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

어떻게 어떤 통치자들은 자연의 너그러움 덕분에 백성들의 눈에 살아 있는 신으로 여겨져 살아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더할 나위 없는 복종과 완벽한 헌신, 절대적 보호를 받게 되었을까?

1. 파라오 왕조

사냥하고 채집하며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샤먼은 땅과 하늘, 짐승과 숲의 정령들과 신들을 공경하고 숭배했지만. 이들이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한 흔적은 없다. 오히려 하늘의 양철 지붕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부터 홍수와 천둥, 번개, 햇빛, 달, 강, 숲, 전쟁의 무서운 위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신의 존재를 느낄 정도로 그들은 신을 두려워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상의 신이라고 믿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권력과 위엄이 부여되겠는가? 파라오는 우리가 지금 이집트라고 부르는 북아프리카 땅을 30왕도가 넘는 일련의 왕조를 통해 약 3천 년 동안 통치했다.

파라오는 전능했다. 파라오의 백성들은 파라오를 위해 궁전과 사원, 무덤의 형태도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건물들을 지었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피라미드는 기원전 2566년에 죽은 쿠푸라는 초기 파라오의 무덤으로 지은 것이다. 

현대 전문가들은 아직도어떻게 그렇게 거대한 돌덩어리를 그렇게 많이 깎아서 운반하고 끌어올렸는지, 어떻게 주변의 모든 자연적인 것에 맞서 평평한 모래사막에서 그렇게 높은 건물을 쌓아올렸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이런 지배력은 전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파라오의 비위를 잘 맞추면 파라오가 함께 데려살 수도 있어, 파라오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평화롭고 목가적인 곳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피조물보다도 특별하고 중요해 불멸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까?

약 6천 년 전부터 자연은 이런 큰 꿈을 가진 전능한 인간 통치자들에게 강과 어떤 극적인 기후 변화의 형태로 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강과 기후 변화는 아프리카의 북동쪽 끝을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하고 가장 보호받는 땅 가운데 하나로 탈바꿈시켰다. 길가메시가 등장하고 나일 강 유역에도 크고 작은 도시들이 생겨났고 ‘고왕국’이라고 부그는 시대의 파라오들은 이미 권력의 절정기에 있었다.

2. 문명의 시작

예전에는 이집트를 위대하게 만든 것 가운데 많은 것이 교역의 형태로 홍해를 가로질러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자와 날싸, 공예술, 과학기술은 물론 문자까지도 말이다. 

그렇지만 요즘은 역사가들이 그렇게 확신하지 못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문명을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바다 건너에서 빌려와 자기들에게 맞게 고치기만 했을까, 아니면 독자적으로 스스로 발전시켰을까? 교역과 교환은 파라오가 처음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집트 문명이 이전의 어떤 문명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서도록 한 것은 그들의 강과 주변 환경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강들과 달리 나일 강은 1년에 한 번씩 범람한다. 7월부터 9월까지 에티오피아 산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빗물에 강둑이 무너지면서 주변의 드넓은 땅이 물에 잠긴다. 그리고 범람한 물은 영양이 풍부한 신선한 흙과 퇴적물을 실어와 농작물을 기르기에 아주 좋은 토양을 만든다. 해마다 저절로 영양분이 공급되고 새로운 빗물이 흘러들어와 이곳은 소금에 중독될 위험이 없었다.

1만1천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난 뒤 북아프리카는 완만하게 경사진 초원에서 나무와 풀들이 점점이 자라는 푸른 신록의 땅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사냥과 채집을 하던 부족들이 나일 강 유역에 정착해 작은 마을과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사바나에서 풀을 뜯는 야생 소와 염소, 양을 길들일 줄 알게 되었고, 이것들은 많은 젖과 털, 가죽을 공급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과 보리, 포도, 아마 같은 것을 기르는 지식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들어왔고, 육로를 통해 나투프 사람들에게서도 유입되었다. 이 강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풍부하고 강력한 문명으로 성장하기에 딱 좋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3. 문명의 정착

이들에게는 유리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약 6천 년 전부터 나일 강 상류에 있는 땅이 메마르기 시작했다. 지구 축의 주기적 변화로 강우 패턴이 달라진 탓도 있었고, 사람들이 농작물을 재배하고 낙타 같은 동물을 떼로 몰고 다니면서 길러 자연적으로 수위가 낮아진 탓도 있었다. 약 4천 년 전 한때는 풍부하게 흐르는 강물에서 뒹구는 악어와 하마로 가득 찼던 곳이 건조한 땅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하라 사막이 되었다.

강우 패턴의 변화는 인간의 역사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잠식해 들어오는 사막이 이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사막이 거의 어떤 침략자도 뚫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이나 탑, 성, 정교한 군사시설이 필요 없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고대 이집트를 침략하려면 몇 백 마일이나 펼쳐진 불모의 사막을 가로질러 오거나 바다로 와야 했지만, 바닷길도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에 펼쳐진 갈대 많은 습지대가 천연 방패막이가 되어 역시 도전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런 천연 방벽 덕분에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비교적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 거의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들만의 생활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4. 통치의 시작

나일 강은 또 다른 선물도 가져왔다. 이 선물은 왜 여기서 그런 막강한 통치자들이 나와 스스로 신이라고 칭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일 강은 쌍방향 도로가 되어 이 나라를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대부분의 수계는 하류를 향해 내려가는 길로만 쓸 수 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은 흙길로 해서 배를 상류로 끌고 가거나 강물의 흐름에 맞서 노를 저어 가야 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은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 못지않게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각 판의 배열상 이집트에서는 유세풍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어 강이 흐르는 방향과 정반대다. 그래서 하류로 내력갈 때는 배가 그냥 떠 있기만 해도 되고 돌아갈 때는 돛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잘 보호되는 비옥한 땅과 항해하기 쉬운 쌍방향 수계보다 왕국을 통제하기에 좋은 것이 있을까? 지구상 어디에도 5천 년 전의 고대 이집트처럼 많은 천혜의 자연 요소가 인간 문명의 발전을 도운 곳은 없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기원전 3150년경에 메네스라는 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했다고 한다. 그는 3천 년 동안 지속된 파라오 통치 시대를 열었고, 그동안 이집트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변함이 없었다. 나일 강 유역이 통일된 뒤에 기원전 2200년경까지 약 800년 동안 지속된 초기 왕조 시대와 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은 전국을 42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마다 통치자를 둠으로써 전국을 금방 장악할 수 있었다. 

왕이 임명한 지역 통치자들은 사람들에게 돈이 아니라 식량으로 세금을 내도록 해 중앙에 있는 창고에 쌓아두고, 흉작이 왔을 때 사람들을 구제했다. 흉작이 왔을 때 유일하게 믿을 사람이 통치자밖에 없다면 통치자를 신처럼 숭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파라오는 이 모든 식량을 쌓아둘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거대한 곡물 창고를 짓도록 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파라오를 지상에서 사는 신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영혼이 편히 다음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5. 피라미드의 건축

파라오와 그의 가족 또는 친구가 죽으면 처음에는 피라미드의 형태로 아주 어마어마한 무덤을 지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오늘날의 카이로 남쪽에 있는 기자라는 곳에 있었다. 고왕국 시대에 피라미드가 100개 넘게 세워졌지만, 이 거대한 구조물이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파라오 쿠푸가 지은 것이다. 

이 피라미드는 짓는 데 23년이 걸렸고, 10만 명이 넘는 노예와 농부의 노동이 들어갔다. 이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는 원래 새하얀 석회암에 덮여 있고, 꼭대기에는 금이 씌워져 있었다. 이 기념비적인 거대한 건축물의 목적은 파라오의 몸을 넣어두는 영원한 구조물을 만들어 파라오가 내세에서 그의 몸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의 몸은 수세대에 걸쳐 습득한 미라 만드는 과정을 이용해 보존했고, 그 과정을 모두 마치는 데 일반적으로 70일이 걸렸다. 중요한 사람의 무덤에는 우샤브티라고 하는 한 팀의 하인들을 넣었다. 우샤브티는 나무로 조각하기도 하고 준보석에 해당하는 귀한 돌로 조각하기도 하는 인형이었다. 어떤 무덤에서는 인형이 400개나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영혼이 내세에서 농사짓는 것을 도우려고 낫과 괭이, 쟁기를 들고 있었다. 

<사자의 서>에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가장 신성한 믿음 가운데 많은 것이 담겼다. 이것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쓴 주문과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그런 주문과 이야기에는 보통 현세의 장면과 내세의 장면이 삽화로 그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주문을 무덤안에 넣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하 세계에서 만나는 위험한 일들을 무사히 통과해 행복한 사후 세계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우리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은 피라미드와 무덤의 방 벽에 새긴 글과 그림, 그리고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보존된 글과 그림 덕분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상형문자라는 문자를 이용해 새겼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벽에 새기고 파피루스에 쓴 것들이 아주 많이 살아남아, 지금 전 세계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6. 투당카멘 묘실

1922년 영국 고고학자가 우연히 투탕카멘이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의 묘실을 찾게 되었다. 투탕카멘은 겨우 열아홉 살 정도밖에 안 되었을 때 죽었는데, 이 어린 통치자가 사냥을 하다 다리가 부러진 뒤 괴저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우리의 이집트 문명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방에는 엄청나게 많은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라가 된 소년 왕의 머리에 묶여 있었다. 순금으로 만든 그의 장례용 가면이었다.

그런 부유하고 강력한 집권층이 있는 문명에는 그들을 위해 물건을 만들거나 봉사를 하고 전문적 조언을 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간계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탄생했다. 1904년에 이탈리아 고고학자 에르네스토 스키아파렐리는 테베 바로 서쪽에 있는 왕들의 계곡과 가까운 데이르 알-메디나에서 그런 장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그들의 집과 도구의 잔해들과 함께 통째로 발견했다.

같은 곳에서 고고학자들은 가장 유명한 이집트 왕비 가운데 하나인 테페르타리의 무덤도 발견했다. 네페르타라는 기원전 1300년부터 1250년까지 살았고, 파라오 람세스 대제와 결혼했다. 람세스 1세는 아내가 여덟 명이나 되었지만, 틀림없이 네페르타리를 총애했을 것이다.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왕비들의 계곡에서 발견된 무덤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네페르타리는 생전에 여신으로 지위가 격상되었을 정도로 왕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네페르타리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고대 이집트에는 절대왕권이 발달했지만 그것이 남녀 사이의 불평등한 권리에 토대를 둔 사회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성은 법 앞에서 남성과 평등했다. 왕권도 모계 쪽 상속자만 물려받을 수 있었고, 모계제로 불리는 이러한 원칙은 훗날 전 세계에서 많은 군주제를 세우는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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