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변화

기원전 1400년부터 1100년까지는 한때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웅장하고 영웅적인 전쟁으로 여겨졌던 트로이 전쟁의 무대이기도 했다.

1. 트로이 전쟁

트로이 전쟁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지휘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 세력과 트로이 사람들이 싸운 전쟁이다. 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 시점으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뒤에 쓰인 두 편의 서사시에 담겨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들이 개입해 자기들이 좋아하는 인간들의 일에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10년에 걸친 전쟁 끝에 결국 그리스 사람들이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

그리스 사람들이 트로이의 성벽 밖에 거대한 목마를 남겨놓자 호기심이 발동한 트로이 사람들은 안에 적의 정예부대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목마를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 거대한 구조물에서 병사들이 몰래 나와 성문을 열었고, 그리스 군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와 도시를 삼켜버린 것이다. 

2. 보물 사냥꾼

하인리히 슐리만은 독일인 보물 사냥꾼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때 한 재산 모은 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읽어준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사실에 토대를 둔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자신의 삶과 재산을 바쳤다.

그는 먼저 트로이라는 고대 도시가 있던 곳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역사가들은 트로이가 신화 속 도시라고 믿었다. 2년 동안 터기의 히사를리크에서 철저하게 발굴 작업을 한 끝에 그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했다고 세상에 알렸다

그가 발견한 보물 가운데는 금관과 팔찌, 굽 달린 잔, 목걸이, 귀고리 같은 금붙이들뿐만 아니라 은과 구리로 만든 꽃병과 청동 무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이 보물을 발견한 지층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있는 때보다 수백 년이나 전에 생긴 것으로 밝혀져, 이 유물이 정확히 얼마나 진짜인지가 여전히 논쟁거리다.

슐리만은 보물을 발견했을 때 터키 당국에 알리지 않고 보물을 몰래 가지고 나갔다. 결국 배신당한 터키 당국이 그의 발굴 허가를 취소하고 영원히 발굴을 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 덕분에 몇 년 뒤 그는 다시 히사클리크에서 발굴 허가를 받아냈다.

3. 전쟁의 흔적

1876년에는 슐리만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던 미케네라는 도시를 발굴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가 발견한 것이 진품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련의 왕릉 다섯 기를 발굴했고, 그 안에는 열아홉 사람의 유해가 들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황금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사람들 옆에는 칼과 단도, 흉갑이 묻혀 있었다.

그러나 슐리만의 희망과 달리 이 사람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기 500년 전쯤인 기원전 1600년경의 지층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케네 문명의 그리스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처음 통치자로서 자리를 잡은 때였다. 이들은 왕과 지배 계급이 화려한 장식전쟁 무기로 군사적 정복을 찬미한,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의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조금도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게 없다면 그것을 그냥 웅장한 이야기로 즐겨도 될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보다도 뛰어나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빠른 전개와 뚜렷한 생각, 명쾌한 문장 때문이다. 전해오는 말에는 호메로스가 맹인이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역사적 증거도 뚜렷하지 않다. 그이 이름이 호메리다이라는 고대 시인 사회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호메리다이는 인질로 잡혀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과거에 한 번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서사시적 이야기를 쓰는 일을 맡았던 죄수들이다.

4. 종교적 세계

호메로스의 시들이 청동기 시대 후기에 지중해에 닥쳤던 혼란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준다면, 그보다 훨씬 유명한 또 하나의 문헌은 바로 그 즈음에 이집트와 요르단.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호메로스의 시처럼 성경의 맨 앞에 있는 다섯 권의 책도 그 안에서 말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 때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에 문자로 쓰였다. 이 종교서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신성하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거기에 쓰여 있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신이 한 말이라고 믿는다.

이들 초기 책에서 가장 극적인 역사적 사건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신이 모세를 통해 역병을 보내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은 이집트 파라오를 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때로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1939년에 쓴 <모세와 일신교>라는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설을 내놓았다. 그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유대인 탈출을 개성이 강한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의 치세와 연결시켰다. 아크나톤은 아름다운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신은 하나밖에 없다고 선언해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그에 따르면, 태양신유일한 신으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자신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집트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숭배한 다른 신들을 모두 믿지 못하게 했다. 파라오와 그의 아내는 태양이 떠오르는 나일 강 동쪽에 있는 아마르나에 새 수도를 세우고, 아톤을 어둡고 침침한 신전이 아니라 환하게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 숭배하라고 명령했다

5. 해상무역

이집트 사람들은 그런 믿음의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크나톤이 죽자 강력한 아몬의 사제들이 곧 원래 상태로 되돌리고 역사적 기록 가운데 이 혁명적 파라오에 관한 언급을 거의 모두 없앴다. 

프로이트는 이때 모세가 이집트에서 살았다고 믿고, 따라서 그의 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아크나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사회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는데 아크나톤의 개혁이 뒤집히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탈출은 기원전 1350년경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10년 전쟁이나 이집트로부터의 대탈출을 증언해주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지만, 오랫동안 구전되다 호메로스와 성경을 쓴 사람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된 그런 이야기들에는 분명히 역사가 들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연재해, 말과 바퀴, 금속무기의 결합으로 지중해와 유럽, 중동의 청동기 시대 세계를 괴롭혔던 긴장과 폭력, 잔인함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이런 안 좋은 상황에서도 페니키아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해상무역을 했다. 주변이 온통 소란했지만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기원전 800년까지 값비싼 자주색 물감을 만들어 파는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이들은 또 배를 만드는 삼나무도 거래해 이집트로 실어나르고,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도 만들고, 주석과 은, 구리를 메소포타미아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페니키아 사람들의 무역 전초 기지는 지중해 전역은 물론 북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시칠리아와 키프로스, 사르디니아, 카르타고에도 있고 에스파냐 남부에 있는 카디스에도 있었기에  본국이 침략자들에게 위협을 받아도 자신의 문화와 함께 그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6. 알파벳의 탄생

페니키아 사람들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원시적인 상징 문자를 훨씬 유연한 알파벳으로 바꾼 것이다. 알파벳은 제한된 수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이런 형태들이 저마다 입에서 나는 작은 소리를 나타냈다.

기원전 1200년경에 무역 거래 내역을 좀 더 쉽게 기록하려고 개발한 이런 문자 체계는 나중에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토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동과 인도 문자 체계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사실 오늘날 사용되는 언어 가운데 알파벳에 기반을 둔 언어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문자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말과 금속, 바퀴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의 고대 문명을 빠르게 탈바꿈시켰다. 이것들은 자연의 세계를 이용해 군사적,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인간의 탐욕에 불을 질렀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억압, 군사적 경쟁의 뿌리를 추적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바로 여기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문명을 뒤바꾼 세 가지

때로는 지구의 자연 체계가 게임할 때 카드 뒤섞듯이 인간 집단들을 뒤섞었고, 때로는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동물이나 농작물, 숲을 이용해 집과 농장, 논밭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만들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때만 이해가 된다.

1. 혼돈의 시대

기원전 두 번째 천 년이 시작될 즈음부터, 그러니까 약 4천 년 전부터 새로운 문명의 영향권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대부분 아주 긴장되고 폭력적이며 공격적인 삶으로 변했다. 때로는 그 원인이 자연적인 것이라 피할 수 없었다. 

2억5200만년 전에 페름기의 대멸종을 초래한 것으로 생각되는 초대형 화산 폭발 같은 지구적 재앙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그러나 기원전 1627년경에 지중해 한복판에서 일어난 폭발 지수 7의 화산 폭발 같은 지역적 재난은 훨씬 자주 일어난다. 이런 화산 폭발은 근방에 사는 여러 초기 인류 문명의 기본 구조를 완전히 파괴했다.

중요한 것은 화산 폭발의 규모만이 아니었다. 화산 폭발이 일어난 위치도 중요했다. 지중해 주변에 세계에서 가장 일찍 형성된 인간 문명의 일부가 모여 있어, 그런 큰 폭발의 영향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높이가 150킬로키터는 되었을 일련의 거대한 쓰나미가 바다를 가르며 돌진해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사람들이 이룬 교역의 제국을 강타했을 것이다.

이푸웨르 파피루스라고 하는 고대의 두루마리는 이즈음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는 이 시대에 이집트에 들이닥친 혼돈의 시대가 운문으로 그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엄청난 화산 폭발의 여파로 이 나라가 ‘도자기 만들 때 쓰는 돌림판처럼’ 어지러운 혼돈의 늪에 빠져, 도시가 파괴되고 정부가 무너지고 주변의 모든 땅이 ‘텅 빈 불모지’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2. 유목민

테라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났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인더스 강 유역도 자연의 힘에 무릎을 꿇었다. 그 즈음 히말라야 산맥에서 일련의 큰 지진이 일어났고, 아마 그래서 진원지에서 가까운 인더스 강 유역의 수계에 교란이 일어나 물줄기가 더 동쪽으로, 오늘날 갠지스 강이 흐르는 쪽으로 발향을 바꾸었을 것이다.

자연의 선물인 자유롭게 흐르는 민물이 사라지자 이 발달된 문명은 바짝 말라버린 강바닥 말고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아주 멋진 춤추는 소녀 상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거의 그들이 한때 의지했던 물줄기 만큼이나 빠르게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문명이 느닷없이 질서를 파괴하는 자연의 변덕에 취약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일 강이나 인더스 강 같은 강 옆이나 미노아 사람들처럼 바다 옆에 정착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유목민의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이 사람들은 강 같이 고정된 물의 원천에 의존하지 않았고, 바다가 휩쓸어버릴 수도 있는 곳에 정착해 공동체를 이루어 살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늘 사냥에만 의존하지 않고 가축으로 길들인 소와 돼지, 양, 염소 같은 동물을 데리고 다니며 이것들로부터 안정적으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얻고 이것들을 운송 수단으로 썼다는 점이다. 이들 유목민은 교역자로서 고대 세계의 육로 운송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3. 청동제 무기

시간이 흐르자 이들의 떠도는 생활방식은 이들이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해,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의 흐름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변화는 이들이 말의 힘을 이용할 줄 알게 되어 훨씬 빨리 이동하고 훨씬 많은 짐을 실어 나를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석과 구리를 녹여 청동을 만들 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청동이 전쟁 무기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도 발견했다.

청동기 시대는 곳에 따라 시작된 시기가 다르다.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 기원전 4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장인들이 합금을 이용해 인더스 문명의 춤추는 소녀 상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청동으로 갑옷과 방패, 도끼와 칼, 창 같은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목민들은 구리와 주석 같은 귀한 원료를 서쪽과 남쪽으로, 중동으로, 인도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이 교역자들이 청동 무기를 만드는 전문가가 되자 교역로를 따라 형성된 공동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많은 정주민들을 침략해 정복하고 종속시키는 일이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한 일이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더불어 야생 동물을 정복해 유목민의 장거리 이동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필요도 있었다. 남자들은 야생 동물을 길들이는 일에 훨씬 잘 맞았다. 그런 힘쎈 동물을 길들이려면 무엇보다도 기운과 토지, 폭력이 필요했다. 유목민들은 이 무리지어 사는 야생말을 길들이고 사육하고 훈련시켜 인간의 노예로 만들었다.

영국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가 1920년대에 발견한 ‘우르의 깃발‘이라는 아름다운 채색 상자에 따르면, 마차는 기원전 2600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상자에는 ‘전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수메르 병사들이 창을 들고 말이나 소, 또는 황소로 보이는 것이 끄는 사륜 전차를 뒤따라간다.

4. 남성 지배적 사회

러시아 스텝 지역의 유목민 교역자들은 아마 최초로 길들인 말바퀴 달린 마차, 청동 무기를 두루 갖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 통 바퀴가 아닌 살이 있는 바퀴를 씀으로써 말이 끌 수 있는 짐의 무게도 늘릴 줄 알게 되어, 전차가 더욱 가벼워지고 싸울 때 기동성도 높아졌다.

여러 가지 증거는 이들이 말에 아주 많이 의존했음을 말해준다. 한 예로 스텝 지역에서는 기원전 4000년경에 묻힌 사람들의 무덤에서 뼈로 만든 재갈과 말의 유해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들의 생활방식은 말에 대한 통제와 금속 무기 제조에 기반을 둔 훨씬 공격적이고 남성 지배적인 사회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퍼뜨렸다.

유럽 전역에서 농사를 짓던 신석기 시대 초기 사람들의 무덤이 점차 비옥한 저지대에 있는 공동 무덤에서 요새화된 지역에 있는 개인 무덤으로 변했고, 이런 무덤에서는 한때 위풍당당했던 우두머리들의 유해가 아주 멋진 무기와 전차, 갑옷과 함께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속도와 높이, 화력 덕분에 길들인 말이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보다 군사적으로 엄청나게 유리해졌다. 말은 당시 알려진 어떤 것보다도 다섯 배 이상 빠른 운송 수단을 제공했다. 이제 말을 타는 사람들은 정찰과 빠른 의사소통, 기습을 할 수 있었고, 테러와 협박, 정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5. 전사 종족

기원전 2000년경부터 유목민의 문명뿐만 아니라 정주민의 문명도 군사화하기 시작했다. 히타이트와 후르리, 미케네 사람들의 제국이 모두 청동 무기와 기백이 넘치는 말, 무거운 짐을 실을 전차 위에 구축되었다. 이들은 아마 원래 흑해의 북쪽과 동쪽, 서쪽에 펼쳐진 스텝 지역에서 살았을 것이다.

기원전 1800년경에 나타난 히타이트 사람들은 터키 중앙에 있는 하루사에 수도를 세웠다. 이 전사 종족은 전쟁에서 말과 전차를 쓰는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이들의 수준 높은 야금술은 철을 채굴해 녹이는 방법을 발견해 더욱 다양하고 강력한 무기를 가질 수 있었다. 기원전 1400년에는 이들이 레바논과 시리아, 가나안은 물론 저 멀리 이집트와의 국경 지대까지 모두 정복했을 정도로 아주 막강해졌다.

말을 훈련시키는 기술은 대개 대대로 구전되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으로 알려진 훈련 교본은 기원전 1350년경의 것이다. 이것은 키쿨리라는 히타이트 말 조련사가 썼고 전차에 쓰는 말을 훈련시키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설명된 일련의 복잡한 훈련 방법 중에는 말의 지구력과 민첩성을 높이려고 인터빌 트레이닝을 이용하는 현대 조련 기법과 비슷한 것도 많았다.

후르리 사람들도 이웃인 히타이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야생말을 처음 길들인 북쪽에서 왔다. 오늘날의 현대 쿠르드인의 조상인 이 사람들은 기원전 두 번째 천 년 동안 중동의 많은 지역을 지배했다. 이들의 전사 사회는 신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낳았다.

이제는 농사를 관장하는 어머니 여신인 달의 여신과 풍요의 여신 대신 대신 남성 신인 테수프가 가장 강력한 신이 되었다. 테수프날씨를 관장했다. 그의 아내 헤파을 상징했다. 역사가들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많은 부분이 원래는 후르리 신들에서 왔고 제우스의 이야기도 테수프의 이야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을 거라고 믿는다.

6. 정복 사회

기원전 1180년경에는 히타이트 사람들과 후르리 사람들 모두 바닷사람들이라고 불렀던 다른 전사 부족 연맹체에게 침략을 당했고 결국 그들에게 정복되었다. 사실 바퀴와 말, 청동의 고약한 결합으로 기원전 1800년경부터 기원전 500년까지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중동은 혼란에 거듭 휩싸였다. 말을 타고 청동 무기와 철제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와 기회만 있으면 침략하고 정복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런 기회가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을 휩쓸었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 때문에 오기도 했다. 기원전 1600년경에는 역시 원래는 흑해 연안에 살았던 미케네 사람들이 그리스 남부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미케네에 멋진 수도를 세웠고, 미케네에서는 단검과 가면, 갑옷, 보석으로 장식된 무기가 들어 있는 벌집형 무덤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400년경에는 미케네 사람들이 크레타 섬에 이르러 폐허가 된 크노소스를 비롯해 미노아 문명의 버려진 도시들을 정복했다. 미케네 미술과 도자기에서는 미노아 문명의 영향이 많이 묻어나지만, 두 문화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두 문화의 벽화는 자연계에 대한 태도에서 그 차이를 드러낸다. 미노아 문명의 그림에서는 솟구치는 돌고래 같은 동물을 보고 즐거워하는 장면을 불 수 있지만, 미케네 문명의 예술작품에서는 동물이 갓 잡은 사냥감으로서만 찬미된다.

어머니 여신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자연의 순환을 숭상하는 것이 어떻게 생식력과 여성성, 평등에 헌신한 어떤 인간 문명들의 대표적 특징이 되었을까?

1. 잃어버린 문명

1827년 찰스 매슨이라는 영국 스파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이 있는 인도의 아그라 군사기지를 떠나 동료 군인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심부름을 하러 서쪽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금은 파키스탄 동북부에 있는 하라파라는 곳에서 우연히 폐허가 된 고대 도시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언덕위에 성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서 보석과 팔찌, 발찌도 발견하고, 고대 마차 세 대의 잔해도 발견했다. 그러나 지역 사람들이 경고한대로 쏘는 각다귀 떼의 공격을 받는 바람에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폐허가 된 도시를 그렸다. 그는 자신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전문적 발굴이 이루어져 수천 년 동안 진흙과 모래, 먼지 밑에 숨어 있던 이 잃어버린 문명의 전모가 드러났다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은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하라파가 지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이 드러났다. 그후로도 유적지가 2500곳 넘게 발굴되었는데, 이 정착지들은 고대 이집트와 수메르에 처음 세워진 도시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들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졌다.

2. 인더스 문명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메르가르라는 고대 정착지에서 왔다. 메르가르는 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 시비라고 하는 작은 도시 근방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는 것을 처음 보여주는 것들, 예를 들면, 밀과 보리 같은 농작물의 자취와 가축으로 기른 소와 염소, 양의 뼈는 기원전 7000년경의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진흙으로 간단하게 지은 건물에서 살았고, 이집트 사람들처럼 묘소에 현대 역사가들이 그들의 생활방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수백 개의 작고 단순한 여성상이다. 이것들은 대개 석간주 물감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가지 유형의 머리 모양과 장식을 보여준다.

기원전 2600년경부터 기후가 변하면서 땅이 메말라 이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동해 훨씬 비옥한 인더스 강 유역으로 갔다. 물론 물건을 만드는 기술과 지식도 함께 갔고, 기원전 두 번째 천 년이 끝났을 즈음에는 인디스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아주 멋진 도시를 다수 건설했다. 이들 도시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 생활이 연상되는 것듯이 많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시들이 되었다.

이 사람들은 도시 설계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거리가 현대 미국 도시처엄 정확히 잰 바둑판무늬 모양으로 편리하게 설계되었고, 거리마다 어떤 사람들 의견으로는 오늘날 파키스탄과 인도의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앞선 하수시설과 배수시설이 있었다. 발굴결과 일련의 큰 공공건물도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집회장과 시민들이 5천 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만남의 장소도 있었다.

공공 창고와 곡물 창고, 목욕탕은 주랑이 있는 마당에 둘러싸여 있었다. 인더스 문을 건설한 사람들은 아마 세계 최초임에 틀림없는 인공 공공 수영장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물이 새는 것을 막으려고 일종의 천연 타르도 썼던 것이 확인되었다. 어떤 집 밑에서는 온돌식 난방시설로 보이는 것도 발견되었다. 유명한 로마의 온돌식 난방시설은 그로부터 2천 년도 더 뒤에 나왔다.

3. 문명의 발달

집집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었고, 폐수는 큰길을 따라 설치된 덮개 있는 배수로로 흘러나갔다. 어떤 집들은 안마당이나 골목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이곳에는 금속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하라파에서만 구리 녹이는 노가 적어도 16개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나 수메르와 달리 이곳에서는 왕릉을 찾아볼 수 없다. 부유한 지배 계습의 특징인 지구라트와 피라미드, 신전, 큰 궁전도 없다. 인더스 문명이 흥미로운 것은 잘 조직된 효율적이 사회였지만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적 생활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를 공유하고 비교적 평등하게 산 것 같다.

인더스 문명은 교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나는 구리와 주석 같은 원료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로탈이라는 도시에는 배가 잘 드나들도록 준설을 하고 운하를 건설해 배가 들어와 물건을 싣고 내릴 수 있게 되어 있는 거대한 부두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교역에도 전문 지식이 있고 건축가와 장인으로서도 능수능란해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측정하고 무게를 정확하게 재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이들은 십진법을 따랐고, 이들이 건물을 지을 때 쓰는 벽돌은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또 수평선 전체를 잴 수 있는 도구도 발명해, 조수와 파도, 해류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발견된 것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독보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벌거벗은 소녀가 춤추는 자세를 하고 있는 청동 상이다. 이것은 모헨조다로라는 도시의 유적지에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뉴델리에 있는 인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주조되었고 키가 11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이것이 독특한 것은 ‘매몰주조법‘이라는 기법으로 주조되었다.

먼저 밀랍으로 소녀의 상을 만든 다음 점토를 입혀서 거푸집을 만들었다. 이것에 열을 가해 안에 있는 밀랍이 녹아 흘러나오면 빈 공간에 청동을 녹여서 부었고, 이것이 식어 점토 거푸집을 떼어내면 안에 있는 청동상이 드러났다. 이런 발달된 청동 주조법을 유럽에서는 그로부터 3500년 이상 지난 서기 1100년경에야 비로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다.

4. 여신 숭배

더 놀라운 것은 이 춤추는 소녀 상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한 솜씨와 발달된 기술만이 아니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이 세계에서는 거리의 하수시설과 주택의 중앙난방 장치에서부터 멋진 부두와 정교한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시대를 앞서 갔던 것 같다.

또한 이 세계에서는 장인과 여성이 농부와 상인뿐만 아니라 사제와도 동등했다. 이들은 모두 어머니 여신으로 알려진 것을 숭배한 듯하며, 이는 이 춤추는 소녀 상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 상이 이 지역에 있는 유적지 전체에서 발견되는 것을 설명해준다.

기원전 4000년경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기원전 1600년경까지, 유럽과 근동의 많은 지역에서도 이들과 비슷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많다.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묘는 대개 흙을 높이 쌓아올린 공동 무덤에 남녀 구별 없이 함께 묻혀 있었다. 

서유럽에서 알려진 것만 이런 고분이 1만 기가 넘는데, 우리는 이것을 ‘거석 기념물‘이라고 한다. 대개 이런 무덤 근처에서 지역의 큰 돌 덩어리로 만든 거대한 구조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물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에 있는 것들처럼 둥글게 원형으로 세워진 것들이 많지만 신전으로 세워져 한쪽 끝이나 중앙에 제단이 있는 것들도 있다. 

아일랜드의 미스 카운티에서 최근에 복원된 뉴그레인지 신전과 묘실은 피라미드보다 500년 일찍 세워졌고, 한 사람이 지었으면 6천 년이 걸렸을 거라고 한다. 또한 지붕이 5천 년이 넘도록 비 한방을 새지 않아, 이것을 지은 사람들의 솜씨를 증언해준다.

5. 고대 신석기

이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며,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1958년에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발견된 고대 신석기 유적지다. 기원전 6000년경에 이곳은 떠들썩한 교역 도시였고, 처음 농경 사회가 나타난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아주 가까웠다. 흑요석의 교역은 이 인상적인 도시가 크고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유럽 전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맹금류나 다른 동물이 먹을 수 있도록 시체를 밖에 내놓았다. 이것은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 과정에 속하는 일이었다. 살이 다 제거되고 나면 사람들은 장례식을 통해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에 깊은 경외심을 표현했고, 뼈는 새 생명의 씨앗이었다.

이 사람들은 새로운 농경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주변의 자연환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3000년경까지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나무가 베어져 농경지가 되었다. 그래야 정착해서 작은 마을과 도시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는 주민이 500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들에게도 독특한 형태의 문자 상징체계가 있었는데 소용돌이 꼴과 나선형 무늬에 덮여 있는 것들이 유럽 전역 100곳이 넘는 거석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페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달리 지금까지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들은 신전과 묘지,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여성상 같은 종교적인 것에서 발견되었다.

6. 어머니 여신

여성들은 사회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감독했다. 크레타 섬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산토리니 섬에 있는 테라 궁전의 프레스코화에는 여성들이 발코니에 서서 젊은 남성들이 제물로 바칠 동물을 끌고 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에서는 사제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다.

미노아 문명의 법에서 여성은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어머니의 남자 형제가 어머니의 자식을 기를 책임이 있는 것도 전통이었다. 이 같은 관습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낯설어 보이지만,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에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인더스 문명과 신석기 시대 초기의 유럽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어머니 여신을 숭배했다. 기원전 3000년에 만들어진 벌거벗은 임신한 여성 상은 크레타 섬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섬에서도 모두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신성한 동굴이 300개 넘게 발견되었는데, 많은 동굴이 여신을 숭배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들 초기 문명이 남긴 증거들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뚜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고대 인디스 강 유역에서부터 아나톨리아의 산들을 가로질러 지중해의 섬들과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오크니 제도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진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은 신전과 묘지를 통해 평화를 사랑하고 어머니 자연을 숭배했던 생활양식을 증언하는 일련의 비슷한 정신을 가진 문명들이다.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믿음은 뱀과 독수리, 임산부, 달과 같은 온갖 형상의 어머니 여신에 대한 숭배로 나타났다. 뛰어난 공예술과 기술,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은 자연의 평등 정신과 더불어 이들이 남긴 유산의 일부다.

이집트 문명

어떻게 어떤 통치자들은 자연의 너그러움 덕분에 백성들의 눈에 살아 있는 신으로 여겨져 살아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더할 나위 없는 복종과 완벽한 헌신, 절대적 보호를 받게 되었을까?

1. 파라오 왕조

사냥하고 채집하며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샤먼은 땅과 하늘, 짐승과 숲의 정령들과 신들을 공경하고 숭배했지만. 이들이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한 흔적은 없다. 오히려 하늘의 양철 지붕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부터 홍수와 천둥, 번개, 햇빛, 달, 강, 숲, 전쟁의 무서운 위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신의 존재를 느낄 정도로 그들은 신을 두려워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상의 신이라고 믿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권력과 위엄이 부여되겠는가? 파라오는 우리가 지금 이집트라고 부르는 북아프리카 땅을 30왕도가 넘는 일련의 왕조를 통해 약 3천 년 동안 통치했다.

파라오는 전능했다. 파라오의 백성들은 파라오를 위해 궁전과 사원, 무덤의 형태도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건물들을 지었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피라미드는 기원전 2566년에 죽은 쿠푸라는 초기 파라오의 무덤으로 지은 것이다. 

현대 전문가들은 아직도어떻게 그렇게 거대한 돌덩어리를 그렇게 많이 깎아서 운반하고 끌어올렸는지, 어떻게 주변의 모든 자연적인 것에 맞서 평평한 모래사막에서 그렇게 높은 건물을 쌓아올렸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이런 지배력은 전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파라오의 비위를 잘 맞추면 파라오가 함께 데려살 수도 있어, 파라오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평화롭고 목가적인 곳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피조물보다도 특별하고 중요해 불멸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까?

약 6천 년 전부터 자연은 이런 큰 꿈을 가진 전능한 인간 통치자들에게 강과 어떤 극적인 기후 변화의 형태로 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강과 기후 변화는 아프리카의 북동쪽 끝을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하고 가장 보호받는 땅 가운데 하나로 탈바꿈시켰다. 길가메시가 등장하고 나일 강 유역에도 크고 작은 도시들이 생겨났고 ‘고왕국’이라고 부그는 시대의 파라오들은 이미 권력의 절정기에 있었다.

2. 문명의 시작

예전에는 이집트를 위대하게 만든 것 가운데 많은 것이 교역의 형태로 홍해를 가로질러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자와 날싸, 공예술, 과학기술은 물론 문자까지도 말이다. 

그렇지만 요즘은 역사가들이 그렇게 확신하지 못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문명을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바다 건너에서 빌려와 자기들에게 맞게 고치기만 했을까, 아니면 독자적으로 스스로 발전시켰을까? 교역과 교환은 파라오가 처음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집트 문명이 이전의 어떤 문명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서도록 한 것은 그들의 강과 주변 환경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강들과 달리 나일 강은 1년에 한 번씩 범람한다. 7월부터 9월까지 에티오피아 산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빗물에 강둑이 무너지면서 주변의 드넓은 땅이 물에 잠긴다. 그리고 범람한 물은 영양이 풍부한 신선한 흙과 퇴적물을 실어와 농작물을 기르기에 아주 좋은 토양을 만든다. 해마다 저절로 영양분이 공급되고 새로운 빗물이 흘러들어와 이곳은 소금에 중독될 위험이 없었다.

1만1천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난 뒤 북아프리카는 완만하게 경사진 초원에서 나무와 풀들이 점점이 자라는 푸른 신록의 땅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사냥과 채집을 하던 부족들이 나일 강 유역에 정착해 작은 마을과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사바나에서 풀을 뜯는 야생 소와 염소, 양을 길들일 줄 알게 되었고, 이것들은 많은 젖과 털, 가죽을 공급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과 보리, 포도, 아마 같은 것을 기르는 지식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들어왔고, 육로를 통해 나투프 사람들에게서도 유입되었다. 이 강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풍부하고 강력한 문명으로 성장하기에 딱 좋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3. 문명의 정착

이들에게는 유리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약 6천 년 전부터 나일 강 상류에 있는 땅이 메마르기 시작했다. 지구 축의 주기적 변화로 강우 패턴이 달라진 탓도 있었고, 사람들이 농작물을 재배하고 낙타 같은 동물을 떼로 몰고 다니면서 길러 자연적으로 수위가 낮아진 탓도 있었다. 약 4천 년 전 한때는 풍부하게 흐르는 강물에서 뒹구는 악어와 하마로 가득 찼던 곳이 건조한 땅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하라 사막이 되었다.

강우 패턴의 변화는 인간의 역사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잠식해 들어오는 사막이 이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사막이 거의 어떤 침략자도 뚫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이나 탑, 성, 정교한 군사시설이 필요 없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고대 이집트를 침략하려면 몇 백 마일이나 펼쳐진 불모의 사막을 가로질러 오거나 바다로 와야 했지만, 바닷길도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에 펼쳐진 갈대 많은 습지대가 천연 방패막이가 되어 역시 도전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런 천연 방벽 덕분에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비교적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 거의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들만의 생활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4. 통치의 시작

나일 강은 또 다른 선물도 가져왔다. 이 선물은 왜 여기서 그런 막강한 통치자들이 나와 스스로 신이라고 칭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일 강은 쌍방향 도로가 되어 이 나라를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대부분의 수계는 하류를 향해 내려가는 길로만 쓸 수 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은 흙길로 해서 배를 상류로 끌고 가거나 강물의 흐름에 맞서 노를 저어 가야 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은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 못지않게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각 판의 배열상 이집트에서는 유세풍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어 강이 흐르는 방향과 정반대다. 그래서 하류로 내력갈 때는 배가 그냥 떠 있기만 해도 되고 돌아갈 때는 돛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잘 보호되는 비옥한 땅과 항해하기 쉬운 쌍방향 수계보다 왕국을 통제하기에 좋은 것이 있을까? 지구상 어디에도 5천 년 전의 고대 이집트처럼 많은 천혜의 자연 요소가 인간 문명의 발전을 도운 곳은 없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기원전 3150년경에 메네스라는 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했다고 한다. 그는 3천 년 동안 지속된 파라오 통치 시대를 열었고, 그동안 이집트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변함이 없었다. 나일 강 유역이 통일된 뒤에 기원전 2200년경까지 약 800년 동안 지속된 초기 왕조 시대와 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은 전국을 42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마다 통치자를 둠으로써 전국을 금방 장악할 수 있었다. 

왕이 임명한 지역 통치자들은 사람들에게 돈이 아니라 식량으로 세금을 내도록 해 중앙에 있는 창고에 쌓아두고, 흉작이 왔을 때 사람들을 구제했다. 흉작이 왔을 때 유일하게 믿을 사람이 통치자밖에 없다면 통치자를 신처럼 숭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파라오는 이 모든 식량을 쌓아둘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거대한 곡물 창고를 짓도록 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파라오를 지상에서 사는 신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영혼이 편히 다음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5. 피라미드의 건축

파라오와 그의 가족 또는 친구가 죽으면 처음에는 피라미드의 형태로 아주 어마어마한 무덤을 지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오늘날의 카이로 남쪽에 있는 기자라는 곳에 있었다. 고왕국 시대에 피라미드가 100개 넘게 세워졌지만, 이 거대한 구조물이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파라오 쿠푸가 지은 것이다. 

이 피라미드는 짓는 데 23년이 걸렸고, 10만 명이 넘는 노예와 농부의 노동이 들어갔다. 이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는 원래 새하얀 석회암에 덮여 있고, 꼭대기에는 금이 씌워져 있었다. 이 기념비적인 거대한 건축물의 목적은 파라오의 몸을 넣어두는 영원한 구조물을 만들어 파라오가 내세에서 그의 몸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의 몸은 수세대에 걸쳐 습득한 미라 만드는 과정을 이용해 보존했고, 그 과정을 모두 마치는 데 일반적으로 70일이 걸렸다. 중요한 사람의 무덤에는 우샤브티라고 하는 한 팀의 하인들을 넣었다. 우샤브티는 나무로 조각하기도 하고 준보석에 해당하는 귀한 돌로 조각하기도 하는 인형이었다. 어떤 무덤에서는 인형이 400개나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영혼이 내세에서 농사짓는 것을 도우려고 낫과 괭이, 쟁기를 들고 있었다. 

<사자의 서>에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가장 신성한 믿음 가운데 많은 것이 담겼다. 이것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쓴 주문과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그런 주문과 이야기에는 보통 현세의 장면과 내세의 장면이 삽화로 그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주문을 무덤안에 넣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하 세계에서 만나는 위험한 일들을 무사히 통과해 행복한 사후 세계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우리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은 피라미드와 무덤의 방 벽에 새긴 글과 그림, 그리고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보존된 글과 그림 덕분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상형문자라는 문자를 이용해 새겼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벽에 새기고 파피루스에 쓴 것들이 아주 많이 살아남아, 지금 전 세계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6. 투당카멘 묘실

1922년 영국 고고학자가 우연히 투탕카멘이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의 묘실을 찾게 되었다. 투탕카멘은 겨우 열아홉 살 정도밖에 안 되었을 때 죽었는데, 이 어린 통치자가 사냥을 하다 다리가 부러진 뒤 괴저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우리의 이집트 문명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방에는 엄청나게 많은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라가 된 소년 왕의 머리에 묶여 있었다. 순금으로 만든 그의 장례용 가면이었다.

그런 부유하고 강력한 집권층이 있는 문명에는 그들을 위해 물건을 만들거나 봉사를 하고 전문적 조언을 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간계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탄생했다. 1904년에 이탈리아 고고학자 에르네스토 스키아파렐리는 테베 바로 서쪽에 있는 왕들의 계곡과 가까운 데이르 알-메디나에서 그런 장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그들의 집과 도구의 잔해들과 함께 통째로 발견했다.

같은 곳에서 고고학자들은 가장 유명한 이집트 왕비 가운데 하나인 테페르타리의 무덤도 발견했다. 네페르타라는 기원전 1300년부터 1250년까지 살았고, 파라오 람세스 대제와 결혼했다. 람세스 1세는 아내가 여덟 명이나 되었지만, 틀림없이 네페르타리를 총애했을 것이다.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왕비들의 계곡에서 발견된 무덤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네페르타리는 생전에 여신으로 지위가 격상되었을 정도로 왕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네페르타리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고대 이집트에는 절대왕권이 발달했지만 그것이 남녀 사이의 불평등한 권리에 토대를 둔 사회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성은 법 앞에서 남성과 평등했다. 왕권도 모계 쪽 상속자만 물려받을 수 있었고, 모계제로 불리는 이러한 원칙은 훗날 전 세계에서 많은 군주제를 세우는 초석이 되었다.

문명의 발전

나투프 사람들이 식물과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뒤에 큰 강 유역에서 거대한 인류 문명이 나타났다. 바빌론의 태양신 샤마시가 함무라비 왕에게 법을 구술한다. 282개의 법조문으로 이루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론 시내 중심에 세운 2.25미터의 석판에 새겨져 있어 누구나 볼 수 있었다.

1. 기록의 시작

니네베 유적지에서 발굴된 가장 유명한 점토판은 길가메시라는 수메르의 초기 왕의 모험을 이야기해주는 점토판일 것이다. 길가메시는 수메르에 생긴 최초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우루크라는 도시를 다스렸는데, 우루크는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서 유프라테스 강 동안에 있었다.

우루크는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는 8만 명에 이르러,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길가메시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려고 일련의 성벽을 두껍고 높게 쌓아올렸다. 최근에 독일 고고학자 팀이 발굴한 것을 보면 우루크에 살던 사람들은 성벽 안에 복잡하게 연결된 운하도 팠다. 우루크는 고대의 베네치아 같았고, 신에게 바친 일련의 신전이 있었다.

길가메시는 우루크의 다섯 번째 왕이었고, 기원전 2650년경에 다스렸다.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 사람 모두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로 일련의 신화와 전설은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행동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러나 처음에는 좋은 왕이 아니어서 신들이 온 몸에 털이 덮인 야수 같은 엔키두라는 사람을 만들어 길가메시와 싸우게 했지만, 사람들이 야생 동물을 길들일 줄 알게 되었듯이 길가메시도 엔키두를 길들일 수 있었고, 두 사람은 곧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많은 모험을 했다. 

엔키두가 죽자 길가메시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영원히 살고 싶지만 자신도 결국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야기가 끝날 때는 길가메시가 인상적인 성벽과 멋진 신전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전설의 일부는 이후 문명에서 발견되는 이야기들에도 나와, 언어와 문자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야기도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 글을 쓰는 기술이 생기자 기록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2. 종교의 시작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이야기들은 수메르 사람들의 세계관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그것들은 종교적 믿음이 존재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주는 문자로 된 증거를 제공한다.

길가메시는 인간은 모두 신의 종일 뿐임을 깨닫는다. 신은 사람들에게 왜 홍수와 가뭄, 침입 같은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모든 인간 문명의 공통된 특징은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거나 자신의 힘을 증강시키기 위해 자연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도시에 신전을 지어 신전마다 각각 다른 신에게 바침으로써 그러려고 했다. 신들이 사랑에서부터 전쟁과 풍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신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표시하려고 포도주나 기름 항아리 두껑에 점토로 봉인한 것에서도 고대 수메르인의 종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봉인이 신비한 힘이 있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고 믿었고, 그것을 신의 그림으로 장식해 신의 보호까지 받으려고 했다.

수메르 사람들은 해마다 새해 첫날에 신들이 만나 그 해에 어떤 운명적인 일들이 일어날지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결정은 가뭄과 홍수 같은 온갖 형태의 재앙도 가져왔지만 풍작과 군사적 승리 같은 예기치 못한 행운도 가져다 주었다.

3. 문명화의 시작

수메르 사람들은 하늘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지구라트라는 탑을 세웠다. 지구라트는 햇볕에 구운 점토 벽돌로 지은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탑 꼭대기는 모두 평평했고, 여기에 수메르 사람들은 사원이나 신전을 지어 신에게 바쳤다. 지구라트는 신이 사는 곳이라고 믿어 그 안에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32개가량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이 이라크에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있었고, 마르두크라는 신에게 바친 것이었는데,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도 원래 여기서 착안되었을지도 모른다.

수메르 사람들은 놀라운 수학자들이기도 했다. 레이어드가 발견한 점토판 중에는 이들이 복합한 산술을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으며, 이들은 수직으로 내려 그은 선과 V자 형태를 여러 가지로 조합해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나타냈다.

수메르 사람들은 60을 기반으로 한 수학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60을 나누는 방식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오늘날의 숫자처럼 왼쪽에 있는 숫자가 그 다음에 오는 숫자보다 높은 값을 갖는 ‘진정한 자릿수’ 체계도 사용했다.

이들은 수학과 천문학에서도 천재적이었지만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솜씨도 아주 뛰어났다. 학자들은 이들이 바퀴를 발명했다고 믿는다. 얼마 뒤 수레와 마차도 발명되었지만, 이들이 발명한 바퀴는 수레나 마차에 쓰는 바퀴가 아니라 항아리를 만들 때 쓰는 돌림판이었다. 

그러나 바퀴가 물건을 실어 나르는 장치로 개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만들어진 수레를 끄는 데는 나귀가 쓰였고, 나중에 통 바퀴가 바퀴살이 있는 바퀴로 대체되었다. 이 바퀴는 훨씬 많은 무게를 실어 나를 수 있어, 마차를 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4. 교역의 시작

그러나 이때는 도로가 거의 없어 수레로 여행하는 것이 배로 가는 것만큼 편리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들의 정착지를 바다와 이어주는 강을 이용했다. 수메르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가지 유형의 배를 설계했다. 

어떤 배들은 동물 가죽과 갈대로 만들었고, 어떤 배들은 털을 꼬아서 이어붙이고 역청을 발라 방수를 하고 나무로 노를 만들어 저었다. 배는 먼 곳에서 이들처럼 정착하기 시작해 도시와 문명을 이룬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교역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바퀴에서 문자까지 수메르 사람들의 과학기술은 머지않아 배로 갈 수 있는 세계 전체로 퍼졌다.

수메르의 장인들은 금과 은, 구리 같은 부드러운 금속으로 귀중한 물건을 만들었다. 1930년대에 영국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우르의 왕실 공동묘지에서 1800기가 넘는 무덤을 발굴했다. 한 무덤에서는 어떤 고대의 보물보다도 화려하고 값비싼 보물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르의 여왕 푸아비의 무덤으로, 기원전 2500년경의 것이었다. 무덤에는 여왕과 함께 병사 다섯 명과 시녀 스물세 명이 묻혀 있었다. 이들은 내세에서도 계속 여왕의 시중을 들도록 독살당한 사람들이었다. 

울리는 이들과 함께 정말 아름답고 멋진 보물더미를 발견했는데, 금박으로 만든 머리 장식과 금에 덮인 수염 달린 황소 머리가 있는 화려한 리라, 금으로 만든 식기류, 은으로 만든 사자 머리로 장식된 마차, 많은 금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이었다. 

5. 함무라비 법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생긴 우루크와 우르 같은 수메르의 도시들은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했다. 누가 죽은 사람의 땅과 재산을 물려받아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사냥과 채집을 하는 사회에는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고, 아무도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짓고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관개 용수로를 팠다. 따라서, 누가 죽은 사람의 땅과 재산을 물려받아야 하는지가 아주 큰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분쟁은 가족간의 싸움이나 집단간 싸움으로 비화했고, 그것이 치열해지면 도시와 도시의 전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문자의 발명으로 강력한 통치자는 문서로 된 일련의 칙령과 법령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었고, 그것을 처벌의 위협으로 뒷받침했다. 문자가 발명된 덕분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폭력을 쓰지 않고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바빌론은 기원전 1900년경에 득세하기 시작했다. 함무라비는 기원전 1810년부터 1750년까지 살았고, 그가 제정한 법이 바빌론을 탈바꿈시키고 안정시킨 덕분에 바빌론은 메소코타미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가 되었다. 함무라비는 자신이 만든 법을 돌에 새겨 바꿀 수 없도록 했다.

함무라비의 법은 다른 문명에서도 모방해, 오늘 날에도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정의의 토대가 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6. 문명의 확장

만일 아무도 법조문의 읽지 못한다면 법은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법에 의한 통치를 하려면 교육에 더욱 힘써야 했다. 도시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우도록 했다. 

모든 인간 문명처럼 아주 기발하고 독창적이었던 수메르 사람들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의 쇠퇴와 몰락을 가져온 것은 전쟁과 침입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붙박고 살다가 수대에 걸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농사를 짓자 기름졌던 땅이 갈수록 황폐해졌다. 

그들의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였다. 막강한 아시리아 왕 사르곤 대제는 아카드를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제국 가운데 하나를 세웠다. 유프라테스 강 어귀에서 수백 마일 상류에 자리 잡은 아카드는 아직 땅이 비옥하고 기름졌다. 수메르 남부에 있는 도시들이 쇠락해 사르곤에게 정복당하면서 사르곤의 영토는 더 거대해졌다. 

고대 중동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빙하기가 끝나고 오랫동안 습한 날씨가 계속되었던 시기가 끝나 그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 땅이 메말라갔고 우리가 아는 사막으로 변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수메르의 도시들이 거의 모두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문자 체계를 발전시킨 수메르 문명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록된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지식을 이부분에서 저 부분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착오 없이 전할 수 있었다. 문자는 인간이 처음 인위적 세계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데 이바지한 가장 강력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였다. 

문자의 발견

글을 쓰는 기술이 어떻게 상인과 통치자, 장인, 농부, 사제가 최초로 인간 문명을 일군, ‘역사’로 알려진 시대를 가져왔을까?

1. 기록의 시작

역사시대와 선사시대의 차이는 한마디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글을 씀으로써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다른 세대에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을 쓰면서 이른바 ‘기록된 역사’라는 것이 시작되었고, 그 전의 모든 것을 우리는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물론 글을 쓰기 전에도 이미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졋다. 때로 글로 써서 남기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정확하게 전달되기 힘들어 환상이나 신화로 둔갑하곤 한다.

이야기가 제대로 분석되고 정확하게 해석되도록 하려면 글로 써서 남겨야 하고, 그래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록된’ 역사는 처음 글을 쓰면서 시작되었고, 그런 일은 중동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문명들에서 약 5천 년 전에 일어났다. 

아마 문자가 없었다면 인간의 문명과 제국이 살아남기는커녕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자 덕분에 통치자들은 멀리서도 지워지지 않도록 새긴 칙병과 법, 군령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2.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는 오늘날의 이라크 중심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멀리 페르시아 만까지 뻗어 있었으며, 페르시아 만에서 인도양과 연결되었다. 수메르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새로운 욕구가 인위적 세계를 건설하는 쪽으로 확장되어 처음으로 도시와 국가가 나타난 지역들 가운데 하나다. 

수메르는 초기에 정착한 인간 공동체가 살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1만 년 전에는 해수면이 낮았던 지점에서 거의 130미터나 올라가 세계적으로 이 지역의 기후가 습해진 덕분에 지금보다 농작물 기르기가 훨씬 좋았다. 기온이 올라가고 강우량이 줄어 중동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래투성이의 불모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약 5천 년 전부터다.

습한 기후는 겨울에도 비가 와야 하는 밀과 보리, 포도 같은 농작물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이 지역의 산비탈과 산허리에서는 가축으로 길들이기에 딱 좋은 양과 염소, 소 같은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이런 동물들은 식량은 물론, 쟁기와 수레를 끄는 힘으로도 쓰고, 옷과 술.기름 등을 넣는 가죽 주머니, 가죽 제품을 만드는 재료로도 쓸 수 있었다.

고대에 최초로 수메르 도시가 나타난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에 인간이 만든 관개용수로와 배수로, 저수지, 댐 같은 시설을 통해 근처에 있는 땅에 물을 공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은 일부러 논밭에 강물이 범람하게 해, 자기들이 인위적으로 선택한 농작물이 풍작을 이루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 수 있었다. 

3. 문명의 발달

중동에서는 수메르 외에도 두 개의 고대 문명이 큰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하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일 강 유역에서 발생했고, 하나는 이스라엘의 요르단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글자는 초기 인간 문명이 얼마나 발달된 문명이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다.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그곳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굳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장사꾼이었고 또한 일부는 교역을 해도 좋을 만한 것을 만드는 장인이었다는 말이다. 

문자 언어는 식량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익히고 사람들 사이에 일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문명의 전형적 특징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식량을 채집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장인의 솜씨나 장사하는 솜씨를 발휘하는 문명 말이다.

4. 고대 문자의 발견

1845년 페르시아에서 이상하게 생긴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빽빽이 새겨져 있는 석판에 덮인 고대 궁전의 성벽이 발견됐다. 이것은 오래된 낙서 같은 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단순한 왕궁이 아니었다. 몇 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그곳에서 궁전 두 채와 큰 왕실 도서관이 발굴되었고, 알고 보니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니네베라는 고대 도시의 잔해였다. 

도서관은 기원전 627년에 죽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바니팔이 지은 것이었다. 위대한 왕이었던 아슈르바니팔은 학자이자 열렬한 수집가였다. 그 시대의 다른 왕들과 달리 아슈르바니팔은 읽고 쓸 줄 알았고,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레이어드와 그의 팀은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서 점토판을 무려 2만 점이나 발굴했다. 그 중에는 왕의 명단과 역사, 종교적인 글도 있고, 수학과 천문학 논문, 계약서, 법률 문서, 칙령과 칙서도 있었다. 이것들은 고대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제공했고, 언제 어디서 최초의 문명이 발생했고 그것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물론 이 귀중한 점토판으로부터 유익한 정보를 얻으려면 먼저 점토판에 있는 텍스트를 읽는 법을 알아내야 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레이어드와 그의 팀이 니네베에서 점토판을 발굴하고 있을 즈음에 페르시아에서 복무하던 한 영국군 장교가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을 했다. 설형문자 읽는 법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발견이었다.

5. 고대 문자의 해석

현재 영국박물관에 있는 로제타석 1799년에 이집트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발견한 유명한 돌이다. 여기에는 같은 구절이 세 가지 언어로 쓰여 있는데, 그 가운데 둘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이고 하나는 고대 그리스어다. 

1822년에 프랑스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은 로제타석에 새겨진 문자를 해독했고, 이로써 상형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헨리 롤린슨이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지대에 있는 자그로스 산맥의 작은 산에서 발견한 것도 그것들 못지않게 놀라운 것이었다. 이라크의 바빌론에서 뻗어나온 고대의 길을 따라 늘어선 절벽 위에서 그는 바위에 새겨진 일련의 조각상을 발견했고, 그 조각상마다 밑에는 어떤 구절이 쓰여 있었다.

베히스툰 비문이라고 하는 이 조각들은 기원전 522년부터 485년까지 이 지역을 다스린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정복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로제타석과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도 세 가지 언어로 새겨져 있는데, 그것이 100미터 높이의 절벽에 있어 롤린슨의 발견 전에는 아무도 절벽에 새겨진 것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1835년에 롤린슨은 절벽에 올라가 탁본을 떴다. 그는 텍스트의 첫머리는 페르시아 왕의 명단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있는 명단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것을 단서로 삼아 롤린슨은 고대 설형문자로 쓴 글을 읽는 법을 알아냈고, 그의 노력 덕분에 그후 전문가들은 레이어드가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귀중한 점토판에 쓰여 있는 것들도 대부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착생활의 시작

어떻게 기후 변화로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한가지 예를 우리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불리는 곳에서 볼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상이집트에서 나일강을 따라 하이집트로 내려가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거쳐 북쪽으로는 터키 중부까지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거쳐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지역이다.

1. 정착 생활의 시작

나투프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레바논 근처에 있는 해안가에 정착했다. 바다에는 그들이 식량으로 쓸 물고기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더 올라가 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땅이 비옥하고 풀이 자랐다. 알고보니 그곳은 늘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원이 풍부했다. 

어떤 철에는 가젤 같은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어떤 철에는 작은 마을에 정착해서 살았다. 그들은 마을에서 진흙과 찰흙으로 둥근 오두막을 지어 일 년 내내 그곳에서 살거나 1년에 얼마 동안을 그곳에서 지냈다. 최근에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에서 나투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여러 곳 발견되어 발굴되었다.

그런데 자연이 변덕을 부렸다. 과학자들은 얼마 안 있어 그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기온이 지난 8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꾸준히 올라가지 않고 느닷없이 뚝 떨어져 다시 빙하기가 찾아왔다. 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세계의 대부분이 다시 꽁꽁 얼어버렸다. 갑자기 땅이 눈의 여왕의 사악한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 여왕의 주문이 약 1300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어린 드리아스기’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약 1만2700년 전에 일어났다. 우리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은 그린란드의 얼음 시추 시료에서 얻은 증거 덕분이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80만 년 전의 지구의 기온까지 추산해낸다.

지금 전문가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이 따뜻한 것은 멕시코 만류가 따뜻한 물을 유럽으로 실어 나르기 때문이며, 이 멕시코 만류는 아메리카 대륙의 북동 해안을 따라서 기류와 해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도록 하는 염도가 높은 바닷물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북아메리카 빙하에 갇혀 있던 담수가 흘러넘쳐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자 해수의 염도가 엄청나게 낮아져 멕시코 만류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거나 완전히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2. 곡식의 수확

이는 왜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기온이 그렇게 쑥 내려갔다 올라갔는지도 설명해줄 것이다. 약 1300년 후에는 다시 많은 양의 담수가 빙하에 갇히면서 지구의 기온이 10년 만에 자그마치 5도나 올라갔다. 북해의 염도가 증가해 멕시코 만류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그때까지 그렇게 급격한 기후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특히 유럽과 지중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가 사냥터가 범람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가뭄이 시작되어 그나마 남아 있던 울창하고 비옥한 삼림 지대가지 잡목이 우거진 메마른 땅으로 변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밀 같은 들풀이 나투프 사람들의 주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는데, 날씨가 뜨겁고 건조해지자 모두 시들어버렸다. 어떤 전문가들은 어쩌면 그래서 나투프 여자들이 실험 삼아 씨를 뿌리고, 땅을 미로가 보리, 호밀 같은 풀을 재배하기 좋게 일구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굶어죽을 상황에 처하자 여자들이 가장 크고 가장 달콤하고 가장 수확하기 좋은 씨를 골라서 저장해두었다가 다음해에 특별히 준비한 땅에 뿌렸다는 것이다. 나투프 여자들이 역사상 가장 먼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 같다. 나투프 사람들의 창의성은 현대 고고학자들이 곡물을 수확할 때 쓰는 곡괭이와 낫의 형태를 지닌 농기구를 발견함으로써 증명되었다. 

3. 동물 길들이기

고고학자들은 오늘날의 시리아에 있는 아부 후레이라라고 하는 나투프 사람들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을 공들여 면밀히 조사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을 보면 이곳에 가장 좋아 보이는 씨들만 골라서 뿌리는 방식으로 야생 곡물을 재배할 줄 아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식량이 되었던 들풀이 죽어버리자 살기 위해 가장 쉽게 자라는 씨를 뿌려 기르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씨가 발견된 곳을 보면 그들은 자연히 습기가 모이는 비탈에 씨를 뿌린 것 같다. 그러고는 잡초와 떨기나무가 접근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산비탈의 논다랑이와 비탈을 적극적으로 관리해 농작물이 최대한 좋은 결실을 맺도록 했다.

나투푸 사람들은 처음으로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얄려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은 고분고분한 늑대를 선택함으로서 마침내 집에서 기르는 개로 길들였다. 개는 가까운 지역에 사는 다른 동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생 양과 염소, 멧돼지, 말을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개의 도움으로 이런 야생 동물을 길들여 한 곳에 놓고 길러 고기과 젖을 얻기가 비교적 쉬웠다.

왜 어떤 동물들은 애완동물이 되거나 농장에서 평화롭게 사는데 어떤 동물들은 그렇지 않을까? 최근에 이런 동물들의 역사를 연구한 과학자들은 야생 동물이 가축으로 길들여지려면 최소한 세 가지 특성이 있어야 함을 발견했다. 

그것은 무리를 지어 살아야 하고, 체계적 사회 구조가 있는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고, 다른 종의 동물들과 풀을 뜯어먹는 영역을 공유해도 괜찮아야 한다는 것이다.

4. 또다른 선택

늑대와 야생 양, 야생 염소가 인간에게 선택적으로 번식되고 8천 년 전에는 여기에 돼지와 소가 합류했고, 약 6천 년 전에는 유럽과 극동을 잇는 유라시아 스텝에 있는 야생 풀밭과 숲에서 돌아다니던 당나귀와 말이 합류했다.

나투프 사람들은 개를 사랑했다. 사람과 개가 나란히 묻힌 무덤도 발견되었다. 나투프 사람들의 무덤들은 이들이 가축을 길럿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준다. 높은 유아 사망률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나투프 사람들의 무덤 가운데 3분의 1에는 여덟 살 미만의 아이들의 골격이 들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의 선택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자연히 이런 새로운 질병에 취약한 사람들은 쉽게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보다 죽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 세대가 지나면서 가축과 가까이 산 사람들은 가축이 퍼뜨리는 병에 대한 면역력이 강해졌다.

약 1만1400년 전에 어린 드리아스기가 끝나자 기후가 예전처럼 다시 온화해져 불과 몇 년만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 사람들은 온갖 초목이 자랄 수 있게 비가 충분히 오는 풍요로운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형태로 생존에 필요한 강력한 무기를 지니게 되었다. 가축과 씨는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5. 새로운 생활방식

기원전 9천 년경부터 새로운 영원한 정주민이 중동 전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신석기 시대‘ 농사꾼들은 이제 훨씬 큰 공동체에서 살 수 있었다. 농사를 지을 줄 알게 되고 가축을 길러 고기와 젖도 먹고 끄는 힘으로도 쓸 수 있게 되면서 창고에 먹을 것이 그득하게 쌓인 덕분이었다. 사냥과 채집이 일부에게는 과거의 전통이 되고 있었다.

예리코는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도시 가운데 하나다. 면적이 그 전에 나투프 사람들이 살았던 곳보다 여덟 배나 크고, 최초로 성벽을 두른 도시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발굴 결과 둥근 집들이 발견되었는데, 방이 하나 이상 있는 집들이 많았고, 요리와 빨래같은 것을 하는 개방된 공간도 있었다

이런 초기 건물들은 돌로 토대를 놓았고, 바닥에 자갈을 깔았으며, 진흙과 찰흙으로 만든 별돌로 벽돌로 벽을 쌓았다. 발견된 곳마다 돌이나 진흙으로 지어 식량과 곡물을 쌓아둔 창고가 있었는데, 이는 적어도 이 사람들에게는 돌아다니며 살던 날들이 이제는 오래된 과거였다는 분명한 증거다.

이들은 필요에 의해 자연을 자기들에게 맞게 바꿀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새로운 생활방식이 탄생했다.

6. 문화적 접촉

예리코의 서편에는 성벽이 쌓여 있었다. 한때는 이들을 시기하는 이웃들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믿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던 바다에서 느닷없이 밀려오는 진흙과 바닷물을 막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데 새롭게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 사람들이 떠오르는 다른 문화들과 접촉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흑요석은 화산의 용암이 급격히 식을 때 생기는 일종의 천연 유리다. 가장 날카롭고 가장 효과적인 화살촉을 만들 수 있어 사람들은 이것을 많이 찾았다.

터키 중앙에 있는 바위산에서는 흑요석이 자연히 생성되지만, 이것은 수백 마일 떨어진 신석기 시대의 예리코에서도 발견되었고, 이로부터 우리는 장거리 교역로가 이미 잘 닦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왜 이미 먹기 좋고 수확하기 좋게 만든 귀중한 씨앗을, 1천 년 이상 특별한 선택과 힘든 노동이 낳은 산물을 유리와 교환하지 않았겠는가? 한 곳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농사를 짓고 씨를 공급하고 가축을 기르는 방법이 유럽과 중동은 물론 그 너머까지 금세 널리 퍼졌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농경의 시작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해빙기가 찾아온 뒤에 인간이 어떻게 여러 가지 생존 기법을 실험하다가 역사상 최초로 진화 과정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도록 시도하게 되었을까?

1. 인위적 선택

인류가 족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식동물에 대한 무차별 살육이 인간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에 끼친 영향이 아직 다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인간의 운명과 지구의 생태계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엮을 또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약 1만2천 년 전부터 인류의 역사는 자연의 진화 과정을 제어해 자신의 요구에 맞게 바꾸려는 최초의 시도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먼저 동물을 인위적으로 번식시키고 특수한 식물, 즉 식량 작물을 집중적으로 기르는 농사의 시작으로 나타난다.

자연 선택은 수십억 년 동안 지구의 생물을 변화시켜, 단순한 단세포 미생물로부터 열매를 맺는 버섯에서 뛰는 쥐까지, 끈적끈적한 민달팽이에서 독을 분비하는 독사까지 온갖 다양한 생물을 만들어냈다. 이런 변화는 세대 간의 유전적 차이에서 왔고, 이런 유전적 차이는 끊임없이 변하는 지구의 많은 환경에서 종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그런데 약 1만2천 년 전에 인간이 처음으로 땅을 일구고 야생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과정을 중간에 가로챘다. 사람들이 오늘날 ‘인위적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이 야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표본을 선택해 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해서 기르고 번식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2. 정착생활

인위적 선택은 사람들이 정착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필요한 식량을 모두 한 곳에서 재배할 수 있어 한 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마을에서 살며 최초로 집을 짓기 시작했고, 마을이 커져 작은 도시가 되고, 작은 도시가 다시 커져 큰 도시가 되고, 큰 도시들이 모여 국가가 되고, 국가들이 모여 하나의 문명을 이루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정주민 생활양식이 탄생했고, 그러자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 지구의 풍경이 식량 생산에 맞게 재편성되었고, 현대의 질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의 질병은 거의 모두 인간이 가축과 가가이 살면서 생겼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식량 생산과 관련이 없는 직업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식량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충분히 먹여살릴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과거에 수렵채집을 했을 때보다 생산성이 열 배 이상 올라갔다.

농사를 지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어 사람들은 자식도 더 많이 낳을 수 있었다. 식량을 창고에 쌓아둘 수 있어, 잘하면 한 해 걸러 한 번씩 출산을 해도 되었다. 마을이나 작은 도시에 사니 주변에 어린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많아 가족의 규모를 늘려도 되었다.

3. 사회의 변화

마을과 소도시의 인구가 늘자 농사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장인이 될 수 있었다.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도자기와 보석, 옷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숙련된 노동자가 된 것이다. 이들은 유연한 소재로 바퀴와 마차, 갑옷 같은 것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도 탐구할 수 있었고, 땅에서 구리와 청동, 철의 형태로 그런 소재를 추출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상인이 나타나 장인들이 만든 제품과 잉여 농산물을 사고팔기 시작했다. 교역은 곧 여행과 배, 글쓰기, 셈하기, 화폐를 뜻했다. 식량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직업으로, 마을이나 소도시가 신의 뜻에 따라 잘 유지되고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들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는 역할도 생겼다. 이런 초기의 사제와 성자들은 세계의 주요 종교가 탄생하는 데 일조했다.

정착민의 수가 늘어나자 새로운 형태의 조직과 통제가 필요했다. 세계 최초의 황제가 나타났고, 이들과 더불어 세금을 걷고 법을 공표하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법을 집행하는 일을 하는 관료귀족도 나타났다. 

왕은 군대로 자신의 권력을 보호할 여유도 있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른 덕분에 이제는 창고에 쌓인 곡식으로 수많은 병력을 먹여살리고, 길들인 동물은 그 젖을 짜서 먹거나 잡아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짐수레를 끌거나 군인들을 전쟁터로 실어 나르는 데 쓸 수도 있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전쟁을 감행해 이런 새로운 도시 문화를 찬미하고 확장할 수도 있었다. 이런 도시 문화는 곧 고대 세계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4. 사냥과 농사의 공존

그런데 어떻게, 왜,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 농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을까? 한가지는 분명하다. 석기 시대에 어떤 똑똑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농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기르는 것이 인간에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일을 한 곳에서 한 번에 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어떤 역사책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마치 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말한다. 그것이 인류에게나 지구 전체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탓이다. 그래서 그것을 신석기 시대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이루어진 과정이었다. 비록 오늘날에는 전 세계 인구의 약 99.9퍼센트가 농업과 축산업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살지만 말이다.

인간의 생활방식이 돌아다니며 수렵과 채집을 하는 생활방식에서 정착해서 살며 농부들이 도시 생활자들을 부양하는 생활방식으로 바뀐 것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만큼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원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때는 사람들이 반이라도 수확을 해서 그들의 첫 번째 빵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야생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냥감도 많고 한 번 잘 잡으면 식구들이 일주일 내내 먹을 수도 있었던 사냥꾼의 편한 삶에 비하면 농사꾼의 삶은 힘들고 고되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바로 사냥을 해서 먹는 전통적 생활방식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5. 초기 농사

빵 한덩어리를 구워 먹으려고 해도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땅을 일구고 수확을 하는 고된 일들을 견뎌내야 했다. 인간이 처음 재배하기 시작한 보리와 밀, 호밀 같은 곡식의 낱알을 일일이 풀 더미 속에서 손으로 주워야 했고, 가장 원시적인 조리기구인 절구와 공이를 이용해 낟알을 빻아야 했다.

게다가 그런 낟알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 그대로 자란 것들이지 몇 세대에 걸친 인위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었다. 좋은 이유에서 자연은 그것들을 되도록 가볍게 만들었고,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멀리 날아가서 싹을 틔우고 번식할 수 있도록 줄기에도 느슨하게 붙어 있도록 했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하듯이, 줄기에서 쉽게 떨어지는 낟알은 식구의 빵을 책임지는 사람들에게는 악몽이다. 그런데 빵을 만들려면 이런 종류의 밀이 아주 많이 필요하고, 그것도 여기저기에 우수수 떨어진 낟알들을 허리가 휘도록 일일이 주워야 한다.

예측할 수 없고 달갑지 않으며 힘들기만 한 일, 이것이 1만2천 년 전에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초기 농부들의 골격은 그것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발가락은 비틀어지고, 무릎은 구부러져서 관절염에 걸려 있으며, 힘들게 낟알을 돌판 사이에 넣어 빻느라 허리가 완전히 기형이 된 경우도 있다.

야생 동물을 달래 원하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일은 더욱 쉽지 않았다. 수천 년에 걸친 유전자 조작은 달콤하고 풍부하며 수확하기 좋은 농작물과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한 가축을 낳았지만, 그때는 완전히 고투의 연속이었다.

6. 기후의 변화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제다. 1만2천 년 전에도 사람들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이유와 똑같은 이유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그것은 앞으로도 몇 세대 동안은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기후 변화였다.

가장 최근의 빙하기는 2만2천 년 전에 가장 추웠다. 그때는 많은 물이 북유럽의 많은 부분을 덮은 빙상에 갇혀 해수면이 오늘날보다 거의 130미터나 낮았다. 그때는 영국 해협도 없고 흑해도 없고 지중해도 낮은 평지였다. 지금 베링 해협이 있는 곳에는 베링지아라는 땅이 얼음에 덮인 툰드라 지대로 알래스카와 러시아 사이에 뻗어 있어, 인간과 동물이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중요한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뱃길에 된 홍해가 그냥 평평한 육로였다. 그런데 수천 년에 걸쳐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변이 올라가 전 세계에서 대대적인 범람이 일어났다.

해빙기에 지구의 기온이 섭씨 6도 이상 올라갔고, 아마 이것은 지구의 자전에서 일어나는 주기적 변화 탓이었을 것이다. 해빙기는 약 1만4천 년 전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때는 거대한 빙붕이 무너져 바닷물에 녹으면서 해수면이 500년 만에 25미터나 올라갔다. 

약 8천 년 전에는 해빙기가 대부분 끝나 해수면이 거의 현재와 같은 수준이 되었다. 영국 해협은 마지막으로 범람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이로 인해 영국은 10만 년 남짓 만에 처음으로 유럽대륙과 분리되었다.

이런 자연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생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인류에게는 그로 인해 전통적 사냥터였던 많은 곳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강우 패턴과 날씨 체계가 급속히 변하면서 한때는 사냥하고 채집하기에 좋은 풍요로운 숲이었던 지역들이 메마른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큰 포유류의 멸종

어떻게 현생인류와 기후 변화가 우연히도 동시에 생태계의 균형을 교란시켜 큰 동물의 대량 멸종을 낳았을까? 그 대량 멸종은 처음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음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났다.

1. 기후 변화

지난 300만 년 동안 저 북극과 남극을 덮은 얼음이 깎아지른 듯한 얼음 절벽의 형태로 불도저처럼 밀고 내려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빙하와 빙상들이 1마일이 넘는 두께로 지구의 땅덩어리를 30퍼센트나 뒤덮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후 변화가 상당히 느리게 일어난 까닭에 생물들은 전반적으로 잘 적응했다.

큰 동물들은 털복숭이 매머드처럼 털이 더욱 많아져 추위에도 살 수 있었다. 인간도 네안데르탈인처럼 몸집도 작아지고 털도 더 많이 났다. 일부는 피부가 하얗게 변해 열을 보존했고, 이는 위험한 자외선을 반사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인간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진화하며 적응한 덕분에 최악의 추위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빙하기는 좀 느닷없이 끝났다. 약 1만4천 년 전에 지구의 평균 기온이 6도나 올라가, 혹독한 빙하기에서 오늘날의 한층 온화한 간빙기로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넘어갔다.

2. 지구 공전과 기울기

지구의 기온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지구가 1년에 한 번씩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동안 태양에 조금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날씨가 뜨거워지거나 추워지기 때문이다.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을 하는 방식도 한 요인이다.

지구는 사실 약간 통제가 안 되는 팽이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지구의 기울기가 21도에서 27도까지 변할 수 있고, 이것이 극지방의 기온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과학자들은 아주 혹독한 빙하기였는데도 약 1만4천 년 전부터 1만1천 년 전까지 몇 천 년 동안 날씨가 뜨거웠던 것도 이런 지구의 공전 궤도기울기의 변화 탓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빙하기에 간간이 따뜻했던 시기를 간빙기라고 하는데, 지금도 우리는 간빙기에 있으며, 이 간빙기는 약 1만4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이번 간빙기는 인간이 초래한 지구 온난화 탓에 다른 간빙기보다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극지방을 덮고 있는 얼음이 완전히 녹으면 세계의 기후가 4천만 년 된 빙하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지도 모른다.

3. 기후 변화의 적응

약 1만8천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북아메리카에서 오대호를 뒤덮었던 거대한 빙상의 남쪽 풍경은 풀과 나무가 뒤섞여 있는 큰 정원 같앗고, 어슬렁거리는 야생 포유류의 낙원이었다. 사자와 검치호 같은 큰 육식 포유류가 마스토돈과 거대한 매머드를 먹고 살았다. 말과 낙타도 이들 큰 육식동물의 맛있는 식사거리엿다. 말과 낙타는 이 아메리카의 삼림 지대에서 처음 나타났다.

사우투올라 부녀가 저 에스파냐의 동굴 벽화에서 보았던 들소 같은 것들도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이 들소들은 젖소가 아니었다. 이것들은 거의 코기리만 했다. 우리가 강에서 사는 조그만 동물로 아는 비버도 오늘날의 가장 큰 회색곰만큼이나 자랐고, 그때는 곰도 지금보다 거의 두 배나 컸다. 

지구는 오늘날 ‘거대동물‘로 불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포유류들로 가득찼다. 거대한 짐승들이 혹독한 날씨에 훨씬 잘 지낸것은 이들의 커다란 몸집이 중요한 장기들을 극한의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만 년 동안 적어도 서른 번 이상 얼음이 뒤덮었다가 녹았다가 했다. 혹독한 정도는 달랐지만 그때마다 개별 종들이 더워지거나 추워진 기후 변화에 적응하면서 자연과 자연의 생물계는 되살아났다.

4. 큰 포유류의 멸종

거대한 빙상이 녹았을 때 북아메리카에는 적어도 80종의 큰 포유류가 살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수천만 년을 살아온 것들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것들이 모두 죽었다. 모두 합해 45종 가운데 33종이 멸종했고, 북아메리카의 동물들은 대부분 기껏해야 칠면조만 한 것들밖에 안 남았다. 

살아남은 비버와 곰조차 그들의 조상에 비하면 난쟁이처럼 작아졌다. 오늘날의 북아메리카 들소는 지금가지 살았던 들소 가운데 가장 작다. 전문가들은 모두 합해서 아메리카의 큰 동물들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이 약 1천 년 만에 사라졌다고 본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거의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큰 포유류 13종이 사라졌다. 멸종은 더 일찍 시작되었다. 결국 오늘날의 캥거루보다 큰 것은 아무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지만 북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에서는 빙하가 물러나고 해수면이 올라왔을 때에도 큰 포유류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신세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느닷없이 수많은 큰 동물이 멸종되었는데 왜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5. 인간의 도래

어떤 전문가들은 기후 탓일 거라고 생각한다. 기온이 올라가 큰 동물들이 불리해졌다는 것이다. 몸집이 커서 몸을 시원하게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더위에 지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장 인기 있는 설은 거의 40년전에 미국 과학자 풀 마틴이 처음 내놓았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의 도래를 원인으로 꼽았다. 아메리카에서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나 그런 큰 동물의 멸종은 인간이 두 대륙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일어났다

마틴에 따르면, 두 대륙의 동물은 그때까지 인간을 만난 적이 없어 인간에게 취약했다.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쓴 일기처럼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 서식지를 만난 탐험가들이 쓴 일기를 읽어보면 언제나 야생 동물들이 겁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인간 떠돌이들이 부싯돌로 만든 무기와 활, 화살, 창을 들고 처음 나타났을 때 그들과 마주친 동물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동물들은 날카로운 창을 든 이 수렵채집인들의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1천 년도 안 되는 사이에 큰 사냥감 대부분이 살육을 당하고 많은 종이 멸종 위개에 처했을 정도였다.

이 설은 왜 북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에서는 인간이 존재했는데도 비슷한 동물들이 많이 살아남았는지도 설명해준다. 이곳에 사는 동물들은 200만 년 넘게 인간과 함께 진화했고, 인간이 고기과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것들은 조상들의 경험 덕분에 도망가거나 피하는 식으로 인간과의 접촉을 피함으로써 충분히 많은 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대량 멸종이 일어나지 않았다.

6. 변화된 자연

그런데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큰 포식 동물들이 인간의 손에 대량으로 죽임을 당하자 이들 동물의 먹잇감이었던 들소와 사슴, 나무늘보, 말, 낙타 같은 초식동물들의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포식자가 사라지자 이것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나 이것들에게 고루 돌아갈 식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급속한 기후 변화로 식물의 생태까지 변하자 재앙이 닥쳤다, 초식동물들까지 대량으로 굶어죽은 것이다. 변화된 자연은 더 이상 초식동물들을 부양할 수 없었고, 결국 오랜 기간 얼마 안 되는 식량과 물만으로도 견딜 수 있었던 작은 동물들만 살아남았다.

이렇게 개체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풀을 너무 많이 뜯어먹은 것도 기후 변화가 가져온 결과에 기여해, 초목이 울창했던 풍경이 더욱 빠르게 초원으로 변했고, 그 결과 자연환경은 미래 세대의 큰 동물을 부양하기에 더욱 부적합한 곳으로 변했다.

자연의 생태계는 이렇듯 깨지기 쉽다. 여기서 새로운 것을 조금 보태고 저기서 그것들이 다른 것들을 제거하고, 거기에 약간의 기후 변화까지 일어나면 엄청난 파국이 온다.

4만 년 전에서 1만2천 년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풀을 먹는 큰 유대류와 유태반 포유류가 전멸했을 때 인간이 한 역할은 인류가 끊임없이 변하는, 지구의 깨지기 쉬운 자연환경에 큰 영향을 끼친 첫 번째 사례였다

수렵 채집인

인간은 어떻게 자신이 지구에서 산 역사의 99퍼센트의 기간을 편히 머물 수 있는 집이나 직업, 사유재산도 없이 자연 상태에서 살았을까?

1. 공유사회

우리가 가진 증거 가운데 많은 것들은 이 석기 시대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말한다.약 1만 년 전까지는 오랫동안 사는 집이나 마을이 없지는 않았어도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늘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남자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여자들은 자연 그대로 자란 열매를 땄다. 때로 여자들도 사냥하는 것을 도왔는데, 특히 도망가지 못하도록 빙 둘러서 포위할 필요가 있는 사슴 같은 동물을 잡을 때 그랬다.

늘 돌아다니는 방랑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실제로 소유할 게 거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밖에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동물 가죽이나 털가죽을 입었고, 날씨가 더워지면 거의 발가벗고 다녔다.

그러니 필요 없는 것을 무엇하러 가지고 다녔겠는가? 그들은 물을 넣은 호리병박같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또 사냥할 때 쓸 이나화살도 가지고 다니고, 죽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불을 피울 때 쓸 부싯돌로 만든 도구도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밖에는 거의 필요한 것이 없었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그들은 물건을 서로 공유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면 가지고 다닐 것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재산이 없었고, 누구도 땅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사유재산이니 여기서는 사냥하지 마시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땅은 오늘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우리 모두의 것, 살아 있는 생물이면 누구나, 다시 말해 동물과 식물, 인간이 모두 공유해야 할 자원이었다.

2. 초기 예술

사람들은 호모 하빌리스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아니 그에 앞서 적어도 300만 년 전에 루시의 사람들인 호모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런 자연 상태에서 살았다.

그들은 서로 사이좋게 살았고, 자연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사냥하고, 피곤하면 자고, 땅에 열매와 고기가 없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지구가 다시 기운을 차릴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아주 예술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수렵채집인들은 우리가 아는 최초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품이 프랑스 남서부와 에스파냐 북부에 있는 선사시대의 동굴 속 깊은 곳에 지금도 남아있다. 이 수렵채집인들이 최초로 새긴 것들에서 인류 예술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아마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굴 벽화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1875년 어느 가을 날 아침 마리아 사우투올라라는 여덟 살 난 에스파냐 소녀가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한 동굴 벽화일 것이다. 

이날 사우투울라는 아버지 마르셀리노와 함게 알타미라에 있는 그들의 집 근처에서 이상하게 생긴 동굴들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270미터나 되는 어두 침침한 동굴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사우투올라가 위를 쳐다보니 천장이 소처럼 생긴 것들을 그린 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열정적인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사우투올라의 아버지는 이것들이 들소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전문가 친구의 도움을 얻었고, 얼마 안 있어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라고 선언했다.

3. 동굴 벽화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런 솜씨 좋은 그림이 그렇게 오래되었다는 것을, 그것이 그렇게 ‘원시적인’ 사람들의 작품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벌컥 화를 내며 마르셀리노 사우투울라가 유명해지려고 누군가에게 돈을 주어 동굴에 그림을 그리게 했을 거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마르셀리노 사우투올라가 불명예스럽게 죽은 지 14년이 지난 1902년에야 다른 동굴에서 비슷한 그림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것들이 진품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현대의 연대 추정 기술에 따르면, 그것들은 거의 2만 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석기 시대 사람들은 정확히 무엇을 그렸고, 왜 그렸을까? 그들은 어떤 재료를 섰을까? 그들의 예술작품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들이 전시하려고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바르셀리노 사우투올라가 에스파냐에서 발견한 그림이나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유명한 라스코 동굴 벽화처럼 그것들 가운데 꽤 많은 것이 빛이라고는 거의 없는 굴 속 깊은 곳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사가들이 샤민이라고 하는 고대의 성자들이 굴 속 깊이 들어가 마법 의식을 치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동굴의 암석에 그림을 그려 그들의 어머니인 자연에게 동물과 식량, 행운을 달라고 기원하고 싶었을 거라고 말이다.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점토에 때로는 산화철을 섞어 여러 가지 색소를 만들고 그것에 동물의 기름을 섞어 끈적끈적한 그림물감을 만들었다.

4. 하드자베족

지금은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대 농업과 산업이 이런 오래된 인간 사회까지 거의 완전히 퍼진 탓이다. 그러나 거의 잊힌 세계의 오지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 숲속에서, 그들은 땅이 농사짓기에 좋지 않은 곳이나 도시가 번성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붙박여 살고 있다. 

하드자베족은 현재 탄자니아가 있는 중앙아프리카 오지에서 산다. 최근까지도 이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숲에서 잘 살았다. 그러나 2006년에는 겨우 2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곳을 침입하는 농부들과 야금야금 진행되는 도시화에 포위되어 나무가 울창한 숲 지대로 밀려난 탓이다.

이들에게는 침략의 역사가 없어, 침입하는 농부들과 도시 사람들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전통적 사냥터에서 물러나 훨씬 살기 힘든 숲으로 들어갔고, 지금 거기서 되도록 현대 사회로부터 숨어 지내고 있다.

하드자베족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한다. 최근에는 부족민 하나가 외부인에게 숲을 여기저기 보여주는 안내자로 고용되는 드문 일이 일어났는데 그의 봉급날에 돈을 다 같이 나누어 가지려고 부족민 전체가 진을 쳤다는 보도가 있었다.

현대 사회가 명령과 엄격한 통제, 법, 경찰, 행정관, 통치, 통치자에 기대고 있다면, 하드자베족은 거의 지성과 협력에 기대고 있고 부족이 관리하기 좋게 작은 집단들로 편성되어 있다. 그들의 생존 비결은 유연한 것과 서로 기꺼이 돕는 것에 있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고정된 집이 없어 발걸음이 가볍기 때문이다.

5. 마지막 혈통

이들의 DNA가 지금가지 연구된 모든 인간 집단 가운데 가장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근의 유전학적 연구 결과는 이들의 오랜 전통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유전자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들의 혈통이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유전자는 대대로 예측할 수 있는 비율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하드자베족의 혈통이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 과정 초기에 나머지 인간 혈통과 갈라졌다고 믿으며, 이는 곧 그들이 우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들도 현대 세계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이들의 혈통 또한 사라질 공산이 크다.

하드자베족의 생활방식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석기 시대의 생활일반에 관해 말해주는 것은 그것이 꽤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식량 생산 과정에 참여하고 부족 전체가 이동하며 살아, 통치자나 가만히 앉아서 먹여주기를 기다리는 집단이 없다. 

이 사람들은 숲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무엇이 먹기 좋고 무엇이 먹기 좋지 않은지를 잘 안다. 숲에서 나는 식물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고 다른 건강 문제를 다루는 법도 수백 세대 동안 구전 되었다.

현대의 약도 대부분은 결국 자연에서 발견되는 성분으로 만들어진다. 하드자베족 사람들은 석기 시대 사람들처럼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약초와 식물 치료제에 대해 가장박식한 현대 약학자들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다.

6. 자연을 위한 생활

모든 자연적인 것에 대한 깊은 존중과 배려는 수렵채집인의 신화, 또는 종교의 토대였다. 그들에게는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차 있었다. 숲에는 죽은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고, 조상들은 사후에 돌아와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위로해주었다. 

그들이 먹고 자고 쉬고 따뜻하게 지내고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자연의 숲을 돌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자연의 풍요와 자연의 자원을 완전히 믿고 의지했다.

아마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수렵채집인의 생활방식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인구의 전반적 수준이 저절로 조절된다는 점일 것이다. 수렵채집인은 늘 걸어서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므로 자식을 많아야 4,5년에 하나식 터울을 두고 낳을 필요가 있다.

자식이 너무 많으면 한꺼번에 데리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수만 년 동안 지구에서 약 500만 명이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고,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일이 없었다. 방랑자처럼 떠도는 생활을 하려면 500만 명 정도가 적당했고, 그것이 자연에서 지속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왜 수만 년 동안 행복한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던 500만 명의 사람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습관을 바꾸어 완전히 새롭고 훨씬 힘든 생활방식으로 돌아섰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