 개척할 때 쓰는 도구들의 용도도 기술되어 있다. 갠지스 강 유역은 정착하기 좋은 곳이었다. 많은 비는 채소를 기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 벼농사가 잘 되었고, 그렇게 수확한 쌀로 군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3. 마하바라타

이 인도의 고대 경전을 일부만 피상적으로 읽으면 이 사람들의 운명도 북쪽과 동쪽, 서쪽에서 부상하고 있던 사회들의 운명만큼이나 폭력적이었을 거라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고대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의 핵심에는 역사상 가장 성스러운 시들 가운데 하나인 마하바라타가 있다. 이것은 고대에 쓰여진 모든 시 가운데 가장 긴 서사시이기도 하다. 호메로스의 트로이 이야기보다 훨씬 길어, 7만4천 개의 시구로 이루어져 있고, 쓰인 단어가 180만 개가 넘는다. 

마하바라타는 쿠루 왕국의 왕권을 놓고 두 갈래로 갈라진 왕가의 자손들인 카우바라라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싸우는 서사시적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일컬어지는 18일간의 쿠룩세트라 전투에서 절정에 이르고, 여기서 결국 판다바 형제들이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마하바라타에서 가장 신성한 부분으로, 아마도 기원전 550년경에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이야기에서 판다바 형제들의 지도자인 아르주나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전사가 된 크리슈나와 논쟁을 벌인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아르주나가 전쟁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급히 크리슈나의 조언을 구한다. 그는 전쟁을 하면 자신의 가족들을 죽여야 하는데 그들은 과거에 충성을 맹세한 것 때문에 그와 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4. 아트만

바가바드기타, 또는 짧게 기타로 알려진 이 부분에서 크리슈나는 지금도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이들이 자연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신비로운 철학을 드러낸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전쟁을 피할 수는 없지만 전쟁에서 죽는 사람들을 애도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의 영혼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로 태울 수도 없고 물로 적실 수도 없으며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는다. 크리슈나는 이 자아는 사람이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이동한다고 말한다.

윤회는 힌두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해주는 핵심적인 믿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저마다 아트만이라는 영혼이 있고, 이것은 모든 생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편적 힘인 브라만의 일부다. 모든 개별자의 목표는 아트만을 해방해 브라만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아트만은 충분히 발전된 상태가 되어 깨달음을 얻고 영원히 해방될 때까지 동물이나 식물, 인간의 형태로 계속 윤회하도록 되어 있다.

아트만은 명상을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개별자가 어떻게 네 가지 유형의 요가를 이용해 마음에서 이기적 욕망을 떨쳐냄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자세히 설명해준다.

크리슈나의 조언은 오랜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처음 기록되고 2천 년도 더 지난 뒤에도 영국의 인도 지배에 맞서 비폭력 운동을 이끌었던 인도의 평화주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기타가 자신에게는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 기타는 보편적 어머니다. 너무 실방스러운 일에 부딪혀 나 혼자서는 한 줄기 빛도 볼 수 없을 때, 나는 다시 바가바드기타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여기서 시구를 찾고 저기서 시구를 찾으면 어찌할 수 없는 비극 속에서도 나는 금방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내 삶은 외적인 비극으로 가득 찼지만, 그런 비극들이 내게 어떤 지울 수 없는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로지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 덕분이다.”

5. 카스트 제도

윤회설과 누구나 요가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키면 보편적 영혼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아주 인기 있고 호소력 있는 관념이었다. 그런 철학은 고대 인도 문명이 이 남아시아 대륙에 가끔씩 들이닥쳤던 이주와 침략, 정복의 물결을 달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분열을 초래하는 카스트 제도로 알려진 사회구조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모두 한 공간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인도 사회가 갈수록 복잡해지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인도의 생활방식은 새로운 문화가 들어올 때마다 한데 뒤섞여 다양한 사회 집단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섞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케이크 같은 모습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생각은 아마 처음에 말과 전차를 타고 청동 무기를 휘두르며 들이닥친 침략자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에 북쪽과 서쪽에서 몰려온 침략자들은 그들의 사제와 전쟁과 천둥의 신인 인드라 같은 많은 신에 대한 믿음도 함께 가져왔다. 

처음 카스트에는 네 계급밖에 없었다. 브라만은 기도를 하는 사제였고, 크샤트리아는 싸우는 군인, 비이샤는 일하는 농부와 장인, 마지막으로 이 계급구조에서 가장 밑에 있는 수드라온갖 ‘깨끗하지 않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노예 같은 사람들은 사회의 하수구에 처박혔고, ‘불가촉천민‘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계급들 사이의 뒤섞임은 한 번도 장려되지 않았고, 따라서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윤회설은 이 사람들에게 적어도 다음 생에서는 더 높은 계급의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을 주었다.

6. 아힘사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말할 수 없이 한층 복잡해졌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인간 문명을 카스트로 조직하는 일이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계속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몇 세대에 걸쳐 이민은 받아들이면서도 기존의 문화가 자기들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이 희미해지거나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문화가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카스트가 생겨 이미 존재하는 카스트들의 위나 아래에 자리를 잡으면 기존의 관습이나 습관을 근본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없다. 이런 시스템은 고대 문화와 신앙이 세계의 다른 지역들보다 인도에서 더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했고, 이는 힌두교가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종교인 것도 설명해준다.

자연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은 힌두교 사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우파니샤드는 고대 힌두교 경전을 모은 것으로, 기원전 500년경에 베다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석서로 처음 쓰였다. 여기서 아힘사가 처음 언급된다. 이것은 많은 힌두교 신자들이 자연에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채식주의는 이러한 철학의 일환이며, 이런 이유로 인도는 오늘날에도 전체 인구의 40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다. 

고기를 먹는 힌두교 신자들도 소는 거의 먹지 않는다. 소는 모든 동물 가운데 마실 젖을 주고 쟁기를 끄는 힘을 제공하고 땅을 비옥하게 하는 비료를 주는 자연의 선물로서 높이 숭앙받기 때문이다. 힌두교 신자들에게는 소가 아낌없이 주는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고, 따라서 오늘날에도 인도의 거의 모든 주에서 소를 죽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