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스파르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자유가 가장 고귀한 재산이라고 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시민들은 아주 예민해져 조금만 통제 수단을 써도 참을 수 없는 전횡이라고 분노할 것이다, 어떤 지배도 받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결국은 법도 무시할 것이다. 그것이 성문법이든 불문법이든…

1. 통치제도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철학서인 <공화국>에서는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놓고 계속 논쟁을 벌인다. 그는 민주적인 아테네 사회에서 친구이자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을 선고한 것에 분노했고, 그의 저작은 모든 대중적 정부 형태에 대해 냉소적이다.

그는 나쁜 민주주의보다 참주 정치가 낫다고 했다. 참주 정치에서는 한 사람만 나쁜 짓을 저지르지만 민주 정치에서는 모든 사람이 나쁜 결정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허상만큼 그가 냉소한 것은 없다. 그는 자유가 금방 부도덕과 무법, 무정부로 전락할 거라고 믿었다.

탈레스처럼 플라톤도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의심이 없는 순진한 세상에 환상을 심어준 제우스와 아폴론, 아프로디테 같은 그리스의 전통적인 신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도 철학적 추론과 사색을 통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가 그린 이상 사회에서는 자신의 통찰을 백성들과 공유하는 철학자 왕이 다스렸다.

2. 선택적 번식

플라톤은 사람이 식물과 동물을 선택적으로 번식시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도 같은 기법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기발한 제안을 했다.

” 되도록 많은 아이가 용감한 사람을 아버지로 둘 수 있도록 용감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용감한 사람을 결혼 상대자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 남부에 있던 스파르타라는 도시는 이런 급진적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431년에서 405년까지 동맹을 맺은 도시 국가들을 이끌고, 갈수록 세력이 커지고 있던 아테네 동맹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스파르타의 유명한 사령관 리산드로스 덕분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전설적인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궤멸시켰다. 아테네는 포위당한 지 얼마 안 되어 항복했고, 그후 30년 동안 스파르타의 왕이 그리스의 대부분을 다스렸다.

3. 두려움 없는 전사

이 도시가 막강한 아테네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비결은 인류가 실험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조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스파르타는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전체주의적 군사형 사회였다. 

스파르타를 세운 전설적 인물 리쿠르고스델포이 신전에서 받은 신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델포이 신전은 그리스 사람들이 의학과 치료, 빛과 진리의 신인 아폴론에게 바친 유명한 신전이다.

리쿠르고스는 너무 약하게 태어나 군인이 될 수 없는 남자아이는 타이게투스 산의 황량한 비탈에 버려 죽게 내버려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 않은 남자아이들은 모두 일곱 살이되면 군사훈련소로 보내 두려움이 없는 전사가 되도록 배워야 했다.

소년들은 청년들이 채찍을 휘두르는 고된 시련을 견뎌내야 훈련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가장 약한 아이들이 죽었고, 따라서 선택적 번식이라는 원칙이 더욱 철저하게 지켜졌다. 소년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 않고 훔쳐 먹도록 했다. 훔치다가 붙잡히면 훔쳤다고 벌을 주는 게 아니라 서툴러서 붙잡혔다고 벌을 주었다.

4. 스파르타 사회

스파르타 사회는 ‘호플리테‘와 ‘헬로트‘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전자는 통치를 하고 군사 훈련을 시키는 스파르타 원주민이고, 후자는 해외에서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들에서 농사를 짓는 노예들이었다. 

스파르타에서는 군인들이 훈련을 마치면 시골로 보내 어두워진 뒤에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헬로트가 있으면 무조건 죽이도록 했다. 크립테이아라는 이런 조치는 젊은 스파르타 병사들이 왕성한 살인 욕구를 느끼도록 할 수 있었을 뿐 아니가 헬로트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일거양득의 조치였다.

스파르타 사회는 플라톤 같은 일부 고대 철학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훗날 1930년대의 히틀러유겐트 운동 같은 이데올로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히틀러유겐트 운동에서는 아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가 개인이나 가족에 대한 의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흐플리테는 당연히 가족에 대한 의무보다 도시의 복지를 우위에 두어야 했다. 이들은 방진법으로 훈련을 받았다. 방진에는 절대적 충성이 요구되었고, 모든 사람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가장 강하고 가장 두려움이 없는 병사들로 진을 치고 뒤에서 강하게 밀면 어김없이 승리를 거두었다.

선택적 번식은 성인 남성들에게도 실시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스파르타 여성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오더라도 방패 없이 돌아오는 호플리테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5. 군사적 사회 구조

스파르타 여성들은 고대 그리스의 어느 곳에서보다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여성들이 아름다움과 지성, 힘을 기르면 지배자 인종을 낳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남녀가 모두 발가벗고 나란히 육상 경기 훈련을 받았고, 여성들이 채찍을 휘둘러 누가 가장 인내력이 강한지를 보는 디아마스티고시스로 알려진 경기에 참여 하기도 했다. 이것은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치는 의례였는데, 리쿠르고스가 그 전에 제물이 될 사람을 제비뽑기로 뽑아서 바치던 의례를 대신하도록 장려한 것이었다.

완전히 체력 단련과 선택적 번식, 군사적 승리에 토대를 둔 사회 구조였으니, 근처에 있는 올림피아에서 경기를 통해 인간의 신체적 능력의 절대적 한계를 시험하는 육상 경기 대회를 연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최초의 올림픽 경기장은 헤라클레스가 열두 가지 노역을 마친 뒤 아버지 제우스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와 6세기에는 그리스 사회에서 이 대회가 엄청나게 중요해졌다.

도시 국가들마다 시민의 긍지라는 최고의 영예를 얻으려고 가장 훌륭한 선수들을 출전시켰다. 승리자는 시와 조각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예로운 월계관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6. 스파르타의 종말

올림픽 대회는 서기 393년까지 계속되었으나,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것을 야만적인 이교도의 축제로 불법화했다. 그러다 1896년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체력을 향상시키고 세계의 젊은 이들이 스포츠를 겨룸으로써 현대 국가들이 좀 더 가까워지는 길로 올림픽 대회를 부활시켰다.

모든 제국과 마찬가지로 스파르타도 결국 막강했던 세력이 약해졌다. 스파르타의 인간 공학 실험은 결국 실패했다. 대중의 지지가 없고 군을 크고 강하게 유지할 자발적이고 능력 있는 남성의 공급이 줄어든 탓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그 지경에 이르기 오래전인 기원전 380년경에 또 다른 세력이 이미 고대 그리스의 북쪽에서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이것은 도시 국가들의 독립성에 종지부를 찍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 문명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본보기를 전 세계에 널리 퍼뜨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