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여신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자연의 순환을 숭상하는 것이 어떻게 생식력과 여성성, 평등에 헌신한 어떤 인간 문명들의 대표적 특징이 되었을까?

1. 잃어버린 문명

1827년 찰스 매슨이라는 영국 스파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이 있는 인도의 아그라 군사기지를 떠나 동료 군인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심부름을 하러 서쪽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금은 파키스탄 동북부에 있는 하라파라는 곳에서 우연히 폐허가 된 고대 도시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언덕위에 성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서 보석과 팔찌, 발찌도 발견하고, 고대 마차 세 대의 잔해도 발견했다. 그러나 지역 사람들이 경고한대로 쏘는 각다귀 떼의 공격을 받는 바람에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폐허가 된 도시를 그렸다. 그는 자신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전문적 발굴이 이루어져 수천 년 동안 진흙과 모래, 먼지 밑에 숨어 있던 이 잃어버린 문명의 전모가 드러났다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은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하라파가 지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이 드러났다. 그후로도 유적지가 2500곳 넘게 발굴되었는데, 이 정착지들은 고대 이집트와 수메르에 처음 세워진 도시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들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졌다.

2. 인더스 문명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메르가르라는 고대 정착지에서 왔다. 메르가르는 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 시비라고 하는 작은 도시 근방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는 것을 처음 보여주는 것들, 예를 들면, 밀과 보리 같은 농작물의 자취와 가축으로 기른 소와 염소, 양의 뼈는 기원전 7000년경의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진흙으로 간단하게 지은 건물에서 살았고, 이집트 사람들처럼 묘소에 현대 역사가들이 그들의 생활방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수백 개의 작고 단순한 여성상이다. 이것들은 대개 석간주 물감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가지 유형의 머리 모양과 장식을 보여준다.

기원전 2600년경부터 기후가 변하면서 땅이 메말라 이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동해 훨씬 비옥한 인더스 강 유역으로 갔다. 물론 물건을 만드는 기술과 지식도 함께 갔고, 기원전 두 번째 천 년이 끝났을 즈음에는 인디스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아주 멋진 도시를 다수 건설했다. 이들 도시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 생활이 연상되는 것듯이 많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시들이 되었다.

이 사람들은 도시 설계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거리가 현대 미국 도시처엄 정확히 잰 바둑판무늬 모양으로 편리하게 설계되었고, 거리마다 어떤 사람들 의견으로는 오늘날 파키스탄과 인도의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앞선 하수시설과 배수시설이 있었다. 발굴결과 일련의 큰 공공건물도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집회장과 시민들이 5천 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만남의 장소도 있었다.

공공 창고와 곡물 창고, 목욕탕은 주랑이 있는 마당에 둘러싸여 있었다. 인더스 문을 건설한 사람들은 아마 세계 최초임에 틀림없는 인공 공공 수영장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물이 새는 것을 막으려고 일종의 천연 타르도 썼던 것이 확인되었다. 어떤 집 밑에서는 온돌식 난방시설로 보이는 것도 발견되었다. 유명한 로마의 온돌식 난방시설은 그로부터 2천 년도 더 뒤에 나왔다.

3. 문명의 발달

집집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었고, 폐수는 큰길을 따라 설치된 덮개 있는 배수로로 흘러나갔다. 어떤 집들은 안마당이나 골목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이곳에는 금속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하라파에서만 구리 녹이는 노가 적어도 16개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나 수메르와 달리 이곳에서는 왕릉을 찾아볼 수 없다. 부유한 지배 계습의 특징인 지구라트와 피라미드, 신전, 큰 궁전도 없다. 인더스 문명이 흥미로운 것은 잘 조직된 효율적이 사회였지만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적 생활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를 공유하고 비교적 평등하게 산 것 같다.

인더스 문명은 교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나는 구리와 주석 같은 원료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로탈이라는 도시에는 배가 잘 드나들도록 준설을 하고 운하를 건설해 배가 들어와 물건을 싣고 내릴 수 있게 되어 있는 거대한 부두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교역에도 전문 지식이 있고 건축가와 장인으로서도 능수능란해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측정하고 무게를 정확하게 재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이들은 십진법을 따랐고, 이들이 건물을 지을 때 쓰는 벽돌은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또 수평선 전체를 잴 수 있는 도구도 발명해, 조수와 파도, 해류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발견된 것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독보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벌거벗은 소녀가 춤추는 자세를 하고 있는 청동 상이다. 이것은 모헨조다로라는 도시의 유적지에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뉴델리에 있는 인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주조되었고 키가 11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이것이 독특한 것은 ‘매몰주조법‘이라는 기법으로 주조되었다.

먼저 밀랍으로 소녀의 상을 만든 다음 점토를 입혀서 거푸집을 만들었다. 이것에 열을 가해 안에 있는 밀랍이 녹아 흘러나오면 빈 공간에 청동을 녹여서 부었고, 이것이 식어 점토 거푸집을 떼어내면 안에 있는 청동상이 드러났다. 이런 발달된 청동 주조법을 유럽에서는 그로부터 3500년 이상 지난 서기 1100년경에야 비로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다.

4. 여신 숭배

더 놀라운 것은 이 춤추는 소녀 상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한 솜씨와 발달된 기술만이 아니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이 세계에서는 거리의 하수시설과 주택의 중앙난방 장치에서부터 멋진 부두와 정교한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시대를 앞서 갔던 것 같다.

또한 이 세계에서는 장인과 여성이 농부와 상인뿐만 아니라 사제와도 동등했다. 이들은 모두 어머니 여신으로 알려진 것을 숭배한 듯하며, 이는 이 춤추는 소녀 상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 상이 이 지역에 있는 유적지 전체에서 발견되는 것을 설명해준다.

기원전 4000년경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기원전 1600년경까지, 유럽과 근동의 많은 지역에서도 이들과 비슷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많다.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묘는 대개 흙을 높이 쌓아올린 공동 무덤에 남녀 구별 없이 함께 묻혀 있었다. 

서유럽에서 알려진 것만 이런 고분이 1만 기가 넘는데, 우리는 이것을 ‘거석 기념물‘이라고 한다. 대개 이런 무덤 근처에서 지역의 큰 돌 덩어리로 만든 거대한 구조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물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에 있는 것들처럼 둥글게 원형으로 세워진 것들이 많지만 신전으로 세워져 한쪽 끝이나 중앙에 제단이 있는 것들도 있다. 

아일랜드의 미스 카운티에서 최근에 복원된 뉴그레인지 신전과 묘실은 피라미드보다 500년 일찍 세워졌고, 한 사람이 지었으면 6천 년이 걸렸을 거라고 한다. 또한 지붕이 5천 년이 넘도록 비 한방을 새지 않아, 이것을 지은 사람들의 솜씨를 증언해준다.

5. 고대 신석기

이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며,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1958년에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발견된 고대 신석기 유적지다. 기원전 6000년경에 이곳은 떠들썩한 교역 도시였고, 처음 농경 사회가 나타난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아주 가까웠다. 흑요석의 교역은 이 인상적인 도시가 크고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유럽 전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맹금류나 다른 동물이 먹을 수 있도록 시체를 밖에 내놓았다. 이것은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 과정에 속하는 일이었다. 살이 다 제거되고 나면 사람들은 장례식을 통해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에 깊은 경외심을 표현했고, 뼈는 새 생명의 씨앗이었다.

이 사람들은 새로운 농경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주변의 자연환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3000년경까지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나무가 베어져 농경지가 되었다. 그래야 정착해서 작은 마을과 도시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는 주민이 500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들에게도 독특한 형태의 문자 상징체계가 있었는데 소용돌이 꼴과 나선형 무늬에 덮여 있는 것들이 유럽 전역 100곳이 넘는 거석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페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달리 지금까지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들은 신전과 묘지,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여성상 같은 종교적인 것에서 발견되었다.

6. 어머니 여신

여성들은 사회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감독했다. 크레타 섬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산토리니 섬에 있는 테라 궁전의 프레스코화에는 여성들이 발코니에 서서 젊은 남성들이 제물로 바칠 동물을 끌고 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에서는 사제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다.

미노아 문명의 법에서 여성은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어머니의 남자 형제가 어머니의 자식을 기를 책임이 있는 것도 전통이었다. 이 같은 관습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낯설어 보이지만,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에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인더스 문명과 신석기 시대 초기의 유럽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어머니 여신을 숭배했다. 기원전 3000년에 만들어진 벌거벗은 임신한 여성 상은 크레타 섬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섬에서도 모두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신성한 동굴이 300개 넘게 발견되었는데, 많은 동굴이 여신을 숭배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들 초기 문명이 남긴 증거들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뚜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고대 인디스 강 유역에서부터 아나톨리아의 산들을 가로질러 지중해의 섬들과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오크니 제도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진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은 신전과 묘지를 통해 평화를 사랑하고 어머니 자연을 숭배했던 생활양식을 증언하는 일련의 비슷한 정신을 가진 문명들이다.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믿음은 뱀과 독수리, 임산부, 달과 같은 온갖 형상의 어머니 여신에 대한 숭배로 나타났다. 뛰어난 공예술과 기술,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은 자연의 평등 정신과 더불어 이들이 남긴 유산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