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초기 민주주의

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것을 배운 아주 경쟁력 있는 도시 국가들의 무리에서 어떻게 일련의 실험적 생활방식이 나타났을까?

1. 올리브 무역

수천 년 동안 올리브에서 짠 기름은 고대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천연 연료였다. 가정에서는 그것을 요리에서 등불까지 온갖 군데에 썼다. 올리브맛도 좋고 저장하기도 쉽고 영양가도 높아 고대 인간 세계의 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약 2500년 전에 올리브는 갓 태동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점차 중앙집권화된 중국의 비단과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다.

아테네와 테베, 스파르타, 코린트, 아르고스는 많은 독립된 작은 도시 국가들 가운데 일부였을 뿐이다. 이들 도시는 기원전 650년경부터 자연인간 문명 사이에서 아주 흥미로운 일련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 혁신적인 사회의 토대는 올리브 무역 위에 세워졌다. 마케도니아의 산기슭에서 지중해 동부에 있는 이들 섬까지 펼쳐진 메마르고 험준한 바위투성이 지형에서는 올리브 말고는 거의 자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통틀어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고대 그리스서양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데, 만일 이런 기적 같은 열매가 저절로 열리지 않았다면 고대 그리스는 아마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2. 교역을 통한 부의 생산

그리스 사람들은 곧 올리브를 삶에 필요한 다른 중요한 식량들과 교환할 줄 알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100개나 넘는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 전체에 교역망을 구축해, 올리브가 이집트의 곡물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 나는 철과 구리 같은 원료, 선박을 건조할 때 없어서는 안 될 레바논의 삼나무 목재와 거래되었다.

고대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뒤 다양한 물결의 유목민 부족들이 철로 만든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이주해와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정착했다. 기원전 600년경에는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올리브를 재배하는 방법을 습득해 잘 사는 방법을 발견했다.

생존을 완전히 교역에 의존하는 데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길러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실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먼저, 교역에 기반을 둔 경제로 이들 도시에서는 시장을 중심으로 부를 생산하는 시스템이 고도로 발달했다. 이들 도시의 시민들에게는 곡물이나 쌀, 노예 노동보다 주화대여금이 거래를 할 때 주로 쓰는 통화가 되었다.

이들은 또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는 것이 많이 있었다. 여가 시간이었다. 올리브는 1년 중 몇 개월을 교역으로 얻은 부를 새로운 도시를 짓는 데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이들의 생존이 교역에 달려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의 도시들이 늘 다른 문화와 문명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과 새롭게 유리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받아들여 자기들에게 맞게 고칠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이다.

3. 초기 형태 민주주의

독특하고 새롭고 별난 인간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호는 아테네에서 처음 나타났다. 기원전 594년경 솔론이라는 시인이 살라미스 섬을 점령해 도시에 승리를 안겨주고 상당한 권력과 명성을 얻게 되고, 솔론은 기존의 억압적인 정치 체제와 법률 체계를 개혁했다. 솔론이 제안한 헌법은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먼저 솔론은 통화의 가치를 평가절하 해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던 부채 위기를 바로 해소했다. 다음에는 그 전에 추방된 아테네 시민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노예가 된 시민들을 해방했다. 가장 큰 개혁은 정치권력을 다시 분배해 힘이 있는 집안에서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인구 전체에 발언권이 있는 체제로 모든 사회적 분쟁에 배심원단을 도입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일반 시민도 법률의 집행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 평민들에게 필요한 힘을 모두 주었다. 그렇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도 유지했다.”

여기서 새로운 두 정치 기구가 탄생하였다. 하나는 귀족을 대표하는 기구로, 아레오파고스 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불레라고 하는 두 번째 회의에는 아테네에서 오랫동안 산 주요 부족의 대표자 100명이 포함되었다. 구성원들은 저마다 임기가 1년이고, 제비뽑기를 통해 무작위로 선발되었다.

솔론이 죽고 200년 동안 이 초기 형태의 민주주의는 아테네가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도시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솔론이 새로운 형태의 시민 정부를 실험하고 있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편에서는 과학과 종교에서 곧 혁명이 일어날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4. 보편적 자연법칙

터키의 서해안에 있던 밀레토스는 교역과 부, 온갖 다양한 문화로 활기가 넘치는 고대 도시였다. 행성이 신이라고 믿던 시절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행성의 움직임과 연관시킨 것은 ‘점성술‘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탈레스는 일련의 천문표를 이용해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천문표는 원래 바빌론과 이집트의 성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그들의 신전과 지구라트에서 행성과 달의 움직임을 연구해 펴낸 것이었다. 그런 지식이 숫자와 수학에 밝은 탈레스 같은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자 행성의 움직임에 어떤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추론을 통해 일식 같은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을 설명해주는 일련의 보편적 법칙을 찾으며 보냈고, 수십년동안 아테네에 평화가 지속되면서 다른 철학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의 거지 철학자였다. 그는 고결한 생활방식은 사람을 옷이나 직업, 수입 따위로 판단하는 인간 사회 밖에서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디오게네스는 최초로 자신을 ‘세계의 시민‘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야생 동물 같은 다른 세계의 시민들이 먹을 수 있게 비바람에 노출시켜 달라고 했다. 디오게네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동방의 자이나교 승려들처럼 개인의 행복은 물질적 환경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믿었다.

5.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유명한 철학자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를 서양 현대 사상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한다. 탈레스처럼 그도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믿었고, 그것을 철학적 사색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통찰은 결국 큰 지혜와 개인적 깨달음을 낳을 것이었다. 

붓다처럼 소크라테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영혼이 개선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문제를 해결하는 이성을 쓰고 정렬적인 토론과 열띤 논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60년경에는 토론과 논쟁, 수사와 웅변술이 아테네 사회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주요 덕목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그런 것들이 철학을 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가 실제로 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가 그와 그의  사상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은 그의 제자 플라톤 덕분이다. 플라톤도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플라톤의 저작 가운데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극적이고 기이한 상황에서 죽임을 당했는지를 말해주는 것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런 죄목은 그의 사상을 이단으로 본 사람들이 날조한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기회가 있었지만 민주적인 법정에서 유죄로 판결했으니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판례에 따른 의례를 마친 뒤 독미나리에서 추출한 독을 마시고 죽었다.

어머니 여신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자연의 순환을 숭상하는 것이 어떻게 생식력과 여성성, 평등에 헌신한 어떤 인간 문명들의 대표적 특징이 되었을까?

1. 잃어버린 문명

1827년 찰스 매슨이라는 영국 스파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이 있는 인도의 아그라 군사기지를 떠나 동료 군인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심부름을 하러 서쪽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금은 파키스탄 동북부에 있는 하라파라는 곳에서 우연히 폐허가 된 고대 도시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언덕위에 성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서 보석과 팔찌, 발찌도 발견하고, 고대 마차 세 대의 잔해도 발견했다. 그러나 지역 사람들이 경고한대로 쏘는 각다귀 떼의 공격을 받는 바람에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폐허가 된 도시를 그렸다. 그는 자신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전문적 발굴이 이루어져 수천 년 동안 진흙과 모래, 먼지 밑에 숨어 있던 이 잃어버린 문명의 전모가 드러났다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은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하라파가 지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이 드러났다. 그후로도 유적지가 2500곳 넘게 발굴되었는데, 이 정착지들은 고대 이집트와 수메르에 처음 세워진 도시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들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졌다.

2. 인더스 문명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메르가르라는 고대 정착지에서 왔다. 메르가르는 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 시비라고 하는 작은 도시 근방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는 것을 처음 보여주는 것들, 예를 들면, 밀과 보리 같은 농작물의 자취와 가축으로 기른 소와 염소, 양의 뼈는 기원전 7000년경의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진흙으로 간단하게 지은 건물에서 살았고, 이집트 사람들처럼 묘소에 현대 역사가들이 그들의 생활방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수백 개의 작고 단순한 여성상이다. 이것들은 대개 석간주 물감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가지 유형의 머리 모양과 장식을 보여준다.

기원전 2600년경부터 기후가 변하면서 땅이 메말라 이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동해 훨씬 비옥한 인더스 강 유역으로 갔다. 물론 물건을 만드는 기술과 지식도 함께 갔고, 기원전 두 번째 천 년이 끝났을 즈음에는 인디스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아주 멋진 도시를 다수 건설했다. 이들 도시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 생활이 연상되는 것듯이 많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시들이 되었다.

이 사람들은 도시 설계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거리가 현대 미국 도시처엄 정확히 잰 바둑판무늬 모양으로 편리하게 설계되었고, 거리마다 어떤 사람들 의견으로는 오늘날 파키스탄과 인도의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앞선 하수시설과 배수시설이 있었다. 발굴결과 일련의 큰 공공건물도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집회장과 시민들이 5천 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만남의 장소도 있었다.

공공 창고와 곡물 창고, 목욕탕은 주랑이 있는 마당에 둘러싸여 있었다. 인더스 문을 건설한 사람들은 아마 세계 최초임에 틀림없는 인공 공공 수영장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물이 새는 것을 막으려고 일종의 천연 타르도 썼던 것이 확인되었다. 어떤 집 밑에서는 온돌식 난방시설로 보이는 것도 발견되었다. 유명한 로마의 온돌식 난방시설은 그로부터 2천 년도 더 뒤에 나왔다.

3. 문명의 발달

집집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었고, 폐수는 큰길을 따라 설치된 덮개 있는 배수로로 흘러나갔다. 어떤 집들은 안마당이나 골목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이곳에는 금속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하라파에서만 구리 녹이는 노가 적어도 16개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나 수메르와 달리 이곳에서는 왕릉을 찾아볼 수 없다. 부유한 지배 계습의 특징인 지구라트와 피라미드, 신전, 큰 궁전도 없다. 인더스 문명이 흥미로운 것은 잘 조직된 효율적이 사회였지만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적 생활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를 공유하고 비교적 평등하게 산 것 같다.

인더스 문명은 교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나는 구리와 주석 같은 원료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로탈이라는 도시에는 배가 잘 드나들도록 준설을 하고 운하를 건설해 배가 들어와 물건을 싣고 내릴 수 있게 되어 있는 거대한 부두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교역에도 전문 지식이 있고 건축가와 장인으로서도 능수능란해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측정하고 무게를 정확하게 재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이들은 십진법을 따랐고, 이들이 건물을 지을 때 쓰는 벽돌은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또 수평선 전체를 잴 수 있는 도구도 발명해, 조수와 파도, 해류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발견된 것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독보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벌거벗은 소녀가 춤추는 자세를 하고 있는 청동 상이다. 이것은 모헨조다로라는 도시의 유적지에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뉴델리에 있는 인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주조되었고 키가 11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이것이 독특한 것은 ‘매몰주조법‘이라는 기법으로 주조되었다.

먼저 밀랍으로 소녀의 상을 만든 다음 점토를 입혀서 거푸집을 만들었다. 이것에 열을 가해 안에 있는 밀랍이 녹아 흘러나오면 빈 공간에 청동을 녹여서 부었고, 이것이 식어 점토 거푸집을 떼어내면 안에 있는 청동상이 드러났다. 이런 발달된 청동 주조법을 유럽에서는 그로부터 3500년 이상 지난 서기 1100년경에야 비로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다.

4. 여신 숭배

더 놀라운 것은 이 춤추는 소녀 상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한 솜씨와 발달된 기술만이 아니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이 세계에서는 거리의 하수시설과 주택의 중앙난방 장치에서부터 멋진 부두와 정교한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시대를 앞서 갔던 것 같다.

또한 이 세계에서는 장인과 여성이 농부와 상인뿐만 아니라 사제와도 동등했다. 이들은 모두 어머니 여신으로 알려진 것을 숭배한 듯하며, 이는 이 춤추는 소녀 상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 상이 이 지역에 있는 유적지 전체에서 발견되는 것을 설명해준다.

기원전 4000년경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기원전 1600년경까지, 유럽과 근동의 많은 지역에서도 이들과 비슷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많다.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묘는 대개 흙을 높이 쌓아올린 공동 무덤에 남녀 구별 없이 함께 묻혀 있었다. 

서유럽에서 알려진 것만 이런 고분이 1만 기가 넘는데, 우리는 이것을 ‘거석 기념물‘이라고 한다. 대개 이런 무덤 근처에서 지역의 큰 돌 덩어리로 만든 거대한 구조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물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에 있는 것들처럼 둥글게 원형으로 세워진 것들이 많지만 신전으로 세워져 한쪽 끝이나 중앙에 제단이 있는 것들도 있다. 

아일랜드의 미스 카운티에서 최근에 복원된 뉴그레인지 신전과 묘실은 피라미드보다 500년 일찍 세워졌고, 한 사람이 지었으면 6천 년이 걸렸을 거라고 한다. 또한 지붕이 5천 년이 넘도록 비 한방을 새지 않아, 이것을 지은 사람들의 솜씨를 증언해준다.

5. 고대 신석기

이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며,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1958년에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발견된 고대 신석기 유적지다. 기원전 6000년경에 이곳은 떠들썩한 교역 도시였고, 처음 농경 사회가 나타난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아주 가까웠다. 흑요석의 교역은 이 인상적인 도시가 크고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유럽 전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맹금류나 다른 동물이 먹을 수 있도록 시체를 밖에 내놓았다. 이것은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 과정에 속하는 일이었다. 살이 다 제거되고 나면 사람들은 장례식을 통해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에 깊은 경외심을 표현했고, 뼈는 새 생명의 씨앗이었다.

이 사람들은 새로운 농경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주변의 자연환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3000년경까지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나무가 베어져 농경지가 되었다. 그래야 정착해서 작은 마을과 도시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는 주민이 500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들에게도 독특한 형태의 문자 상징체계가 있었는데 소용돌이 꼴과 나선형 무늬에 덮여 있는 것들이 유럽 전역 100곳이 넘는 거석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페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달리 지금까지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들은 신전과 묘지,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여성상 같은 종교적인 것에서 발견되었다.

6. 어머니 여신

여성들은 사회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감독했다. 크레타 섬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산토리니 섬에 있는 테라 궁전의 프레스코화에는 여성들이 발코니에 서서 젊은 남성들이 제물로 바칠 동물을 끌고 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에서는 사제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다.

미노아 문명의 법에서 여성은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어머니의 남자 형제가 어머니의 자식을 기를 책임이 있는 것도 전통이었다. 이 같은 관습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낯설어 보이지만,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에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인더스 문명과 신석기 시대 초기의 유럽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어머니 여신을 숭배했다. 기원전 3000년에 만들어진 벌거벗은 임신한 여성 상은 크레타 섬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섬에서도 모두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신성한 동굴이 300개 넘게 발견되었는데, 많은 동굴이 여신을 숭배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들 초기 문명이 남긴 증거들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뚜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고대 인디스 강 유역에서부터 아나톨리아의 산들을 가로질러 지중해의 섬들과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오크니 제도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진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은 신전과 묘지를 통해 평화를 사랑하고 어머니 자연을 숭배했던 생활양식을 증언하는 일련의 비슷한 정신을 가진 문명들이다.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믿음은 뱀과 독수리, 임산부, 달과 같은 온갖 형상의 어머니 여신에 대한 숭배로 나타났다. 뛰어난 공예술과 기술,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은 자연의 평등 정신과 더불어 이들이 남긴 유산의 일부다.

문명의 발전

나투프 사람들이 식물과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뒤에 큰 강 유역에서 거대한 인류 문명이 나타났다. 바빌론의 태양신 샤마시가 함무라비 왕에게 법을 구술한다. 282개의 법조문으로 이루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론 시내 중심에 세운 2.25미터의 석판에 새겨져 있어 누구나 볼 수 있었다.

1. 기록의 시작

니네베 유적지에서 발굴된 가장 유명한 점토판은 길가메시라는 수메르의 초기 왕의 모험을 이야기해주는 점토판일 것이다. 길가메시는 수메르에 생긴 최초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우루크라는 도시를 다스렸는데, 우루크는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서 유프라테스 강 동안에 있었다.

우루크는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는 8만 명에 이르러,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길가메시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려고 일련의 성벽을 두껍고 높게 쌓아올렸다. 최근에 독일 고고학자 팀이 발굴한 것을 보면 우루크에 살던 사람들은 성벽 안에 복잡하게 연결된 운하도 팠다. 우루크는 고대의 베네치아 같았고, 신에게 바친 일련의 신전이 있었다.

길가메시는 우루크의 다섯 번째 왕이었고, 기원전 2650년경에 다스렸다.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 사람 모두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로 일련의 신화와 전설은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행동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러나 처음에는 좋은 왕이 아니어서 신들이 온 몸에 털이 덮인 야수 같은 엔키두라는 사람을 만들어 길가메시와 싸우게 했지만, 사람들이 야생 동물을 길들일 줄 알게 되었듯이 길가메시도 엔키두를 길들일 수 있었고, 두 사람은 곧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많은 모험을 했다. 

엔키두가 죽자 길가메시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영원히 살고 싶지만 자신도 결국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야기가 끝날 때는 길가메시가 인상적인 성벽과 멋진 신전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전설의 일부는 이후 문명에서 발견되는 이야기들에도 나와, 언어와 문자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야기도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 글을 쓰는 기술이 생기자 기록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2. 종교의 시작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이야기들은 수메르 사람들의 세계관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그것들은 종교적 믿음이 존재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주는 문자로 된 증거를 제공한다.

길가메시는 인간은 모두 신의 종일 뿐임을 깨닫는다. 신은 사람들에게 왜 홍수와 가뭄, 침입 같은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모든 인간 문명의 공통된 특징은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거나 자신의 힘을 증강시키기 위해 자연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도시에 신전을 지어 신전마다 각각 다른 신에게 바침으로써 그러려고 했다. 신들이 사랑에서부터 전쟁과 풍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신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표시하려고 포도주나 기름 항아리 두껑에 점토로 봉인한 것에서도 고대 수메르인의 종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봉인이 신비한 힘이 있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고 믿었고, 그것을 신의 그림으로 장식해 신의 보호까지 받으려고 했다.

수메르 사람들은 해마다 새해 첫날에 신들이 만나 그 해에 어떤 운명적인 일들이 일어날지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결정은 가뭄과 홍수 같은 온갖 형태의 재앙도 가져왔지만 풍작과 군사적 승리 같은 예기치 못한 행운도 가져다 주었다.

3. 문명화의 시작

수메르 사람들은 하늘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지구라트라는 탑을 세웠다. 지구라트는 햇볕에 구운 점토 벽돌로 지은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탑 꼭대기는 모두 평평했고, 여기에 수메르 사람들은 사원이나 신전을 지어 신에게 바쳤다. 지구라트는 신이 사는 곳이라고 믿어 그 안에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32개가량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이 이라크에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있었고, 마르두크라는 신에게 바친 것이었는데,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도 원래 여기서 착안되었을지도 모른다.

수메르 사람들은 놀라운 수학자들이기도 했다. 레이어드가 발견한 점토판 중에는 이들이 복합한 산술을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으며, 이들은 수직으로 내려 그은 선과 V자 형태를 여러 가지로 조합해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나타냈다.

수메르 사람들은 60을 기반으로 한 수학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60을 나누는 방식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오늘날의 숫자처럼 왼쪽에 있는 숫자가 그 다음에 오는 숫자보다 높은 값을 갖는 ‘진정한 자릿수’ 체계도 사용했다.

이들은 수학과 천문학에서도 천재적이었지만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솜씨도 아주 뛰어났다. 학자들은 이들이 바퀴를 발명했다고 믿는다. 얼마 뒤 수레와 마차도 발명되었지만, 이들이 발명한 바퀴는 수레나 마차에 쓰는 바퀴가 아니라 항아리를 만들 때 쓰는 돌림판이었다. 

그러나 바퀴가 물건을 실어 나르는 장치로 개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만들어진 수레를 끄는 데는 나귀가 쓰였고, 나중에 통 바퀴가 바퀴살이 있는 바퀴로 대체되었다. 이 바퀴는 훨씬 많은 무게를 실어 나를 수 있어, 마차를 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4. 교역의 시작

그러나 이때는 도로가 거의 없어 수레로 여행하는 것이 배로 가는 것만큼 편리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들의 정착지를 바다와 이어주는 강을 이용했다. 수메르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가지 유형의 배를 설계했다. 

어떤 배들은 동물 가죽과 갈대로 만들었고, 어떤 배들은 털을 꼬아서 이어붙이고 역청을 발라 방수를 하고 나무로 노를 만들어 저었다. 배는 먼 곳에서 이들처럼 정착하기 시작해 도시와 문명을 이룬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교역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바퀴에서 문자까지 수메르 사람들의 과학기술은 머지않아 배로 갈 수 있는 세계 전체로 퍼졌다.

수메르의 장인들은 금과 은, 구리 같은 부드러운 금속으로 귀중한 물건을 만들었다. 1930년대에 영국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우르의 왕실 공동묘지에서 1800기가 넘는 무덤을 발굴했다. 한 무덤에서는 어떤 고대의 보물보다도 화려하고 값비싼 보물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르의 여왕 푸아비의 무덤으로, 기원전 2500년경의 것이었다. 무덤에는 여왕과 함께 병사 다섯 명과 시녀 스물세 명이 묻혀 있었다. 이들은 내세에서도 계속 여왕의 시중을 들도록 독살당한 사람들이었다. 

울리는 이들과 함께 정말 아름답고 멋진 보물더미를 발견했는데, 금박으로 만든 머리 장식과 금에 덮인 수염 달린 황소 머리가 있는 화려한 리라, 금으로 만든 식기류, 은으로 만든 사자 머리로 장식된 마차, 많은 금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이었다. 

5. 함무라비 법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생긴 우루크와 우르 같은 수메르의 도시들은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했다. 누가 죽은 사람의 땅과 재산을 물려받아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사냥과 채집을 하는 사회에는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고, 아무도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짓고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관개 용수로를 팠다. 따라서, 누가 죽은 사람의 땅과 재산을 물려받아야 하는지가 아주 큰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분쟁은 가족간의 싸움이나 집단간 싸움으로 비화했고, 그것이 치열해지면 도시와 도시의 전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문자의 발명으로 강력한 통치자는 문서로 된 일련의 칙령과 법령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었고, 그것을 처벌의 위협으로 뒷받침했다. 문자가 발명된 덕분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폭력을 쓰지 않고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바빌론은 기원전 1900년경에 득세하기 시작했다. 함무라비는 기원전 1810년부터 1750년까지 살았고, 그가 제정한 법이 바빌론을 탈바꿈시키고 안정시킨 덕분에 바빌론은 메소코타미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가 되었다. 함무라비는 자신이 만든 법을 돌에 새겨 바꿀 수 없도록 했다.

함무라비의 법은 다른 문명에서도 모방해, 오늘 날에도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정의의 토대가 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6. 문명의 확장

만일 아무도 법조문의 읽지 못한다면 법은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법에 의한 통치를 하려면 교육에 더욱 힘써야 했다. 도시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우도록 했다. 

모든 인간 문명처럼 아주 기발하고 독창적이었던 수메르 사람들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의 쇠퇴와 몰락을 가져온 것은 전쟁과 침입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붙박고 살다가 수대에 걸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농사를 짓자 기름졌던 땅이 갈수록 황폐해졌다. 

그들의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였다. 막강한 아시리아 왕 사르곤 대제는 아카드를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제국 가운데 하나를 세웠다. 유프라테스 강 어귀에서 수백 마일 상류에 자리 잡은 아카드는 아직 땅이 비옥하고 기름졌다. 수메르 남부에 있는 도시들이 쇠락해 사르곤에게 정복당하면서 사르곤의 영토는 더 거대해졌다. 

고대 중동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빙하기가 끝나고 오랫동안 습한 날씨가 계속되었던 시기가 끝나 그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 땅이 메말라갔고 우리가 아는 사막으로 변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수메르의 도시들이 거의 모두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문자 체계를 발전시킨 수메르 문명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록된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지식을 이부분에서 저 부분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착오 없이 전할 수 있었다. 문자는 인간이 처음 인위적 세계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데 이바지한 가장 강력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