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초기 민주주의

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것을 배운 아주 경쟁력 있는 도시 국가들의 무리에서 어떻게 일련의 실험적 생활방식이 나타났을까?

1. 올리브 무역

수천 년 동안 올리브에서 짠 기름은 고대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천연 연료였다. 가정에서는 그것을 요리에서 등불까지 온갖 군데에 썼다. 올리브맛도 좋고 저장하기도 쉽고 영양가도 높아 고대 인간 세계의 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약 2500년 전에 올리브는 갓 태동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점차 중앙집권화된 중국의 비단과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다.

아테네와 테베, 스파르타, 코린트, 아르고스는 많은 독립된 작은 도시 국가들 가운데 일부였을 뿐이다. 이들 도시는 기원전 650년경부터 자연인간 문명 사이에서 아주 흥미로운 일련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 혁신적인 사회의 토대는 올리브 무역 위에 세워졌다. 마케도니아의 산기슭에서 지중해 동부에 있는 이들 섬까지 펼쳐진 메마르고 험준한 바위투성이 지형에서는 올리브 말고는 거의 자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통틀어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고대 그리스서양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데, 만일 이런 기적 같은 열매가 저절로 열리지 않았다면 고대 그리스는 아마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2. 교역을 통한 부의 생산

그리스 사람들은 곧 올리브를 삶에 필요한 다른 중요한 식량들과 교환할 줄 알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100개나 넘는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 전체에 교역망을 구축해, 올리브가 이집트의 곡물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 나는 철과 구리 같은 원료, 선박을 건조할 때 없어서는 안 될 레바논의 삼나무 목재와 거래되었다.

고대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뒤 다양한 물결의 유목민 부족들이 철로 만든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이주해와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정착했다. 기원전 600년경에는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올리브를 재배하는 방법을 습득해 잘 사는 방법을 발견했다.

생존을 완전히 교역에 의존하는 데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길러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실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먼저, 교역에 기반을 둔 경제로 이들 도시에서는 시장을 중심으로 부를 생산하는 시스템이 고도로 발달했다. 이들 도시의 시민들에게는 곡물이나 쌀, 노예 노동보다 주화대여금이 거래를 할 때 주로 쓰는 통화가 되었다.

이들은 또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는 것이 많이 있었다. 여가 시간이었다. 올리브는 1년 중 몇 개월을 교역으로 얻은 부를 새로운 도시를 짓는 데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이들의 생존이 교역에 달려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의 도시들이 늘 다른 문화와 문명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과 새롭게 유리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받아들여 자기들에게 맞게 고칠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이다.

3. 초기 형태 민주주의

독특하고 새롭고 별난 인간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호는 아테네에서 처음 나타났다. 기원전 594년경 솔론이라는 시인이 살라미스 섬을 점령해 도시에 승리를 안겨주고 상당한 권력과 명성을 얻게 되고, 솔론은 기존의 억압적인 정치 체제와 법률 체계를 개혁했다. 솔론이 제안한 헌법은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먼저 솔론은 통화의 가치를 평가절하 해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던 부채 위기를 바로 해소했다. 다음에는 그 전에 추방된 아테네 시민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노예가 된 시민들을 해방했다. 가장 큰 개혁은 정치권력을 다시 분배해 힘이 있는 집안에서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인구 전체에 발언권이 있는 체제로 모든 사회적 분쟁에 배심원단을 도입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일반 시민도 법률의 집행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 평민들에게 필요한 힘을 모두 주었다. 그렇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도 유지했다.”

여기서 새로운 두 정치 기구가 탄생하였다. 하나는 귀족을 대표하는 기구로, 아레오파고스 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불레라고 하는 두 번째 회의에는 아테네에서 오랫동안 산 주요 부족의 대표자 100명이 포함되었다. 구성원들은 저마다 임기가 1년이고, 제비뽑기를 통해 무작위로 선발되었다.

솔론이 죽고 200년 동안 이 초기 형태의 민주주의는 아테네가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도시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솔론이 새로운 형태의 시민 정부를 실험하고 있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편에서는 과학과 종교에서 곧 혁명이 일어날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4. 보편적 자연법칙

터키의 서해안에 있던 밀레토스는 교역과 부, 온갖 다양한 문화로 활기가 넘치는 고대 도시였다. 행성이 신이라고 믿던 시절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행성의 움직임과 연관시킨 것은 ‘점성술‘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탈레스는 일련의 천문표를 이용해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천문표는 원래 바빌론과 이집트의 성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그들의 신전과 지구라트에서 행성과 달의 움직임을 연구해 펴낸 것이었다. 그런 지식이 숫자와 수학에 밝은 탈레스 같은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자 행성의 움직임에 어떤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추론을 통해 일식 같은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을 설명해주는 일련의 보편적 법칙을 찾으며 보냈고, 수십년동안 아테네에 평화가 지속되면서 다른 철학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의 거지 철학자였다. 그는 고결한 생활방식은 사람을 옷이나 직업, 수입 따위로 판단하는 인간 사회 밖에서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디오게네스는 최초로 자신을 ‘세계의 시민‘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야생 동물 같은 다른 세계의 시민들이 먹을 수 있게 비바람에 노출시켜 달라고 했다. 디오게네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동방의 자이나교 승려들처럼 개인의 행복은 물질적 환경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믿었다.

5.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유명한 철학자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를 서양 현대 사상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한다. 탈레스처럼 그도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믿었고, 그것을 철학적 사색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통찰은 결국 큰 지혜와 개인적 깨달음을 낳을 것이었다. 

붓다처럼 소크라테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영혼이 개선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문제를 해결하는 이성을 쓰고 정렬적인 토론과 열띤 논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60년경에는 토론과 논쟁, 수사와 웅변술이 아테네 사회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주요 덕목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그런 것들이 철학을 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가 실제로 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가 그와 그의  사상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은 그의 제자 플라톤 덕분이다. 플라톤도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플라톤의 저작 가운데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극적이고 기이한 상황에서 죽임을 당했는지를 말해주는 것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런 죄목은 그의 사상을 이단으로 본 사람들이 날조한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기회가 있었지만 민주적인 법정에서 유죄로 판결했으니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판례에 따른 의례를 마친 뒤 독미나리에서 추출한 독을 마시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