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여신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자연의 순환을 숭상하는 것이 어떻게 생식력과 여성성, 평등에 헌신한 어떤 인간 문명들의 대표적 특징이 되었을까?

1. 잃어버린 문명

1827년 찰스 매슨이라는 영국 스파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이 있는 인도의 아그라 군사기지를 떠나 동료 군인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심부름을 하러 서쪽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금은 파키스탄 동북부에 있는 하라파라는 곳에서 우연히 폐허가 된 고대 도시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언덕위에 성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서 보석과 팔찌, 발찌도 발견하고, 고대 마차 세 대의 잔해도 발견했다. 그러나 지역 사람들이 경고한대로 쏘는 각다귀 떼의 공격을 받는 바람에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폐허가 된 도시를 그렸다. 그는 자신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전문적 발굴이 이루어져 수천 년 동안 진흙과 모래, 먼지 밑에 숨어 있던 이 잃어버린 문명의 전모가 드러났다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은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하라파가 지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이 드러났다. 그후로도 유적지가 2500곳 넘게 발굴되었는데, 이 정착지들은 고대 이집트와 수메르에 처음 세워진 도시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들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졌다.

2. 인더스 문명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메르가르라는 고대 정착지에서 왔다. 메르가르는 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 시비라고 하는 작은 도시 근방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는 것을 처음 보여주는 것들, 예를 들면, 밀과 보리 같은 농작물의 자취와 가축으로 기른 소와 염소, 양의 뼈는 기원전 7000년경의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진흙으로 간단하게 지은 건물에서 살았고, 이집트 사람들처럼 묘소에 현대 역사가들이 그들의 생활방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수백 개의 작고 단순한 여성상이다. 이것들은 대개 석간주 물감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가지 유형의 머리 모양과 장식을 보여준다.

기원전 2600년경부터 기후가 변하면서 땅이 메말라 이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동해 훨씬 비옥한 인더스 강 유역으로 갔다. 물론 물건을 만드는 기술과 지식도 함께 갔고, 기원전 두 번째 천 년이 끝났을 즈음에는 인디스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아주 멋진 도시를 다수 건설했다. 이들 도시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 생활이 연상되는 것듯이 많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시들이 되었다.

이 사람들은 도시 설계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거리가 현대 미국 도시처엄 정확히 잰 바둑판무늬 모양으로 편리하게 설계되었고, 거리마다 어떤 사람들 의견으로는 오늘날 파키스탄과 인도의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앞선 하수시설과 배수시설이 있었다. 발굴결과 일련의 큰 공공건물도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집회장과 시민들이 5천 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만남의 장소도 있었다.

공공 창고와 곡물 창고, 목욕탕은 주랑이 있는 마당에 둘러싸여 있었다. 인더스 문을 건설한 사람들은 아마 세계 최초임에 틀림없는 인공 공공 수영장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물이 새는 것을 막으려고 일종의 천연 타르도 썼던 것이 확인되었다. 어떤 집 밑에서는 온돌식 난방시설로 보이는 것도 발견되었다. 유명한 로마의 온돌식 난방시설은 그로부터 2천 년도 더 뒤에 나왔다.

3. 문명의 발달

집집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었고, 폐수는 큰길을 따라 설치된 덮개 있는 배수로로 흘러나갔다. 어떤 집들은 안마당이나 골목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이곳에는 금속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하라파에서만 구리 녹이는 노가 적어도 16개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나 수메르와 달리 이곳에서는 왕릉을 찾아볼 수 없다. 부유한 지배 계습의 특징인 지구라트와 피라미드, 신전, 큰 궁전도 없다. 인더스 문명이 흥미로운 것은 잘 조직된 효율적이 사회였지만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적 생활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를 공유하고 비교적 평등하게 산 것 같다.

인더스 문명은 교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나는 구리와 주석 같은 원료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로탈이라는 도시에는 배가 잘 드나들도록 준설을 하고 운하를 건설해 배가 들어와 물건을 싣고 내릴 수 있게 되어 있는 거대한 부두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교역에도 전문 지식이 있고 건축가와 장인으로서도 능수능란해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측정하고 무게를 정확하게 재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이들은 십진법을 따랐고, 이들이 건물을 지을 때 쓰는 벽돌은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또 수평선 전체를 잴 수 있는 도구도 발명해, 조수와 파도, 해류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발견된 것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독보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벌거벗은 소녀가 춤추는 자세를 하고 있는 청동 상이다. 이것은 모헨조다로라는 도시의 유적지에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뉴델리에 있는 인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주조되었고 키가 11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이것이 독특한 것은 ‘매몰주조법‘이라는 기법으로 주조되었다.

먼저 밀랍으로 소녀의 상을 만든 다음 점토를 입혀서 거푸집을 만들었다. 이것에 열을 가해 안에 있는 밀랍이 녹아 흘러나오면 빈 공간에 청동을 녹여서 부었고, 이것이 식어 점토 거푸집을 떼어내면 안에 있는 청동상이 드러났다. 이런 발달된 청동 주조법을 유럽에서는 그로부터 3500년 이상 지난 서기 1100년경에야 비로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다.

4. 여신 숭배

더 놀라운 것은 이 춤추는 소녀 상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한 솜씨와 발달된 기술만이 아니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이 세계에서는 거리의 하수시설과 주택의 중앙난방 장치에서부터 멋진 부두와 정교한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시대를 앞서 갔던 것 같다.

또한 이 세계에서는 장인과 여성이 농부와 상인뿐만 아니라 사제와도 동등했다. 이들은 모두 어머니 여신으로 알려진 것을 숭배한 듯하며, 이는 이 춤추는 소녀 상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 상이 이 지역에 있는 유적지 전체에서 발견되는 것을 설명해준다.

기원전 4000년경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기원전 1600년경까지, 유럽과 근동의 많은 지역에서도 이들과 비슷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많다.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묘는 대개 흙을 높이 쌓아올린 공동 무덤에 남녀 구별 없이 함께 묻혀 있었다. 

서유럽에서 알려진 것만 이런 고분이 1만 기가 넘는데, 우리는 이것을 ‘거석 기념물‘이라고 한다. 대개 이런 무덤 근처에서 지역의 큰 돌 덩어리로 만든 거대한 구조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물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에 있는 것들처럼 둥글게 원형으로 세워진 것들이 많지만 신전으로 세워져 한쪽 끝이나 중앙에 제단이 있는 것들도 있다. 

아일랜드의 미스 카운티에서 최근에 복원된 뉴그레인지 신전과 묘실은 피라미드보다 500년 일찍 세워졌고, 한 사람이 지었으면 6천 년이 걸렸을 거라고 한다. 또한 지붕이 5천 년이 넘도록 비 한방을 새지 않아, 이것을 지은 사람들의 솜씨를 증언해준다.

5. 고대 신석기

이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며,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1958년에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발견된 고대 신석기 유적지다. 기원전 6000년경에 이곳은 떠들썩한 교역 도시였고, 처음 농경 사회가 나타난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아주 가까웠다. 흑요석의 교역은 이 인상적인 도시가 크고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유럽 전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맹금류나 다른 동물이 먹을 수 있도록 시체를 밖에 내놓았다. 이것은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 과정에 속하는 일이었다. 살이 다 제거되고 나면 사람들은 장례식을 통해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에 깊은 경외심을 표현했고, 뼈는 새 생명의 씨앗이었다.

이 사람들은 새로운 농경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주변의 자연환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3000년경까지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나무가 베어져 농경지가 되었다. 그래야 정착해서 작은 마을과 도시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는 주민이 500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들에게도 독특한 형태의 문자 상징체계가 있었는데 소용돌이 꼴과 나선형 무늬에 덮여 있는 것들이 유럽 전역 100곳이 넘는 거석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페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달리 지금까지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들은 신전과 묘지,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여성상 같은 종교적인 것에서 발견되었다.

6. 어머니 여신

여성들은 사회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감독했다. 크레타 섬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산토리니 섬에 있는 테라 궁전의 프레스코화에는 여성들이 발코니에 서서 젊은 남성들이 제물로 바칠 동물을 끌고 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에서는 사제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다.

미노아 문명의 법에서 여성은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어머니의 남자 형제가 어머니의 자식을 기를 책임이 있는 것도 전통이었다. 이 같은 관습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낯설어 보이지만,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에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인더스 문명과 신석기 시대 초기의 유럽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어머니 여신을 숭배했다. 기원전 3000년에 만들어진 벌거벗은 임신한 여성 상은 크레타 섬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섬에서도 모두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신성한 동굴이 300개 넘게 발견되었는데, 많은 동굴이 여신을 숭배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들 초기 문명이 남긴 증거들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뚜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고대 인디스 강 유역에서부터 아나톨리아의 산들을 가로질러 지중해의 섬들과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오크니 제도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진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은 신전과 묘지를 통해 평화를 사랑하고 어머니 자연을 숭배했던 생활양식을 증언하는 일련의 비슷한 정신을 가진 문명들이다.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믿음은 뱀과 독수리, 임산부, 달과 같은 온갖 형상의 어머니 여신에 대한 숭배로 나타났다. 뛰어난 공예술과 기술,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은 자연의 평등 정신과 더불어 이들이 남긴 유산의 일부다.

정착생활의 시작

어떻게 기후 변화로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한가지 예를 우리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불리는 곳에서 볼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상이집트에서 나일강을 따라 하이집트로 내려가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거쳐 북쪽으로는 터키 중부까지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거쳐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지역이다.

1. 정착 생활의 시작

나투프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레바논 근처에 있는 해안가에 정착했다. 바다에는 그들이 식량으로 쓸 물고기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더 올라가 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땅이 비옥하고 풀이 자랐다. 알고보니 그곳은 늘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원이 풍부했다. 

어떤 철에는 가젤 같은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어떤 철에는 작은 마을에 정착해서 살았다. 그들은 마을에서 진흙과 찰흙으로 둥근 오두막을 지어 일 년 내내 그곳에서 살거나 1년에 얼마 동안을 그곳에서 지냈다. 최근에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에서 나투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여러 곳 발견되어 발굴되었다.

그런데 자연이 변덕을 부렸다. 과학자들은 얼마 안 있어 그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기온이 지난 8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꾸준히 올라가지 않고 느닷없이 뚝 떨어져 다시 빙하기가 찾아왔다. 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세계의 대부분이 다시 꽁꽁 얼어버렸다. 갑자기 땅이 눈의 여왕의 사악한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 여왕의 주문이 약 1300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어린 드리아스기’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약 1만2700년 전에 일어났다. 우리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은 그린란드의 얼음 시추 시료에서 얻은 증거 덕분이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80만 년 전의 지구의 기온까지 추산해낸다.

지금 전문가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이 따뜻한 것은 멕시코 만류가 따뜻한 물을 유럽으로 실어 나르기 때문이며, 이 멕시코 만류는 아메리카 대륙의 북동 해안을 따라서 기류와 해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도록 하는 염도가 높은 바닷물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북아메리카 빙하에 갇혀 있던 담수가 흘러넘쳐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자 해수의 염도가 엄청나게 낮아져 멕시코 만류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거나 완전히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2. 곡식의 수확

이는 왜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기온이 그렇게 쑥 내려갔다 올라갔는지도 설명해줄 것이다. 약 1300년 후에는 다시 많은 양의 담수가 빙하에 갇히면서 지구의 기온이 10년 만에 자그마치 5도나 올라갔다. 북해의 염도가 증가해 멕시코 만류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그때까지 그렇게 급격한 기후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특히 유럽과 지중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가 사냥터가 범람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가뭄이 시작되어 그나마 남아 있던 울창하고 비옥한 삼림 지대가지 잡목이 우거진 메마른 땅으로 변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밀 같은 들풀이 나투프 사람들의 주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는데, 날씨가 뜨겁고 건조해지자 모두 시들어버렸다. 어떤 전문가들은 어쩌면 그래서 나투프 여자들이 실험 삼아 씨를 뿌리고, 땅을 미로가 보리, 호밀 같은 풀을 재배하기 좋게 일구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굶어죽을 상황에 처하자 여자들이 가장 크고 가장 달콤하고 가장 수확하기 좋은 씨를 골라서 저장해두었다가 다음해에 특별히 준비한 땅에 뿌렸다는 것이다. 나투프 여자들이 역사상 가장 먼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 같다. 나투프 사람들의 창의성은 현대 고고학자들이 곡물을 수확할 때 쓰는 곡괭이와 낫의 형태를 지닌 농기구를 발견함으로써 증명되었다. 

3. 동물 길들이기

고고학자들은 오늘날의 시리아에 있는 아부 후레이라라고 하는 나투프 사람들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을 공들여 면밀히 조사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을 보면 이곳에 가장 좋아 보이는 씨들만 골라서 뿌리는 방식으로 야생 곡물을 재배할 줄 아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식량이 되었던 들풀이 죽어버리자 살기 위해 가장 쉽게 자라는 씨를 뿌려 기르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씨가 발견된 곳을 보면 그들은 자연히 습기가 모이는 비탈에 씨를 뿌린 것 같다. 그러고는 잡초와 떨기나무가 접근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산비탈의 논다랑이와 비탈을 적극적으로 관리해 농작물이 최대한 좋은 결실을 맺도록 했다.

나투푸 사람들은 처음으로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얄려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은 고분고분한 늑대를 선택함으로서 마침내 집에서 기르는 개로 길들였다. 개는 가까운 지역에 사는 다른 동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생 양과 염소, 멧돼지, 말을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개의 도움으로 이런 야생 동물을 길들여 한 곳에 놓고 길러 고기과 젖을 얻기가 비교적 쉬웠다.

왜 어떤 동물들은 애완동물이 되거나 농장에서 평화롭게 사는데 어떤 동물들은 그렇지 않을까? 최근에 이런 동물들의 역사를 연구한 과학자들은 야생 동물이 가축으로 길들여지려면 최소한 세 가지 특성이 있어야 함을 발견했다. 

그것은 무리를 지어 살아야 하고, 체계적 사회 구조가 있는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고, 다른 종의 동물들과 풀을 뜯어먹는 영역을 공유해도 괜찮아야 한다는 것이다.

4. 또다른 선택

늑대와 야생 양, 야생 염소가 인간에게 선택적으로 번식되고 8천 년 전에는 여기에 돼지와 소가 합류했고, 약 6천 년 전에는 유럽과 극동을 잇는 유라시아 스텝에 있는 야생 풀밭과 숲에서 돌아다니던 당나귀와 말이 합류했다.

나투프 사람들은 개를 사랑했다. 사람과 개가 나란히 묻힌 무덤도 발견되었다. 나투프 사람들의 무덤들은 이들이 가축을 길럿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준다. 높은 유아 사망률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나투프 사람들의 무덤 가운데 3분의 1에는 여덟 살 미만의 아이들의 골격이 들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의 선택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자연히 이런 새로운 질병에 취약한 사람들은 쉽게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보다 죽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 세대가 지나면서 가축과 가까이 산 사람들은 가축이 퍼뜨리는 병에 대한 면역력이 강해졌다.

약 1만1400년 전에 어린 드리아스기가 끝나자 기후가 예전처럼 다시 온화해져 불과 몇 년만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 사람들은 온갖 초목이 자랄 수 있게 비가 충분히 오는 풍요로운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형태로 생존에 필요한 강력한 무기를 지니게 되었다. 가축과 씨는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5. 새로운 생활방식

기원전 9천 년경부터 새로운 영원한 정주민이 중동 전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신석기 시대‘ 농사꾼들은 이제 훨씬 큰 공동체에서 살 수 있었다. 농사를 지을 줄 알게 되고 가축을 길러 고기와 젖도 먹고 끄는 힘으로도 쓸 수 있게 되면서 창고에 먹을 것이 그득하게 쌓인 덕분이었다. 사냥과 채집이 일부에게는 과거의 전통이 되고 있었다.

예리코는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도시 가운데 하나다. 면적이 그 전에 나투프 사람들이 살았던 곳보다 여덟 배나 크고, 최초로 성벽을 두른 도시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발굴 결과 둥근 집들이 발견되었는데, 방이 하나 이상 있는 집들이 많았고, 요리와 빨래같은 것을 하는 개방된 공간도 있었다

이런 초기 건물들은 돌로 토대를 놓았고, 바닥에 자갈을 깔았으며, 진흙과 찰흙으로 만든 별돌로 벽돌로 벽을 쌓았다. 발견된 곳마다 돌이나 진흙으로 지어 식량과 곡물을 쌓아둔 창고가 있었는데, 이는 적어도 이 사람들에게는 돌아다니며 살던 날들이 이제는 오래된 과거였다는 분명한 증거다.

이들은 필요에 의해 자연을 자기들에게 맞게 바꿀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새로운 생활방식이 탄생했다.

6. 문화적 접촉

예리코의 서편에는 성벽이 쌓여 있었다. 한때는 이들을 시기하는 이웃들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믿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던 바다에서 느닷없이 밀려오는 진흙과 바닷물을 막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데 새롭게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 사람들이 떠오르는 다른 문화들과 접촉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흑요석은 화산의 용암이 급격히 식을 때 생기는 일종의 천연 유리다. 가장 날카롭고 가장 효과적인 화살촉을 만들 수 있어 사람들은 이것을 많이 찾았다.

터키 중앙에 있는 바위산에서는 흑요석이 자연히 생성되지만, 이것은 수백 마일 떨어진 신석기 시대의 예리코에서도 발견되었고, 이로부터 우리는 장거리 교역로가 이미 잘 닦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왜 이미 먹기 좋고 수확하기 좋게 만든 귀중한 씨앗을, 1천 년 이상 특별한 선택과 힘든 노동이 낳은 산물을 유리와 교환하지 않았겠는가? 한 곳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농사를 짓고 씨를 공급하고 가축을 기르는 방법이 유럽과 중동은 물론 그 너머까지 금세 널리 퍼졌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