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변화

기원전 1400년부터 1100년까지는 한때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웅장하고 영웅적인 전쟁으로 여겨졌던 트로이 전쟁의 무대이기도 했다.

1. 트로이 전쟁

트로이 전쟁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지휘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 세력과 트로이 사람들이 싸운 전쟁이다. 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 시점으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뒤에 쓰인 두 편의 서사시에 담겨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들이 개입해 자기들이 좋아하는 인간들의 일에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10년에 걸친 전쟁 끝에 결국 그리스 사람들이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

그리스 사람들이 트로이의 성벽 밖에 거대한 목마를 남겨놓자 호기심이 발동한 트로이 사람들은 안에 적의 정예부대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목마를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 거대한 구조물에서 병사들이 몰래 나와 성문을 열었고, 그리스 군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와 도시를 삼켜버린 것이다. 

2. 보물 사냥꾼

하인리히 슐리만은 독일인 보물 사냥꾼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때 한 재산 모은 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읽어준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사실에 토대를 둔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자신의 삶과 재산을 바쳤다.

그는 먼저 트로이라는 고대 도시가 있던 곳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역사가들은 트로이가 신화 속 도시라고 믿었다. 2년 동안 터기의 히사를리크에서 철저하게 발굴 작업을 한 끝에 그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했다고 세상에 알렸다

그가 발견한 보물 가운데는 금관과 팔찌, 굽 달린 잔, 목걸이, 귀고리 같은 금붙이들뿐만 아니라 은과 구리로 만든 꽃병과 청동 무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이 보물을 발견한 지층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있는 때보다 수백 년이나 전에 생긴 것으로 밝혀져, 이 유물이 정확히 얼마나 진짜인지가 여전히 논쟁거리다.

슐리만은 보물을 발견했을 때 터키 당국에 알리지 않고 보물을 몰래 가지고 나갔다. 결국 배신당한 터키 당국이 그의 발굴 허가를 취소하고 영원히 발굴을 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 덕분에 몇 년 뒤 그는 다시 히사클리크에서 발굴 허가를 받아냈다.

3. 전쟁의 흔적

1876년에는 슐리만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던 미케네라는 도시를 발굴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가 발견한 것이 진품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련의 왕릉 다섯 기를 발굴했고, 그 안에는 열아홉 사람의 유해가 들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황금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사람들 옆에는 칼과 단도, 흉갑이 묻혀 있었다.

그러나 슐리만의 희망과 달리 이 사람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기 500년 전쯤인 기원전 1600년경의 지층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케네 문명의 그리스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처음 통치자로서 자리를 잡은 때였다. 이들은 왕과 지배 계급이 화려한 장식전쟁 무기로 군사적 정복을 찬미한,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의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조금도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게 없다면 그것을 그냥 웅장한 이야기로 즐겨도 될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보다도 뛰어나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빠른 전개와 뚜렷한 생각, 명쾌한 문장 때문이다. 전해오는 말에는 호메로스가 맹인이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역사적 증거도 뚜렷하지 않다. 그이 이름이 호메리다이라는 고대 시인 사회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호메리다이는 인질로 잡혀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과거에 한 번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서사시적 이야기를 쓰는 일을 맡았던 죄수들이다.

4. 종교적 세계

호메로스의 시들이 청동기 시대 후기에 지중해에 닥쳤던 혼란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준다면, 그보다 훨씬 유명한 또 하나의 문헌은 바로 그 즈음에 이집트와 요르단.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호메로스의 시처럼 성경의 맨 앞에 있는 다섯 권의 책도 그 안에서 말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 때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에 문자로 쓰였다. 이 종교서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신성하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거기에 쓰여 있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신이 한 말이라고 믿는다.

이들 초기 책에서 가장 극적인 역사적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신이 모세를 통해 역병을 보내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은 이집트 파라오를 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때로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1939년에 쓴 <모세와 일신교>라는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설을 내놓았다. 그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유대인 탈출을 개성이 강한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의 치세와 연결시켰다. 아크나톤은 아름다운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신은 하나밖에 없다고 선언해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그에 따르면, 태양신유일한 신으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자신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집트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숭배한 다른 신들을 모두 믿지 못하게 했다. 파라오와 그의 아내는 태양이 떠오르는 나일 강 동쪽에 있는 아마르나에 새 수도를 세우고, 아톤을 어둡고 침침한 신전이 아니라 환하게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 숭배하라고 명령했다

5. 해상무역

이집트 사람들은 그런 믿음의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크나톤이 죽자 강력한 아몬의 사제들이 곧 원래 상태로 되돌리고 역사적 기록 가운데 이 혁명적 파라오에 관한 언급을 거의 모두 없앴다. 

프로이트는 이때 모세가 이집트에서 살았다고 믿고, 따라서 그의 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아크나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사회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는데 아크나톤의 개혁이 뒤집히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탈출은 기원전 1350년경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10년 전쟁이나 이집트로부터의 대탈출을 증언해주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지만, 오랫동안 구전되다 호메로스와 성경을 쓴 사람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된 그런 이야기들에는 분명히 역사가 들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연재해, 말과 바퀴, 금속무기의 결합으로 지중해와 유럽, 중동의 청동기 시대 세계를 괴롭혔던 긴장과 폭력, 잔인함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이런 안 좋은 상황에서도 페니키아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해상무역을 했다. 주변이 온통 소란했지만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기원전 800년까지 값비싼 자주색 물감을 만들어 파는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이들은 또 배를 만드는 삼나무도 거래해 이집트로 실어나르고,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도 만들고, 주석과 은, 구리를 메소포타미아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페니키아 사람들의 무역 전초 기지는 지중해 전역은 물론 북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시칠리아와 키프로스, 사르디니아, 카르타고에도 있고 에스파냐 남부에 있는 카디스에도 있었기에  본국이 침략자들에게 위협을 받아도 자신의 문화와 함께 그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6. 알파벳의 탄생

페니키아 사람들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원시적인 상징 문자를 훨씬 유연한 알파벳으로 바꾼 것이다. 알파벳은 제한된 수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이런 형태들이 저마다 입에서 나는 작은 소리를 나타냈다.

기원전 1200년경에 무역 거래 내역을 좀 더 쉽게 기록하려고 개발한 이런 문자 체계는 나중에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토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동과 인도 문자 체계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사실 오늘날 사용되는 언어 가운데 알파벳에 기반을 둔 언어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문자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말과 금속, 바퀴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의 고대 문명을 빠르게 탈바꿈시켰다. 이것들은 자연의 세계를 이용해 군사적,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인간의 탐욕에 불을 질렀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억압, 군사적 경쟁의 뿌리를 추적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바로 여기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