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왕국

떠도는 유목민들과 이들과 경쟁한 문명들 사이의 충돌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파괴적이며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인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을까?

1. 고대의 분쟁

아소카 왕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동 지방에서는 그가 주창한 불교의 왕도가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기원전 900년경부터 300년경까지 세계의 이 부분은 유목민과 정착민, 동쪽과 서쪽에서 새롭게 떠오른 제국들 사이의 갈등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이들은 패권을 놓고 다투면서 서로 맞서는 종교를 채택했고, 오늘날까지 계속되며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분쟁이 거기서 비롯되었다.

이런 고대의 분쟁이 일어난 것은 아마 모든 생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연 현상인 물의 순환이 지닌 특이한 성질 탓이었을 것이다. 동유럽에서 흑해를 지나 중국 동북부까지 드넓게 펼쳐진 초원 지대인 스텝을 가로지르면서 세계의 기후는 점차 건조해지고 뜨거워진다. 

그리고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습하고 따뜻한 바람은 유라시아 스텝 지역의 동쪽에 있는 고지대보다 서쪽에 있는 저지대에 훨씬 인간과 동물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동쪽에 있는 고지대는 고도가 올라가면 비가 자취를 감추어 내륙 지역이 속살을 드러낸 거친 관목 지대나 다름없는 황량한 땅이 된다.

유목민은 푸른 채소가 많고 비가 충분히 오면 아주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때로 그렇듯이 날씨가 너무 뜨거워지고 건조해지면 꼼짝없이 서쪽과 남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원전 700년경부터 동물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스텝 지역의 인구가 증가했고, 인구는 증가했는데 건조한 날씨가 닥치자 잘 무장된 유목 민족이 잇따라 비옥한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과 중동 지역에 사는 정주민 공동체들이 삶을 위협했다.

2. 유대인 왕국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00년부터 448년까지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벌인 치열한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무서운 유목민족 스키타이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 한때 아시아에서 살았고, 거기서 마사이게타이족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하자 아라스 강을 건너 킴메르족의 땅으로 들어갔다.”

스키타이와 킴메르족은 비옥하고 물이 많은 땅을 찾아 서쪽으로는 동부 유럽으로, 남쪽으로는 중동으로 밀고 내려오기 시작한 많은 기마민족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들이 2500년도 더 전에 기후와 강수량의 변화에 밀려 이주하면서 일어난 일대 혼란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아주 뿌리 깊은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분쟁의 형태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1050년경부터 700년경까지 이 사람들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땅에 용케 정주하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에는 이들이 어떻게 이집트로부터의 대탈출이라는 것을 해서 그들의 나라를 세웠는지가 나와 있다.

전문가들은 아마 기원전 500년경에야 구약성서가 쓰였을 것이라고 믿으며,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역사가 오랫동안 대대로 구전되면서 신화와 뒤섞였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성경에서 기원전 1050년경에 유대인 왕국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말하는 것들 가운데는 적어도 실제로 일어난 일을 어떤 시각에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많다는 확신이 되살아났다.

3. 약속의 땅

유대인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우르라는 도시에서 양을 치던 유목민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신에게 가나안이라는 땅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신이 자신을 유일한 신으로 숭배한 대가로 그와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그 땅을 준 것이다

아브라함이 실존 인물임을 확인해주는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그에게는 두 여자에게서 낳은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스마엘은 하갈이라는 하녀에게서 낳은 장남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기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이 하갈과 아이를 갖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태어난 뒤 놀랍게도 사라도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이 아들을 이삭이라고 불렀다. 이삭의 자식 가운데 하나인 야곱은 아들을 열둘 두었다. 이들이 저마다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 열두 부족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이 먹을 것을 찾아 이집트로 달아나 노예가 되었을 때에도 신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모세에게 했다. 신은 모세에게 유대인 부족들은 자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일련의 법을 주었고, 그것이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의 토대가 되었다. 모세는 결국 신의 도움으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했고, 이들은 신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장남 이스마엘은 유대인 성서에서 금방 사라지지만, 훗날 우리의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무함마드가 서기 610년경부터 신에게 받은 계시를 집대성한 코란에 따르면, 이스마엘도 아들을 열둘 두었고 아랍인은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신은 정확히 누구에게 약속한 땅을 주었얼까? 아랍인일까, 유대인일가? 아니면 이들이 공유하는 법을 배우도록 둘 다에게 주었을까? 누가 이땅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끈질기게 오랫동안 계속된 분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4. 분열의 시작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은 기원전 1050년경부터 930년경까지 가나안에서 살았다. 기원전 1008년경에는 돌과 물맷돌로 펠리시테의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소년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어 요르단 강변에 있는 예루살렘에 그들의 수도를 세웠다. 다윗의 아들인 현명한 솔로몬 왕은 여기에 최초의 신전을 지었다.

한 집단의 사람들이 다른 모든 집단을 누르고 신에게 선택되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그들의 문명이 가장 뛰어나다고 믿었고, 중국의 상 왕조도 갑골에 새겨진 것들이 증언해주듯이 그들의 통치를 하늘이 승인했다며 정당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받은 약속은 다른 약속과 달랐다. 그것은 하나뿐인 전능한 신이 두 번이나, 즉 한 번은 아브라함에게, 한 번은 모세에게 한 약속이었다. 게다가 유대인의 역사 초기에 일련의 참담한 일을 겪은 뒤에는 그런 약속을 문서로 만들어두는 것이 바로 그들의 생존의 열쇠가 되었다.

솔로몬의 치세 뒤에 유대인 열두 부족은 옥신각신하다 왕국을 둘로 쪼개기로 했다. 이스라엘로 불린 북쪽 반에는 열두 부족 가운데 열 개 부족이 자리를 잡고, 나머지 두 부족은 남쪽에 있는 유다에 자리를 잡았다. 

기원전 722년에 북쪽에 자리 잡은 부족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동쪽에서 아시리아의 왕 샬마네세르 5세와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가 쳐들어와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정복했다. 아시리아 사람들은 나중에 도시를 재건했지만 그곳에 다시 아라비아 사람들과 시리아 사람들이 살도록 했다.

5. 선택받은 사람들

유대인들은 4만 명이나 아시리아의 도시 니네베로 끌려가 관개 시설에서 노예로 일했다. 수천 명은 남쪽에 있는 왕국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달아나, 예루살렘의 인구가 다섯 배나 증가했다. 유대인들은 금방 통합되어 과거의 이질적인 부족들의 집합체에서 자기들은 하나뿐인 전능한 신, 여호와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신에게 약속의 땅을 받았다는 공통된 믿음을 가진 한층 통일된 공동체가 되었다.

아시리아의 사르곤의 최대 관심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위협적인 존재가 북쪽과 동쪽에 있었다. 유목민인 킴메르족과 스키타이였다. 이들은 둘 다 가축을 방목할 습하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705년에 이들의 흉표함이 사르곤을 능가해, 사르곤은 이들과 싸우다 죽었다.

사르곤의 후계자 센나케리브는 아시리아의 화력을 다시 오늘날의 이라크에 있던 바빌론으로 돌렸다. 바빌론 사람들도 몇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에사르하돈 왕 밑에서 바빌론은 아시리아의 수도가 되었고, 에사르하돈 왕은 이제 서쪽으로 눈을 돌려 가장 군침이 흐르는 사냥감인 이집트를 노렸다.

기원전 671년에 에사르하돈은 이 역사적인 땅을 침입해 약탈하는 데 성공해 잠시 동안이나마 아시리아 제국을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만들었다. 이제 아시리아 제국은 이집트에서 인도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원전 627년에 그의 아들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자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제국은 결국 스키타이와 킴메르족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다.

아시리아의 세력이 기울자 바빌론은 다시 독립했다. 기원전 612년에 바빌론 군이 니네베에 있던 아시리아의 수도를 점령해 아시리아 사람들을 해치웠고, 그 전에 먼저 골칫거리인 스키타이와 되도록 견고한 동맹 관계를 맺었다. 안타깝게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는 독립한 바빌론 세력의 부상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6. 바빌로니아

비빌로니아는 갈수록 강성해져 무시무시한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치세에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폐허가 된 도시 바빌론을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신전을 복구하고, 왕궁을 완성하고, 지하도를 짓고, 유프라테스 강에 돌로 만든 다리를 놓고, 도시 둘레에 난공불락의 성벽을 세 겹이나 둘렀다. 그렇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바빌론의 공중정원이다. 아내 아미타스가 고향 근처에 있는 산속의 샘을 그리워하자 아내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또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메디아 성벽을 세워 북쪽의 스키타이와 킴메르족의 공격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했다. 이제 그는 누구나 가장 탐내는 이집트를 집어삼킬 준비가 되었다. 

서쪽으로 가는 길에는 물론 예루살렘이 있었고, 그는 기원전 59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해 당시 유대인의 왕이었던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보내고 시드기야를 대신 왕의 자리에 앉혀 봉신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몇 년 뒤에 시드기야가 예루살렘 사람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결과는 처참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또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봐주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불태우고, 신전을 박살냈다. 

시드기야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예리코 평원에서 붙잡혔다. 그리고 눈앞에서 아내와 자식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지상에서 그가 본 마지막 장면이 되도록 눈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완전히 실의에 빠져 포로로 잡힌 유대인 2만7천여 명과 함께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7. 키루스

이때 유대인의 수도 두 곳이 모두 약탈당하고 불에 타, 이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은 집도 절도 없이 뿔뿔이 흩어지고 노예가 되어 금방이라도 역사책에서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70년 뒤에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실질적으로 바꾸어놓았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이들을 구했다. 생전에 그는 아시리아 제국보다 훨씬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이름은 키루스, 기록된 역사에서 최초로 후대에 ‘대왕‘이라고 불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키루스는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그의 아버지가 페르시아 왕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근방에 있던 메디아 왕국 통치자의 딸이었다. 키루스는 이들의 외아들이었고, 따라서 두 땅을 모두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둘을 합쳐 하나의 영토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키루스는 기원전 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메디아 왕국으로 진군해 들어가 자기 할아버지인 메디아 왕국의 왕 아스티아게스를 물리치는 큰 기쁨을 누렸다. 전설에 따르면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가 어렸을 때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키루스는 다음에는 북쪽으로 진군해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맹자인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을 물리쳤다. 그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생뚱맞은 전술로 꼽힐 만한 묘책을 써서 말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군대 앞에 낙타의 무리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낙타들에게서 어찌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 리디아 말들이 질색을 하고 달아났고, 크로이소스는 붙잡혔다.

기원전 542년에는 키루스의 오랜 친구이며 동맹자인 하르파구스가 소아시아와 페니키아를 그의 영토에 보태 명실상부한 제국이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키루스는 남쪽으로 관심을 돌려,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운하로 돌린 뒤 강을 건너 바빌론으로 쳐들어갔다. 기원전 539년 10월12일 밤에 그들은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았다. 바빌론의 점령으로 시리아와 페니키아, 이스라엘이 키루스의 제국에 더해졌다.

8. 키루스 원통

키루스의 페르시아 제국은 다른 문화와 종교를 용인하고 존중하는 정책을 쓴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사트라프라고 하는 지역의 통치자를 정복한 땅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바빌론을 점령한 후 키루스는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고, 새 신전을 지어 넵카드네자르가 파괴한 것을 대체하도록 했다.

키루스는 “비용은 왕실에서 대도록 하라. 예루살렘 신전에서 가져온 금그릇과 은그릇도 되돌려주어라. 모두 예루살렘 신전 본관 제자리에 가져다 두도록 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것은 성경 에스라서에 이야기되어 있다. 에스라는 수많은 유대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키루스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성경에서 메시아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는 그들의 유일신 여호와가 보낸 왕, 신이 임명한 왕이었다.

1879년에 고대 바빌론의 성벽 아래서 키루스 원통이 발견되었다. 이 원통은 성경에서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이 사실임을 확인해준다. 원통에는 또 키루스가 모든 형태의 노예제와 강제 노동을 없앴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원통은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뉴욕에 있는 국제연합 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는 방 옆에는 이것의 모형이 있다. 키루스는 관용 정책의 일환으로 자신은 유일신을 믿는데도 바빌론 사람들이 계속 그들의 으뜸 신인 마르두크를 비롯한 많은 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했다.

문명의 변화

기원전 1400년부터 1100년까지는 한때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웅장하고 영웅적인 전쟁으로 여겨졌던 트로이 전쟁의 무대이기도 했다.

1. 트로이 전쟁

트로이 전쟁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지휘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 세력과 트로이 사람들이 싸운 전쟁이다. 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 시점으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뒤에 쓰인 두 편의 서사시에 담겨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들이 개입해 자기들이 좋아하는 인간들의 일에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10년에 걸친 전쟁 끝에 결국 그리스 사람들이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

그리스 사람들이 트로이의 성벽 밖에 거대한 목마를 남겨놓자 호기심이 발동한 트로이 사람들은 안에 적의 정예부대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목마를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 거대한 구조물에서 병사들이 몰래 나와 성문을 열었고, 그리스 군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와 도시를 삼켜버린 것이다. 

2. 보물 사냥꾼

하인리히 슐리만은 독일인 보물 사냥꾼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때 한 재산 모은 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읽어준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사실에 토대를 둔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자신의 삶과 재산을 바쳤다.

그는 먼저 트로이라는 고대 도시가 있던 곳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역사가들은 트로이가 신화 속 도시라고 믿었다. 2년 동안 터기의 히사를리크에서 철저하게 발굴 작업을 한 끝에 그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했다고 세상에 알렸다

그가 발견한 보물 가운데는 금관과 팔찌, 굽 달린 잔, 목걸이, 귀고리 같은 금붙이들뿐만 아니라 은과 구리로 만든 꽃병과 청동 무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이 보물을 발견한 지층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있는 때보다 수백 년이나 전에 생긴 것으로 밝혀져, 이 유물이 정확히 얼마나 진짜인지가 여전히 논쟁거리다.

슐리만은 보물을 발견했을 때 터키 당국에 알리지 않고 보물을 몰래 가지고 나갔다. 결국 배신당한 터키 당국이 그의 발굴 허가를 취소하고 영원히 발굴을 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 덕분에 몇 년 뒤 그는 다시 히사클리크에서 발굴 허가를 받아냈다.

3. 전쟁의 흔적

1876년에는 슐리만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던 미케네라는 도시를 발굴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가 발견한 것이 진품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련의 왕릉 다섯 기를 발굴했고, 그 안에는 열아홉 사람의 유해가 들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황금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사람들 옆에는 칼과 단도, 흉갑이 묻혀 있었다.

그러나 슐리만의 희망과 달리 이 사람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기 500년 전쯤인 기원전 1600년경의 지층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케네 문명의 그리스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처음 통치자로서 자리를 잡은 때였다. 이들은 왕과 지배 계급이 화려한 장식전쟁 무기로 군사적 정복을 찬미한,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의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조금도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게 없다면 그것을 그냥 웅장한 이야기로 즐겨도 될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보다도 뛰어나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빠른 전개와 뚜렷한 생각, 명쾌한 문장 때문이다. 전해오는 말에는 호메로스가 맹인이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역사적 증거도 뚜렷하지 않다. 그이 이름이 호메리다이라는 고대 시인 사회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호메리다이는 인질로 잡혀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과거에 한 번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서사시적 이야기를 쓰는 일을 맡았던 죄수들이다.

4. 종교적 세계

호메로스의 시들이 청동기 시대 후기에 지중해에 닥쳤던 혼란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준다면, 그보다 훨씬 유명한 또 하나의 문헌은 바로 그 즈음에 이집트와 요르단.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호메로스의 시처럼 성경의 맨 앞에 있는 다섯 권의 책도 그 안에서 말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 때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에 문자로 쓰였다. 이 종교서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신성하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거기에 쓰여 있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신이 한 말이라고 믿는다.

이들 초기 책에서 가장 극적인 역사적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신이 모세를 통해 역병을 보내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은 이집트 파라오를 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때로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1939년에 쓴 <모세와 일신교>라는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설을 내놓았다. 그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유대인 탈출을 개성이 강한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의 치세와 연결시켰다. 아크나톤은 아름다운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신은 하나밖에 없다고 선언해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그에 따르면, 태양신유일한 신으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자신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집트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숭배한 다른 신들을 모두 믿지 못하게 했다. 파라오와 그의 아내는 태양이 떠오르는 나일 강 동쪽에 있는 아마르나에 새 수도를 세우고, 아톤을 어둡고 침침한 신전이 아니라 환하게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 숭배하라고 명령했다

5. 해상무역

이집트 사람들은 그런 믿음의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크나톤이 죽자 강력한 아몬의 사제들이 곧 원래 상태로 되돌리고 역사적 기록 가운데 이 혁명적 파라오에 관한 언급을 거의 모두 없앴다. 

프로이트는 이때 모세가 이집트에서 살았다고 믿고, 따라서 그의 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아크나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사회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는데 아크나톤의 개혁이 뒤집히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탈출은 기원전 1350년경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10년 전쟁이나 이집트로부터의 대탈출을 증언해주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지만, 오랫동안 구전되다 호메로스와 성경을 쓴 사람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된 그런 이야기들에는 분명히 역사가 들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연재해, 말과 바퀴, 금속무기의 결합으로 지중해와 유럽, 중동의 청동기 시대 세계를 괴롭혔던 긴장과 폭력, 잔인함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이런 안 좋은 상황에서도 페니키아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해상무역을 했다. 주변이 온통 소란했지만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기원전 800년까지 값비싼 자주색 물감을 만들어 파는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이들은 또 배를 만드는 삼나무도 거래해 이집트로 실어나르고,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도 만들고, 주석과 은, 구리를 메소포타미아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페니키아 사람들의 무역 전초 기지는 지중해 전역은 물론 북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시칠리아와 키프로스, 사르디니아, 카르타고에도 있고 에스파냐 남부에 있는 카디스에도 있었기에  본국이 침략자들에게 위협을 받아도 자신의 문화와 함께 그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6. 알파벳의 탄생

페니키아 사람들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원시적인 상징 문자를 훨씬 유연한 알파벳으로 바꾼 것이다. 알파벳은 제한된 수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이런 형태들이 저마다 입에서 나는 작은 소리를 나타냈다.

기원전 1200년경에 무역 거래 내역을 좀 더 쉽게 기록하려고 개발한 이런 문자 체계는 나중에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토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동과 인도 문자 체계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사실 오늘날 사용되는 언어 가운데 알파벳에 기반을 둔 언어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문자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말과 금속, 바퀴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의 고대 문명을 빠르게 탈바꿈시켰다. 이것들은 자연의 세계를 이용해 군사적,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인간의 탐욕에 불을 질렀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억압, 군사적 경쟁의 뿌리를 추적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바로 여기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