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분열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아후라 마즈다라는 유일신을 믿는다. 그리고 삶을 선과 악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본다. 하지만 결국은 선이 승리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스스로 진실과 거짓 중 어떤 길을 택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1. 조로아스터교

키루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조로아스터교도였다. 이 고대 종교는 오늘날에도 이란의 일부 지역에서 믿으며,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창시했다. 자라투스트라는 <아베스타>라는 경전에 신에게 받은 계시를 기록했다. 이들의 종교는 진실하고 성실한 것을 높이 평가하며, 이것이 그들 신앙의 핵심이다. 그 결과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이 페르시아 문화의 특징이 되었다.

한편 지구상에서 두 번이나 사라질 뻔한 유대인은 이제 신이 약속한 땅의 소유권을 단호하게 주장하기로 했다. 새로 지어 반짝이는 예루살렘의 신전으로 돌아온 뒤 유대인은 그동안 대대로 구전되었던 구약성서 이야기를 필경사들에게 쓰게 해서 편집해 신의 말로 공식화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어떤 성경학자들은 구약성서 이야기를 약속의 땅에 대한 그들의 역사적 주장을 신과의 신성한 계약을 통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는다. 이제부터 그것을 빼앗는 사람은 누구나 역사적으로 이미 정당하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이며 신을 진노하게 할 뿐이었다.

2. 페르시아 제국

한편 키루스는 다시 북쪽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스텝 지대의 유목민들이 또다시 제국의 변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기원전 529년에 스키타이의 한 갈래인 마사게타이족티그리스강의 발원지에서 총공격을 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 군대가 처음에는 잘 싸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리해졌고, 결국 키루스는 죽임을 당했다. 

키루스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제국은 그 뒤로도 200년 동안 번성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관용 정책지역의 종교와 믿음에 대한 존중 덕분이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결국 이집트를 정복하고 마사게타이족을 물리쳤다.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되찾아 오래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파사르가다에 무덤을 만들었다. 

캄비세스의 사촌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22년부터 485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제국을 재조직하고 페르세폴리스라는 수도를 새로 웅장하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오늘날의 이란에 있었고, 높이 20미터에 두께가 10미터나 되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장관이다. 다리우스는 최초의 수에즈 운하도 건설해 배가 운하를 통해 지중해에서 홍해로 갈 수 있도록 했다.

카브레트 근처에 있는 나일 강의 둑에는 지금도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다리우스 왕은 말한다. 나는 페르시아 사람이다. 페르시아에서 출발해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집트에서 흐르는 나일이라는 강에서부터 페르시아에서 시작되는 바다까지 이 운하를 파라고 명령했다.  내가 명령한 대로 운하를 파자 역시 내가 의도한 대로 운하를 통해 배들이 이집트에서 페르시아로 갔다.”

3. 페르시아의 번성

다리우스는 제국에 주조 화폐를 도입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터키 서부에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 사르디스로부터 페르세폴리스까지 길이가 2500킬로키터나 되는 도로를 건설교역을 장려했다.

이 길에 여관을 짓도록 해 상인들이 쉬어갈 수 있게 하고, 수비대를 두어 산적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 키루스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노예를 금지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그의 많은 건축 계획에 참여해 일한 사람들은 모두 대가를 받았다.

아마 북쪽에서 유목민 부족들이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골치 아픈 문제가 없었다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이러한 정책은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르시아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북쪽의 유목민들 역시 다른 유목민들 때문에 서쪽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이런 부족들에게 계속 시달리다 페르시아는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분쟁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리하여 결국 한때 득의양양했던 페르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서쪽에서 그리스가 부상하게 된다. 골치 아프게 하는 스키타이의 침입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다리우스는 기원전 512년경에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오늘날의 그리스로 들어갔다.

그는 멀리 도나우 강까지 진군해 배후에서 그리스를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역의 지리를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스키타이는 모두 놓치고 대신 그리스 북부에서 트라키아마케도니아 사람들을 공격해 복속시켰다. 다리우스는 그곳에 군을 주둔시키고 자신의 사트라프를 임명해 제국의 북서 변경 지대를 보호하는 완충지로서 이 지역을 지키도록 했다.

4. 마라톤 전투

이 선제공격은 역효과를 낳았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같은 독립심과 자긍심이 강한 그리스 도시들이 터키 서부에서 페르시아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고, 그리스 이오니아 사람들이 반란을 이끌었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492년에 반격했지만 2년 뒤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패해 충격파가 그의 제국 전체로 퍼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투 후에 아테네로 전령을 보내 그리스 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제는 페르시아의 해상 공격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는데, 전령이 26마일이나 되는 길을 달려오는 바람에 너무 지친 나머지 소식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장거리 경주를 유산으로 남겼다고 한다.

마라톤 전투는 그리스가 막강한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잇따라 그리스 도시들이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제 서부 스텝 지대의 유목 민족을 막을 수 있는 완충지대를 갖기는 커녕 오히려 새로운 적이 생기고 말았다. 갈수록 강성해지는 아테네라는 도시가 이들을 이끌었고, 이들은 해전의 전문가라는 기량까지 갖추고 있었다.

5. 페르시아의 멸망

다리우스는 마라톤 전투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기원전 480년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이처럼 유럽에서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른 존재를 물리칠 준비를 했다. 그의 군은 얼마나 규모가 컸던지, 각각 300척이 넘는 목선으로 부교 두 량을 만들어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데 이레 밤낮이 걸렸다.

그리고 중동부 산에 있는 테르모필레에서 에피알테스라는 지역 사람이 페르시아 군에 그리스를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려주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이제 그의 군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자원병 1천 명으로 페르시아 군의 맹공격을 견뎌냈다. 그의 군이 오랫동안 페르시아 군을 저지한 덕분에 나머지 그리스 군은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아테네 해군은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다.

성질이 나쁜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와의 전투에서 병사를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수의 힘으로 밀어붙여 아테네를 점령하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 덕분에 아테네 시민들은 근처에 있는 섬으로 피할 수 있었고, 거기서 자기들 집이 불타면서 밤하늘을 밝히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결전은 9월에 시작되었다. 그리스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이 살라미스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3단으로 노를 젓는 페르시아 군용선은 훨씬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그리스 배들에 비하면 너무 둔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박살이 났고, 200척이 넘는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6. 동서 문화의 분열

어떤 역사가들은 그리스가 승리를 거둔 살라미스 해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전투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그리스의 독립과 통일을 가져와 현대 서양 문명의 토대를 놓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는 해군의 지원 없이는 육지의 대규모 군을 지탱할 수 없었고, 결국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해에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그리스를 쳐부수는 일을 맡겼으나, 그리스 연합군은 결국 플라타이아 전투와 미칼레 전투에서 그를 궤멸시켰다.

이제는 유럽과 아시아가 전쟁을 했다. 변경에서 물이 풍부한 땅에 접근하려고 밀치락달치락하던 유목민과 정주민의 싸움이 어느새 커져 서로 적대하는 제국과 제국, 도시 국가들과 도시 국가들 사이의 분쟁이 되어버렸다. 

이들은 이제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해갔고, 다른 종교와 문화를 야만적인 이단자로 여김으로써 침략과 정복을 정당화했다. 왕은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지향해야 하며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아소카의 생각은 이제 완전히 철 지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중동의 페르시아 문화서양의 유럽 문화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은 곧 유대인이 그 사이에 끼여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는 어떤 것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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