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

어떻게 어떤 통치자들은 자연의 너그러움 덕분에 백성들의 눈에 살아 있는 신으로 여겨져 살아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더할 나위 없는 복종과 완벽한 헌신, 절대적 보호를 받게 되었을까?

1. 파라오 왕조

사냥하고 채집하며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샤먼은 땅과 하늘, 짐승과 숲의 정령들과 신들을 공경하고 숭배했지만. 이들이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한 흔적은 없다. 오히려 하늘의 양철 지붕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부터 홍수와 천둥, 번개, 햇빛, 달, 강, 숲, 전쟁의 무서운 위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신의 존재를 느낄 정도로 그들은 신을 두려워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상의 신이라고 믿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권력과 위엄이 부여되겠는가? 파라오는 우리가 지금 이집트라고 부르는 북아프리카 땅을 30왕도가 넘는 일련의 왕조를 통해 약 3천 년 동안 통치했다.

파라오는 전능했다. 파라오의 백성들은 파라오를 위해 궁전과 사원, 무덤의 형태도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건물들을 지었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피라미드는 기원전 2566년에 죽은 쿠푸라는 초기 파라오의 무덤으로 지은 것이다. 

현대 전문가들은 아직도어떻게 그렇게 거대한 돌덩어리를 그렇게 많이 깎아서 운반하고 끌어올렸는지, 어떻게 주변의 모든 자연적인 것에 맞서 평평한 모래사막에서 그렇게 높은 건물을 쌓아올렸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이런 지배력은 전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파라오의 비위를 잘 맞추면 파라오가 함께 데려살 수도 있어, 파라오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평화롭고 목가적인 곳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피조물보다도 특별하고 중요해 불멸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까?

약 6천 년 전부터 자연은 이런 큰 꿈을 가진 전능한 인간 통치자들에게 강과 어떤 극적인 기후 변화의 형태로 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강과 기후 변화는 아프리카의 북동쪽 끝을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하고 가장 보호받는 땅 가운데 하나로 탈바꿈시켰다. 길가메시가 등장하고 나일 강 유역에도 크고 작은 도시들이 생겨났고 ‘고왕국’이라고 부그는 시대의 파라오들은 이미 권력의 절정기에 있었다.

2. 문명의 시작

예전에는 이집트를 위대하게 만든 것 가운데 많은 것이 교역의 형태로 홍해를 가로질러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자와 날싸, 공예술, 과학기술은 물론 문자까지도 말이다. 

그렇지만 요즘은 역사가들이 그렇게 확신하지 못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문명을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바다 건너에서 빌려와 자기들에게 맞게 고치기만 했을까, 아니면 독자적으로 스스로 발전시켰을까? 교역과 교환은 파라오가 처음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집트 문명이 이전의 어떤 문명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서도록 한 것은 그들의 강과 주변 환경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강들과 달리 나일 강은 1년에 한 번씩 범람한다. 7월부터 9월까지 에티오피아 산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빗물에 강둑이 무너지면서 주변의 드넓은 땅이 물에 잠긴다. 그리고 범람한 물은 영양이 풍부한 신선한 흙과 퇴적물을 실어와 농작물을 기르기에 아주 좋은 토양을 만든다. 해마다 저절로 영양분이 공급되고 새로운 빗물이 흘러들어와 이곳은 소금에 중독될 위험이 없었다.

1만1천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난 뒤 북아프리카는 완만하게 경사진 초원에서 나무와 풀들이 점점이 자라는 푸른 신록의 땅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사냥과 채집을 하던 부족들이 나일 강 유역에 정착해 작은 마을과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사바나에서 풀을 뜯는 야생 소와 염소, 양을 길들일 줄 알게 되었고, 이것들은 많은 젖과 털, 가죽을 공급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과 보리, 포도, 아마 같은 것을 기르는 지식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들어왔고, 육로를 통해 나투프 사람들에게서도 유입되었다. 이 강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풍부하고 강력한 문명으로 성장하기에 딱 좋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3. 문명의 정착

이들에게는 유리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약 6천 년 전부터 나일 강 상류에 있는 땅이 메마르기 시작했다. 지구 축의 주기적 변화로 강우 패턴이 달라진 탓도 있었고, 사람들이 농작물을 재배하고 낙타 같은 동물을 떼로 몰고 다니면서 길러 자연적으로 수위가 낮아진 탓도 있었다. 약 4천 년 전 한때는 풍부하게 흐르는 강물에서 뒹구는 악어와 하마로 가득 찼던 곳이 건조한 땅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하라 사막이 되었다.

강우 패턴의 변화는 인간의 역사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잠식해 들어오는 사막이 이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사막이 거의 어떤 침략자도 뚫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이나 탑, 성, 정교한 군사시설이 필요 없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고대 이집트를 침략하려면 몇 백 마일이나 펼쳐진 불모의 사막을 가로질러 오거나 바다로 와야 했지만, 바닷길도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에 펼쳐진 갈대 많은 습지대가 천연 방패막이가 되어 역시 도전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런 천연 방벽 덕분에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비교적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 거의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들만의 생활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4. 통치의 시작

나일 강은 또 다른 선물도 가져왔다. 이 선물은 왜 여기서 그런 막강한 통치자들이 나와 스스로 신이라고 칭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일 강은 쌍방향 도로가 되어 이 나라를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대부분의 수계는 하류를 향해 내려가는 길로만 쓸 수 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은 흙길로 해서 배를 상류로 끌고 가거나 강물의 흐름에 맞서 노를 저어 가야 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은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 못지않게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각 판의 배열상 이집트에서는 유세풍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어 강이 흐르는 방향과 정반대다. 그래서 하류로 내력갈 때는 배가 그냥 떠 있기만 해도 되고 돌아갈 때는 돛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잘 보호되는 비옥한 땅과 항해하기 쉬운 쌍방향 수계보다 왕국을 통제하기에 좋은 것이 있을까? 지구상 어디에도 5천 년 전의 고대 이집트처럼 많은 천혜의 자연 요소가 인간 문명의 발전을 도운 곳은 없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기원전 3150년경에 메네스라는 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했다고 한다. 그는 3천 년 동안 지속된 파라오 통치 시대를 열었고, 그동안 이집트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변함이 없었다. 나일 강 유역이 통일된 뒤에 기원전 2200년경까지 약 800년 동안 지속된 초기 왕조 시대와 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은 전국을 42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마다 통치자를 둠으로써 전국을 금방 장악할 수 있었다. 

왕이 임명한 지역 통치자들은 사람들에게 돈이 아니라 식량으로 세금을 내도록 해 중앙에 있는 창고에 쌓아두고, 흉작이 왔을 때 사람들을 구제했다. 흉작이 왔을 때 유일하게 믿을 사람이 통치자밖에 없다면 통치자를 신처럼 숭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파라오는 이 모든 식량을 쌓아둘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거대한 곡물 창고를 짓도록 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파라오를 지상에서 사는 신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영혼이 편히 다음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5. 피라미드의 건축

파라오와 그의 가족 또는 친구가 죽으면 처음에는 피라미드의 형태로 아주 어마어마한 무덤을 지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오늘날의 카이로 남쪽에 있는 기자라는 곳에 있었다. 고왕국 시대에 피라미드가 100개 넘게 세워졌지만, 이 거대한 구조물이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파라오 쿠푸가 지은 것이다. 

이 피라미드는 짓는 데 23년이 걸렸고, 10만 명이 넘는 노예와 농부의 노동이 들어갔다. 이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는 원래 새하얀 석회암에 덮여 있고, 꼭대기에는 금이 씌워져 있었다. 이 기념비적인 거대한 건축물의 목적은 파라오의 몸을 넣어두는 영원한 구조물을 만들어 파라오가 내세에서 그의 몸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의 몸은 수세대에 걸쳐 습득한 미라 만드는 과정을 이용해 보존했고, 그 과정을 모두 마치는 데 일반적으로 70일이 걸렸다. 중요한 사람의 무덤에는 우샤브티라고 하는 한 팀의 하인들을 넣었다. 우샤브티는 나무로 조각하기도 하고 준보석에 해당하는 귀한 돌로 조각하기도 하는 인형이었다. 어떤 무덤에서는 인형이 400개나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영혼이 내세에서 농사짓는 것을 도우려고 낫과 괭이, 쟁기를 들고 있었다. 

<사자의 서>에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가장 신성한 믿음 가운데 많은 것이 담겼다. 이것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쓴 주문과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그런 주문과 이야기에는 보통 현세의 장면과 내세의 장면이 삽화로 그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주문을 무덤안에 넣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하 세계에서 만나는 위험한 일들을 무사히 통과해 행복한 사후 세계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우리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은 피라미드와 무덤의 방 벽에 새긴 글과 그림, 그리고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보존된 글과 그림 덕분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상형문자라는 문자를 이용해 새겼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벽에 새기고 파피루스에 쓴 것들이 아주 많이 살아남아, 지금 전 세계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6. 투당카멘 묘실

1922년 영국 고고학자가 우연히 투탕카멘이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의 묘실을 찾게 되었다. 투탕카멘은 겨우 열아홉 살 정도밖에 안 되었을 때 죽었는데, 이 어린 통치자가 사냥을 하다 다리가 부러진 뒤 괴저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우리의 이집트 문명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방에는 엄청나게 많은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라가 된 소년 왕의 머리에 묶여 있었다. 순금으로 만든 그의 장례용 가면이었다.

그런 부유하고 강력한 집권층이 있는 문명에는 그들을 위해 물건을 만들거나 봉사를 하고 전문적 조언을 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간계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탄생했다. 1904년에 이탈리아 고고학자 에르네스토 스키아파렐리는 테베 바로 서쪽에 있는 왕들의 계곡과 가까운 데이르 알-메디나에서 그런 장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그들의 집과 도구의 잔해들과 함께 통째로 발견했다.

같은 곳에서 고고학자들은 가장 유명한 이집트 왕비 가운데 하나인 테페르타리의 무덤도 발견했다. 네페르타라는 기원전 1300년부터 1250년까지 살았고, 파라오 람세스 대제와 결혼했다. 람세스 1세는 아내가 여덟 명이나 되었지만, 틀림없이 네페르타리를 총애했을 것이다.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왕비들의 계곡에서 발견된 무덤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네페르타리는 생전에 여신으로 지위가 격상되었을 정도로 왕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네페르타리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고대 이집트에는 절대왕권이 발달했지만 그것이 남녀 사이의 불평등한 권리에 토대를 둔 사회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성은 법 앞에서 남성과 평등했다. 왕권도 모계 쪽 상속자만 물려받을 수 있었고, 모계제로 불리는 이러한 원칙은 훗날 전 세계에서 많은 군주제를 세우는 초석이 되었다.

문명의 발전

나투프 사람들이 식물과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뒤에 큰 강 유역에서 거대한 인류 문명이 나타났다. 바빌론의 태양신 샤마시가 함무라비 왕에게 법을 구술한다. 282개의 법조문으로 이루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론 시내 중심에 세운 2.25미터의 석판에 새겨져 있어 누구나 볼 수 있었다.

1. 기록의 시작

니네베 유적지에서 발굴된 가장 유명한 점토판은 길가메시라는 수메르의 초기 왕의 모험을 이야기해주는 점토판일 것이다. 길가메시는 수메르에 생긴 최초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우루크라는 도시를 다스렸는데, 우루크는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서 유프라테스 강 동안에 있었다.

우루크는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는 8만 명에 이르러,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길가메시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려고 일련의 성벽을 두껍고 높게 쌓아올렸다. 최근에 독일 고고학자 팀이 발굴한 것을 보면 우루크에 살던 사람들은 성벽 안에 복잡하게 연결된 운하도 팠다. 우루크는 고대의 베네치아 같았고, 신에게 바친 일련의 신전이 있었다.

길가메시는 우루크의 다섯 번째 왕이었고, 기원전 2650년경에 다스렸다.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 사람 모두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로 일련의 신화와 전설은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행동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러나 처음에는 좋은 왕이 아니어서 신들이 온 몸에 털이 덮인 야수 같은 엔키두라는 사람을 만들어 길가메시와 싸우게 했지만, 사람들이 야생 동물을 길들일 줄 알게 되었듯이 길가메시도 엔키두를 길들일 수 있었고, 두 사람은 곧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많은 모험을 했다. 

엔키두가 죽자 길가메시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영원히 살고 싶지만 자신도 결국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야기가 끝날 때는 길가메시가 인상적인 성벽과 멋진 신전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전설의 일부는 이후 문명에서 발견되는 이야기들에도 나와, 언어와 문자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야기도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 글을 쓰는 기술이 생기자 기록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2. 종교의 시작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이야기들은 수메르 사람들의 세계관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그것들은 종교적 믿음이 존재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주는 문자로 된 증거를 제공한다.

길가메시는 인간은 모두 신의 종일 뿐임을 깨닫는다. 신은 사람들에게 왜 홍수와 가뭄, 침입 같은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모든 인간 문명의 공통된 특징은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거나 자신의 힘을 증강시키기 위해 자연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도시에 신전을 지어 신전마다 각각 다른 신에게 바침으로써 그러려고 했다. 신들이 사랑에서부터 전쟁과 풍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신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표시하려고 포도주나 기름 항아리 두껑에 점토로 봉인한 것에서도 고대 수메르인의 종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봉인이 신비한 힘이 있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고 믿었고, 그것을 신의 그림으로 장식해 신의 보호까지 받으려고 했다.

수메르 사람들은 해마다 새해 첫날에 신들이 만나 그 해에 어떤 운명적인 일들이 일어날지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결정은 가뭄과 홍수 같은 온갖 형태의 재앙도 가져왔지만 풍작과 군사적 승리 같은 예기치 못한 행운도 가져다 주었다.

3. 문명화의 시작

수메르 사람들은 하늘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지구라트라는 탑을 세웠다. 지구라트는 햇볕에 구운 점토 벽돌로 지은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탑 꼭대기는 모두 평평했고, 여기에 수메르 사람들은 사원이나 신전을 지어 신에게 바쳤다. 지구라트는 신이 사는 곳이라고 믿어 그 안에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32개가량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이 이라크에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있었고, 마르두크라는 신에게 바친 것이었는데,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도 원래 여기서 착안되었을지도 모른다.

수메르 사람들은 놀라운 수학자들이기도 했다. 레이어드가 발견한 점토판 중에는 이들이 복합한 산술을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으며, 이들은 수직으로 내려 그은 선과 V자 형태를 여러 가지로 조합해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나타냈다.

수메르 사람들은 60을 기반으로 한 수학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60을 나누는 방식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오늘날의 숫자처럼 왼쪽에 있는 숫자가 그 다음에 오는 숫자보다 높은 값을 갖는 ‘진정한 자릿수’ 체계도 사용했다.

이들은 수학과 천문학에서도 천재적이었지만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솜씨도 아주 뛰어났다. 학자들은 이들이 바퀴를 발명했다고 믿는다. 얼마 뒤 수레와 마차도 발명되었지만, 이들이 발명한 바퀴는 수레나 마차에 쓰는 바퀴가 아니라 항아리를 만들 때 쓰는 돌림판이었다. 

그러나 바퀴가 물건을 실어 나르는 장치로 개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만들어진 수레를 끄는 데는 나귀가 쓰였고, 나중에 통 바퀴가 바퀴살이 있는 바퀴로 대체되었다. 이 바퀴는 훨씬 많은 무게를 실어 나를 수 있어, 마차를 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4. 교역의 시작

그러나 이때는 도로가 거의 없어 수레로 여행하는 것이 배로 가는 것만큼 편리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들의 정착지를 바다와 이어주는 강을 이용했다. 수메르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가지 유형의 배를 설계했다. 

어떤 배들은 동물 가죽과 갈대로 만들었고, 어떤 배들은 털을 꼬아서 이어붙이고 역청을 발라 방수를 하고 나무로 노를 만들어 저었다. 배는 먼 곳에서 이들처럼 정착하기 시작해 도시와 문명을 이룬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교역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바퀴에서 문자까지 수메르 사람들의 과학기술은 머지않아 배로 갈 수 있는 세계 전체로 퍼졌다.

수메르의 장인들은 금과 은, 구리 같은 부드러운 금속으로 귀중한 물건을 만들었다. 1930년대에 영국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우르의 왕실 공동묘지에서 1800기가 넘는 무덤을 발굴했다. 한 무덤에서는 어떤 고대의 보물보다도 화려하고 값비싼 보물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르의 여왕 푸아비의 무덤으로, 기원전 2500년경의 것이었다. 무덤에는 여왕과 함께 병사 다섯 명과 시녀 스물세 명이 묻혀 있었다. 이들은 내세에서도 계속 여왕의 시중을 들도록 독살당한 사람들이었다. 

울리는 이들과 함께 정말 아름답고 멋진 보물더미를 발견했는데, 금박으로 만든 머리 장식과 금에 덮인 수염 달린 황소 머리가 있는 화려한 리라, 금으로 만든 식기류, 은으로 만든 사자 머리로 장식된 마차, 많은 금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이었다. 

5. 함무라비 법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생긴 우루크와 우르 같은 수메르의 도시들은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했다. 누가 죽은 사람의 땅과 재산을 물려받아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사냥과 채집을 하는 사회에는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고, 아무도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짓고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관개 용수로를 팠다. 따라서, 누가 죽은 사람의 땅과 재산을 물려받아야 하는지가 아주 큰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분쟁은 가족간의 싸움이나 집단간 싸움으로 비화했고, 그것이 치열해지면 도시와 도시의 전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문자의 발명으로 강력한 통치자는 문서로 된 일련의 칙령과 법령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었고, 그것을 처벌의 위협으로 뒷받침했다. 문자가 발명된 덕분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폭력을 쓰지 않고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바빌론은 기원전 1900년경에 득세하기 시작했다. 함무라비는 기원전 1810년부터 1750년까지 살았고, 그가 제정한 법이 바빌론을 탈바꿈시키고 안정시킨 덕분에 바빌론은 메소코타미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가 되었다. 함무라비는 자신이 만든 법을 돌에 새겨 바꿀 수 없도록 했다.

함무라비의 법은 다른 문명에서도 모방해, 오늘 날에도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정의의 토대가 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6. 문명의 확장

만일 아무도 법조문의 읽지 못한다면 법은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법에 의한 통치를 하려면 교육에 더욱 힘써야 했다. 도시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우도록 했다. 

모든 인간 문명처럼 아주 기발하고 독창적이었던 수메르 사람들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의 쇠퇴와 몰락을 가져온 것은 전쟁과 침입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붙박고 살다가 수대에 걸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농사를 짓자 기름졌던 땅이 갈수록 황폐해졌다. 

그들의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였다. 막강한 아시리아 왕 사르곤 대제는 아카드를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제국 가운데 하나를 세웠다. 유프라테스 강 어귀에서 수백 마일 상류에 자리 잡은 아카드는 아직 땅이 비옥하고 기름졌다. 수메르 남부에 있는 도시들이 쇠락해 사르곤에게 정복당하면서 사르곤의 영토는 더 거대해졌다. 

고대 중동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빙하기가 끝나고 오랫동안 습한 날씨가 계속되었던 시기가 끝나 그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 땅이 메말라갔고 우리가 아는 사막으로 변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수메르의 도시들이 거의 모두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문자 체계를 발전시킨 수메르 문명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록된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지식을 이부분에서 저 부분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착오 없이 전할 수 있었다. 문자는 인간이 처음 인위적 세계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데 이바지한 가장 강력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였다. 

문자의 발견

글을 쓰는 기술이 어떻게 상인과 통치자, 장인, 농부, 사제가 최초로 인간 문명을 일군, ‘역사’로 알려진 시대를 가져왔을까?

1. 기록의 시작

역사시대와 선사시대의 차이는 한마디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글을 씀으로써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다른 세대에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을 쓰면서 이른바 ‘기록된 역사’라는 것이 시작되었고, 그 전의 모든 것을 우리는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물론 글을 쓰기 전에도 이미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졋다. 때로 글로 써서 남기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정확하게 전달되기 힘들어 환상이나 신화로 둔갑하곤 한다.

이야기가 제대로 분석되고 정확하게 해석되도록 하려면 글로 써서 남겨야 하고, 그래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록된’ 역사는 처음 글을 쓰면서 시작되었고, 그런 일은 중동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문명들에서 약 5천 년 전에 일어났다. 

아마 문자가 없었다면 인간의 문명과 제국이 살아남기는커녕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자 덕분에 통치자들은 멀리서도 지워지지 않도록 새긴 칙병과 법, 군령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2.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는 오늘날의 이라크 중심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멀리 페르시아 만까지 뻗어 있었으며, 페르시아 만에서 인도양과 연결되었다. 수메르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새로운 욕구가 인위적 세계를 건설하는 쪽으로 확장되어 처음으로 도시와 국가가 나타난 지역들 가운데 하나다. 

수메르는 초기에 정착한 인간 공동체가 살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1만 년 전에는 해수면이 낮았던 지점에서 거의 130미터나 올라가 세계적으로 이 지역의 기후가 습해진 덕분에 지금보다 농작물 기르기가 훨씬 좋았다. 기온이 올라가고 강우량이 줄어 중동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래투성이의 불모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약 5천 년 전부터다.

습한 기후는 겨울에도 비가 와야 하는 밀과 보리, 포도 같은 농작물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이 지역의 산비탈과 산허리에서는 가축으로 길들이기에 딱 좋은 양과 염소, 소 같은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이런 동물들은 식량은 물론, 쟁기와 수레를 끄는 힘으로도 쓰고, 옷과 술.기름 등을 넣는 가죽 주머니, 가죽 제품을 만드는 재료로도 쓸 수 있었다.

고대에 최초로 수메르 도시가 나타난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에 인간이 만든 관개용수로와 배수로, 저수지, 댐 같은 시설을 통해 근처에 있는 땅에 물을 공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은 일부러 논밭에 강물이 범람하게 해, 자기들이 인위적으로 선택한 농작물이 풍작을 이루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 수 있었다. 

3. 문명의 발달

중동에서는 수메르 외에도 두 개의 고대 문명이 큰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하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일 강 유역에서 발생했고, 하나는 이스라엘의 요르단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글자는 초기 인간 문명이 얼마나 발달된 문명이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다.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그곳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굳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장사꾼이었고 또한 일부는 교역을 해도 좋을 만한 것을 만드는 장인이었다는 말이다. 

문자 언어는 식량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익히고 사람들 사이에 일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문명의 전형적 특징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식량을 채집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장인의 솜씨나 장사하는 솜씨를 발휘하는 문명 말이다.

4. 고대 문자의 발견

1845년 페르시아에서 이상하게 생긴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빽빽이 새겨져 있는 석판에 덮인 고대 궁전의 성벽이 발견됐다. 이것은 오래된 낙서 같은 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단순한 왕궁이 아니었다. 몇 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그곳에서 궁전 두 채와 큰 왕실 도서관이 발굴되었고, 알고 보니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니네베라는 고대 도시의 잔해였다. 

도서관은 기원전 627년에 죽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바니팔이 지은 것이었다. 위대한 왕이었던 아슈르바니팔은 학자이자 열렬한 수집가였다. 그 시대의 다른 왕들과 달리 아슈르바니팔은 읽고 쓸 줄 알았고,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레이어드와 그의 팀은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서 점토판을 무려 2만 점이나 발굴했다. 그 중에는 왕의 명단과 역사, 종교적인 글도 있고, 수학과 천문학 논문, 계약서, 법률 문서, 칙령과 칙서도 있었다. 이것들은 고대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제공했고, 언제 어디서 최초의 문명이 발생했고 그것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물론 이 귀중한 점토판으로부터 유익한 정보를 얻으려면 먼저 점토판에 있는 텍스트를 읽는 법을 알아내야 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레이어드와 그의 팀이 니네베에서 점토판을 발굴하고 있을 즈음에 페르시아에서 복무하던 한 영국군 장교가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을 했다. 설형문자 읽는 법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발견이었다.

5. 고대 문자의 해석

현재 영국박물관에 있는 로제타석 1799년에 이집트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발견한 유명한 돌이다. 여기에는 같은 구절이 세 가지 언어로 쓰여 있는데, 그 가운데 둘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이고 하나는 고대 그리스어다. 

1822년에 프랑스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은 로제타석에 새겨진 문자를 해독했고, 이로써 상형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헨리 롤린슨이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지대에 있는 자그로스 산맥의 작은 산에서 발견한 것도 그것들 못지않게 놀라운 것이었다. 이라크의 바빌론에서 뻗어나온 고대의 길을 따라 늘어선 절벽 위에서 그는 바위에 새겨진 일련의 조각상을 발견했고, 그 조각상마다 밑에는 어떤 구절이 쓰여 있었다.

베히스툰 비문이라고 하는 이 조각들은 기원전 522년부터 485년까지 이 지역을 다스린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정복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로제타석과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도 세 가지 언어로 새겨져 있는데, 그것이 100미터 높이의 절벽에 있어 롤린슨의 발견 전에는 아무도 절벽에 새겨진 것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1835년에 롤린슨은 절벽에 올라가 탁본을 떴다. 그는 텍스트의 첫머리는 페르시아 왕의 명단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있는 명단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것을 단서로 삼아 롤린슨은 고대 설형문자로 쓴 글을 읽는 법을 알아냈고, 그의 노력 덕분에 그후 전문가들은 레이어드가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귀중한 점토판에 쓰여 있는 것들도 대부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착생활의 시작

어떻게 기후 변화로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한가지 예를 우리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불리는 곳에서 볼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상이집트에서 나일강을 따라 하이집트로 내려가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거쳐 북쪽으로는 터키 중부까지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거쳐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지역이다.

1. 정착 생활의 시작

나투프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레바논 근처에 있는 해안가에 정착했다. 바다에는 그들이 식량으로 쓸 물고기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더 올라가 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땅이 비옥하고 풀이 자랐다. 알고보니 그곳은 늘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원이 풍부했다. 

어떤 철에는 가젤 같은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어떤 철에는 작은 마을에 정착해서 살았다. 그들은 마을에서 진흙과 찰흙으로 둥근 오두막을 지어 일 년 내내 그곳에서 살거나 1년에 얼마 동안을 그곳에서 지냈다. 최근에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에서 나투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여러 곳 발견되어 발굴되었다.

그런데 자연이 변덕을 부렸다. 과학자들은 얼마 안 있어 그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기온이 지난 8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꾸준히 올라가지 않고 느닷없이 뚝 떨어져 다시 빙하기가 찾아왔다. 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세계의 대부분이 다시 꽁꽁 얼어버렸다. 갑자기 땅이 눈의 여왕의 사악한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 여왕의 주문이 약 1300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어린 드리아스기’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약 1만2700년 전에 일어났다. 우리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은 그린란드의 얼음 시추 시료에서 얻은 증거 덕분이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80만 년 전의 지구의 기온까지 추산해낸다.

지금 전문가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이 따뜻한 것은 멕시코 만류가 따뜻한 물을 유럽으로 실어 나르기 때문이며, 이 멕시코 만류는 아메리카 대륙의 북동 해안을 따라서 기류와 해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도록 하는 염도가 높은 바닷물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북아메리카 빙하에 갇혀 있던 담수가 흘러넘쳐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자 해수의 염도가 엄청나게 낮아져 멕시코 만류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거나 완전히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2. 곡식의 수확

이는 왜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기온이 그렇게 쑥 내려갔다 올라갔는지도 설명해줄 것이다. 약 1300년 후에는 다시 많은 양의 담수가 빙하에 갇히면서 지구의 기온이 10년 만에 자그마치 5도나 올라갔다. 북해의 염도가 증가해 멕시코 만류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그때까지 그렇게 급격한 기후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특히 유럽과 지중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가 사냥터가 범람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가뭄이 시작되어 그나마 남아 있던 울창하고 비옥한 삼림 지대가지 잡목이 우거진 메마른 땅으로 변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밀 같은 들풀이 나투프 사람들의 주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는데, 날씨가 뜨겁고 건조해지자 모두 시들어버렸다. 어떤 전문가들은 어쩌면 그래서 나투프 여자들이 실험 삼아 씨를 뿌리고, 땅을 미로가 보리, 호밀 같은 풀을 재배하기 좋게 일구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굶어죽을 상황에 처하자 여자들이 가장 크고 가장 달콤하고 가장 수확하기 좋은 씨를 골라서 저장해두었다가 다음해에 특별히 준비한 땅에 뿌렸다는 것이다. 나투프 여자들이 역사상 가장 먼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 같다. 나투프 사람들의 창의성은 현대 고고학자들이 곡물을 수확할 때 쓰는 곡괭이와 낫의 형태를 지닌 농기구를 발견함으로써 증명되었다. 

3. 동물 길들이기

고고학자들은 오늘날의 시리아에 있는 아부 후레이라라고 하는 나투프 사람들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을 공들여 면밀히 조사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을 보면 이곳에 가장 좋아 보이는 씨들만 골라서 뿌리는 방식으로 야생 곡물을 재배할 줄 아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식량이 되었던 들풀이 죽어버리자 살기 위해 가장 쉽게 자라는 씨를 뿌려 기르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씨가 발견된 곳을 보면 그들은 자연히 습기가 모이는 비탈에 씨를 뿌린 것 같다. 그러고는 잡초와 떨기나무가 접근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산비탈의 논다랑이와 비탈을 적극적으로 관리해 농작물이 최대한 좋은 결실을 맺도록 했다.

나투푸 사람들은 처음으로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얄려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은 고분고분한 늑대를 선택함으로서 마침내 집에서 기르는 개로 길들였다. 개는 가까운 지역에 사는 다른 동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생 양과 염소, 멧돼지, 말을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개의 도움으로 이런 야생 동물을 길들여 한 곳에 놓고 길러 고기과 젖을 얻기가 비교적 쉬웠다.

왜 어떤 동물들은 애완동물이 되거나 농장에서 평화롭게 사는데 어떤 동물들은 그렇지 않을까? 최근에 이런 동물들의 역사를 연구한 과학자들은 야생 동물이 가축으로 길들여지려면 최소한 세 가지 특성이 있어야 함을 발견했다. 

그것은 무리를 지어 살아야 하고, 체계적 사회 구조가 있는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고, 다른 종의 동물들과 풀을 뜯어먹는 영역을 공유해도 괜찮아야 한다는 것이다.

4. 또다른 선택

늑대와 야생 양, 야생 염소가 인간에게 선택적으로 번식되고 8천 년 전에는 여기에 돼지와 소가 합류했고, 약 6천 년 전에는 유럽과 극동을 잇는 유라시아 스텝에 있는 야생 풀밭과 숲에서 돌아다니던 당나귀와 말이 합류했다.

나투프 사람들은 개를 사랑했다. 사람과 개가 나란히 묻힌 무덤도 발견되었다. 나투프 사람들의 무덤들은 이들이 가축을 길럿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준다. 높은 유아 사망률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나투프 사람들의 무덤 가운데 3분의 1에는 여덟 살 미만의 아이들의 골격이 들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의 선택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자연히 이런 새로운 질병에 취약한 사람들은 쉽게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보다 죽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 세대가 지나면서 가축과 가까이 산 사람들은 가축이 퍼뜨리는 병에 대한 면역력이 강해졌다.

약 1만1400년 전에 어린 드리아스기가 끝나자 기후가 예전처럼 다시 온화해져 불과 몇 년만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 사람들은 온갖 초목이 자랄 수 있게 비가 충분히 오는 풍요로운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형태로 생존에 필요한 강력한 무기를 지니게 되었다. 가축과 씨는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5. 새로운 생활방식

기원전 9천 년경부터 새로운 영원한 정주민이 중동 전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신석기 시대‘ 농사꾼들은 이제 훨씬 큰 공동체에서 살 수 있었다. 농사를 지을 줄 알게 되고 가축을 길러 고기와 젖도 먹고 끄는 힘으로도 쓸 수 있게 되면서 창고에 먹을 것이 그득하게 쌓인 덕분이었다. 사냥과 채집이 일부에게는 과거의 전통이 되고 있었다.

예리코는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도시 가운데 하나다. 면적이 그 전에 나투프 사람들이 살았던 곳보다 여덟 배나 크고, 최초로 성벽을 두른 도시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발굴 결과 둥근 집들이 발견되었는데, 방이 하나 이상 있는 집들이 많았고, 요리와 빨래같은 것을 하는 개방된 공간도 있었다

이런 초기 건물들은 돌로 토대를 놓았고, 바닥에 자갈을 깔았으며, 진흙과 찰흙으로 만든 별돌로 벽돌로 벽을 쌓았다. 발견된 곳마다 돌이나 진흙으로 지어 식량과 곡물을 쌓아둔 창고가 있었는데, 이는 적어도 이 사람들에게는 돌아다니며 살던 날들이 이제는 오래된 과거였다는 분명한 증거다.

이들은 필요에 의해 자연을 자기들에게 맞게 바꿀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새로운 생활방식이 탄생했다.

6. 문화적 접촉

예리코의 서편에는 성벽이 쌓여 있었다. 한때는 이들을 시기하는 이웃들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믿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던 바다에서 느닷없이 밀려오는 진흙과 바닷물을 막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데 새롭게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 사람들이 떠오르는 다른 문화들과 접촉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흑요석은 화산의 용암이 급격히 식을 때 생기는 일종의 천연 유리다. 가장 날카롭고 가장 효과적인 화살촉을 만들 수 있어 사람들은 이것을 많이 찾았다.

터키 중앙에 있는 바위산에서는 흑요석이 자연히 생성되지만, 이것은 수백 마일 떨어진 신석기 시대의 예리코에서도 발견되었고, 이로부터 우리는 장거리 교역로가 이미 잘 닦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왜 이미 먹기 좋고 수확하기 좋게 만든 귀중한 씨앗을, 1천 년 이상 특별한 선택과 힘든 노동이 낳은 산물을 유리와 교환하지 않았겠는가? 한 곳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농사를 짓고 씨를 공급하고 가축을 기르는 방법이 유럽과 중동은 물론 그 너머까지 금세 널리 퍼졌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농경의 시작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해빙기가 찾아온 뒤에 인간이 어떻게 여러 가지 생존 기법을 실험하다가 역사상 최초로 진화 과정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도록 시도하게 되었을까?

1. 인위적 선택

인류가 족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식동물에 대한 무차별 살육이 인간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에 끼친 영향이 아직 다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인간의 운명과 지구의 생태계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엮을 또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약 1만2천 년 전부터 인류의 역사는 자연의 진화 과정을 제어해 자신의 요구에 맞게 바꾸려는 최초의 시도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먼저 동물을 인위적으로 번식시키고 특수한 식물, 즉 식량 작물을 집중적으로 기르는 농사의 시작으로 나타난다.

자연 선택은 수십억 년 동안 지구의 생물을 변화시켜, 단순한 단세포 미생물로부터 열매를 맺는 버섯에서 뛰는 쥐까지, 끈적끈적한 민달팽이에서 독을 분비하는 독사까지 온갖 다양한 생물을 만들어냈다. 이런 변화는 세대 간의 유전적 차이에서 왔고, 이런 유전적 차이는 끊임없이 변하는 지구의 많은 환경에서 종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그런데 약 1만2천 년 전에 인간이 처음으로 땅을 일구고 야생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과정을 중간에 가로챘다. 사람들이 오늘날 ‘인위적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이 야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표본을 선택해 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해서 기르고 번식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2. 정착생활

인위적 선택은 사람들이 정착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필요한 식량을 모두 한 곳에서 재배할 수 있어 한 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마을에서 살며 최초로 집을 짓기 시작했고, 마을이 커져 작은 도시가 되고, 작은 도시가 다시 커져 큰 도시가 되고, 큰 도시들이 모여 국가가 되고, 국가들이 모여 하나의 문명을 이루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정주민 생활양식이 탄생했고, 그러자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 지구의 풍경이 식량 생산에 맞게 재편성되었고, 현대의 질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의 질병은 거의 모두 인간이 가축과 가가이 살면서 생겼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식량 생산과 관련이 없는 직업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식량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충분히 먹여살릴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과거에 수렵채집을 했을 때보다 생산성이 열 배 이상 올라갔다.

농사를 지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어 사람들은 자식도 더 많이 낳을 수 있었다. 식량을 창고에 쌓아둘 수 있어, 잘하면 한 해 걸러 한 번씩 출산을 해도 되었다. 마을이나 작은 도시에 사니 주변에 어린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많아 가족의 규모를 늘려도 되었다.

3. 사회의 변화

마을과 소도시의 인구가 늘자 농사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장인이 될 수 있었다.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도자기와 보석, 옷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숙련된 노동자가 된 것이다. 이들은 유연한 소재로 바퀴와 마차, 갑옷 같은 것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도 탐구할 수 있었고, 땅에서 구리와 청동, 철의 형태로 그런 소재를 추출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상인이 나타나 장인들이 만든 제품과 잉여 농산물을 사고팔기 시작했다. 교역은 곧 여행과 배, 글쓰기, 셈하기, 화폐를 뜻했다. 식량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직업으로, 마을이나 소도시가 신의 뜻에 따라 잘 유지되고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들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는 역할도 생겼다. 이런 초기의 사제와 성자들은 세계의 주요 종교가 탄생하는 데 일조했다.

정착민의 수가 늘어나자 새로운 형태의 조직과 통제가 필요했다. 세계 최초의 황제가 나타났고, 이들과 더불어 세금을 걷고 법을 공표하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법을 집행하는 일을 하는 관료귀족도 나타났다. 

왕은 군대로 자신의 권력을 보호할 여유도 있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른 덕분에 이제는 창고에 쌓인 곡식으로 수많은 병력을 먹여살리고, 길들인 동물은 그 젖을 짜서 먹거나 잡아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짐수레를 끌거나 군인들을 전쟁터로 실어 나르는 데 쓸 수도 있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전쟁을 감행해 이런 새로운 도시 문화를 찬미하고 확장할 수도 있었다. 이런 도시 문화는 곧 고대 세계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4. 사냥과 농사의 공존

그런데 어떻게, 왜,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 농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을까? 한가지는 분명하다. 석기 시대에 어떤 똑똑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농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기르는 것이 인간에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일을 한 곳에서 한 번에 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어떤 역사책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마치 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말한다. 그것이 인류에게나 지구 전체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탓이다. 그래서 그것을 신석기 시대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이루어진 과정이었다. 비록 오늘날에는 전 세계 인구의 약 99.9퍼센트가 농업과 축산업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살지만 말이다.

인간의 생활방식이 돌아다니며 수렵과 채집을 하는 생활방식에서 정착해서 살며 농부들이 도시 생활자들을 부양하는 생활방식으로 바뀐 것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만큼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원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때는 사람들이 반이라도 수확을 해서 그들의 첫 번째 빵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야생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냥감도 많고 한 번 잘 잡으면 식구들이 일주일 내내 먹을 수도 있었던 사냥꾼의 편한 삶에 비하면 농사꾼의 삶은 힘들고 고되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바로 사냥을 해서 먹는 전통적 생활방식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5. 초기 농사

빵 한덩어리를 구워 먹으려고 해도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땅을 일구고 수확을 하는 고된 일들을 견뎌내야 했다. 인간이 처음 재배하기 시작한 보리와 밀, 호밀 같은 곡식의 낱알을 일일이 풀 더미 속에서 손으로 주워야 했고, 가장 원시적인 조리기구인 절구와 공이를 이용해 낟알을 빻아야 했다.

게다가 그런 낟알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 그대로 자란 것들이지 몇 세대에 걸친 인위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었다. 좋은 이유에서 자연은 그것들을 되도록 가볍게 만들었고,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멀리 날아가서 싹을 틔우고 번식할 수 있도록 줄기에도 느슨하게 붙어 있도록 했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하듯이, 줄기에서 쉽게 떨어지는 낟알은 식구의 빵을 책임지는 사람들에게는 악몽이다. 그런데 빵을 만들려면 이런 종류의 밀이 아주 많이 필요하고, 그것도 여기저기에 우수수 떨어진 낟알들을 허리가 휘도록 일일이 주워야 한다.

예측할 수 없고 달갑지 않으며 힘들기만 한 일, 이것이 1만2천 년 전에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초기 농부들의 골격은 그것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발가락은 비틀어지고, 무릎은 구부러져서 관절염에 걸려 있으며, 힘들게 낟알을 돌판 사이에 넣어 빻느라 허리가 완전히 기형이 된 경우도 있다.

야생 동물을 달래 원하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일은 더욱 쉽지 않았다. 수천 년에 걸친 유전자 조작은 달콤하고 풍부하며 수확하기 좋은 농작물과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한 가축을 낳았지만, 그때는 완전히 고투의 연속이었다.

6. 기후의 변화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제다. 1만2천 년 전에도 사람들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이유와 똑같은 이유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그것은 앞으로도 몇 세대 동안은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기후 변화였다.

가장 최근의 빙하기는 2만2천 년 전에 가장 추웠다. 그때는 많은 물이 북유럽의 많은 부분을 덮은 빙상에 갇혀 해수면이 오늘날보다 거의 130미터나 낮았다. 그때는 영국 해협도 없고 흑해도 없고 지중해도 낮은 평지였다. 지금 베링 해협이 있는 곳에는 베링지아라는 땅이 얼음에 덮인 툰드라 지대로 알래스카와 러시아 사이에 뻗어 있어, 인간과 동물이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중요한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뱃길에 된 홍해가 그냥 평평한 육로였다. 그런데 수천 년에 걸쳐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변이 올라가 전 세계에서 대대적인 범람이 일어났다.

해빙기에 지구의 기온이 섭씨 6도 이상 올라갔고, 아마 이것은 지구의 자전에서 일어나는 주기적 변화 탓이었을 것이다. 해빙기는 약 1만4천 년 전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때는 거대한 빙붕이 무너져 바닷물에 녹으면서 해수면이 500년 만에 25미터나 올라갔다. 

약 8천 년 전에는 해빙기가 대부분 끝나 해수면이 거의 현재와 같은 수준이 되었다. 영국 해협은 마지막으로 범람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이로 인해 영국은 10만 년 남짓 만에 처음으로 유럽대륙과 분리되었다.

이런 자연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생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인류에게는 그로 인해 전통적 사냥터였던 많은 곳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강우 패턴과 날씨 체계가 급속히 변하면서 한때는 사냥하고 채집하기에 좋은 풍요로운 숲이었던 지역들이 메마른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큰 포유류의 멸종

어떻게 현생인류와 기후 변화가 우연히도 동시에 생태계의 균형을 교란시켜 큰 동물의 대량 멸종을 낳았을까? 그 대량 멸종은 처음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음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났다.

1. 기후 변화

지난 300만 년 동안 저 북극과 남극을 덮은 얼음이 깎아지른 듯한 얼음 절벽의 형태로 불도저처럼 밀고 내려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빙하와 빙상들이 1마일이 넘는 두께로 지구의 땅덩어리를 30퍼센트나 뒤덮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후 변화가 상당히 느리게 일어난 까닭에 생물들은 전반적으로 잘 적응했다.

큰 동물들은 털복숭이 매머드처럼 털이 더욱 많아져 추위에도 살 수 있었다. 인간도 네안데르탈인처럼 몸집도 작아지고 털도 더 많이 났다. 일부는 피부가 하얗게 변해 열을 보존했고, 이는 위험한 자외선을 반사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인간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진화하며 적응한 덕분에 최악의 추위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빙하기는 좀 느닷없이 끝났다. 약 1만4천 년 전에 지구의 평균 기온이 6도나 올라가, 혹독한 빙하기에서 오늘날의 한층 온화한 간빙기로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넘어갔다.

2. 지구 공전과 기울기

지구의 기온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지구가 1년에 한 번씩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동안 태양에 조금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날씨가 뜨거워지거나 추워지기 때문이다.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을 하는 방식도 한 요인이다.

지구는 사실 약간 통제가 안 되는 팽이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지구의 기울기가 21도에서 27도까지 변할 수 있고, 이것이 극지방의 기온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과학자들은 아주 혹독한 빙하기였는데도 약 1만4천 년 전부터 1만1천 년 전까지 몇 천 년 동안 날씨가 뜨거웠던 것도 이런 지구의 공전 궤도기울기의 변화 탓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빙하기에 간간이 따뜻했던 시기를 간빙기라고 하는데, 지금도 우리는 간빙기에 있으며, 이 간빙기는 약 1만4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이번 간빙기는 인간이 초래한 지구 온난화 탓에 다른 간빙기보다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극지방을 덮고 있는 얼음이 완전히 녹으면 세계의 기후가 4천만 년 된 빙하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지도 모른다.

3. 기후 변화의 적응

약 1만8천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북아메리카에서 오대호를 뒤덮었던 거대한 빙상의 남쪽 풍경은 풀과 나무가 뒤섞여 있는 큰 정원 같앗고, 어슬렁거리는 야생 포유류의 낙원이었다. 사자와 검치호 같은 큰 육식 포유류가 마스토돈과 거대한 매머드를 먹고 살았다. 말과 낙타도 이들 큰 육식동물의 맛있는 식사거리엿다. 말과 낙타는 이 아메리카의 삼림 지대에서 처음 나타났다.

사우투올라 부녀가 저 에스파냐의 동굴 벽화에서 보았던 들소 같은 것들도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이 들소들은 젖소가 아니었다. 이것들은 거의 코기리만 했다. 우리가 강에서 사는 조그만 동물로 아는 비버도 오늘날의 가장 큰 회색곰만큼이나 자랐고, 그때는 곰도 지금보다 거의 두 배나 컸다. 

지구는 오늘날 ‘거대동물‘로 불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포유류들로 가득찼다. 거대한 짐승들이 혹독한 날씨에 훨씬 잘 지낸것은 이들의 커다란 몸집이 중요한 장기들을 극한의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만 년 동안 적어도 서른 번 이상 얼음이 뒤덮었다가 녹았다가 했다. 혹독한 정도는 달랐지만 그때마다 개별 종들이 더워지거나 추워진 기후 변화에 적응하면서 자연과 자연의 생물계는 되살아났다.

4. 큰 포유류의 멸종

거대한 빙상이 녹았을 때 북아메리카에는 적어도 80종의 큰 포유류가 살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수천만 년을 살아온 것들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것들이 모두 죽었다. 모두 합해 45종 가운데 33종이 멸종했고, 북아메리카의 동물들은 대부분 기껏해야 칠면조만 한 것들밖에 안 남았다. 

살아남은 비버와 곰조차 그들의 조상에 비하면 난쟁이처럼 작아졌다. 오늘날의 북아메리카 들소는 지금가지 살았던 들소 가운데 가장 작다. 전문가들은 모두 합해서 아메리카의 큰 동물들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이 약 1천 년 만에 사라졌다고 본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거의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큰 포유류 13종이 사라졌다. 멸종은 더 일찍 시작되었다. 결국 오늘날의 캥거루보다 큰 것은 아무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지만 북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에서는 빙하가 물러나고 해수면이 올라왔을 때에도 큰 포유류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신세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느닷없이 수많은 큰 동물이 멸종되었는데 왜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5. 인간의 도래

어떤 전문가들은 기후 탓일 거라고 생각한다. 기온이 올라가 큰 동물들이 불리해졌다는 것이다. 몸집이 커서 몸을 시원하게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더위에 지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장 인기 있는 설은 거의 40년전에 미국 과학자 풀 마틴이 처음 내놓았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의 도래를 원인으로 꼽았다. 아메리카에서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나 그런 큰 동물의 멸종은 인간이 두 대륙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일어났다

마틴에 따르면, 두 대륙의 동물은 그때까지 인간을 만난 적이 없어 인간에게 취약했다.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쓴 일기처럼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 서식지를 만난 탐험가들이 쓴 일기를 읽어보면 언제나 야생 동물들이 겁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인간 떠돌이들이 부싯돌로 만든 무기와 활, 화살, 창을 들고 처음 나타났을 때 그들과 마주친 동물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동물들은 날카로운 창을 든 이 수렵채집인들의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1천 년도 안 되는 사이에 큰 사냥감 대부분이 살육을 당하고 많은 종이 멸종 위개에 처했을 정도였다.

이 설은 왜 북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에서는 인간이 존재했는데도 비슷한 동물들이 많이 살아남았는지도 설명해준다. 이곳에 사는 동물들은 200만 년 넘게 인간과 함께 진화했고, 인간이 고기과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것들은 조상들의 경험 덕분에 도망가거나 피하는 식으로 인간과의 접촉을 피함으로써 충분히 많은 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대량 멸종이 일어나지 않았다.

6. 변화된 자연

그런데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큰 포식 동물들이 인간의 손에 대량으로 죽임을 당하자 이들 동물의 먹잇감이었던 들소와 사슴, 나무늘보, 말, 낙타 같은 초식동물들의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포식자가 사라지자 이것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나 이것들에게 고루 돌아갈 식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급속한 기후 변화로 식물의 생태까지 변하자 재앙이 닥쳤다, 초식동물들까지 대량으로 굶어죽은 것이다. 변화된 자연은 더 이상 초식동물들을 부양할 수 없었고, 결국 오랜 기간 얼마 안 되는 식량과 물만으로도 견딜 수 있었던 작은 동물들만 살아남았다.

이렇게 개체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풀을 너무 많이 뜯어먹은 것도 기후 변화가 가져온 결과에 기여해, 초목이 울창했던 풍경이 더욱 빠르게 초원으로 변했고, 그 결과 자연환경은 미래 세대의 큰 동물을 부양하기에 더욱 부적합한 곳으로 변했다.

자연의 생태계는 이렇듯 깨지기 쉽다. 여기서 새로운 것을 조금 보태고 저기서 그것들이 다른 것들을 제거하고, 거기에 약간의 기후 변화까지 일어나면 엄청난 파국이 온다.

4만 년 전에서 1만2천 년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풀을 먹는 큰 유대류와 유태반 포유류가 전멸했을 때 인간이 한 역할은 인류가 끊임없이 변하는, 지구의 깨지기 쉬운 자연환경에 큰 영향을 끼친 첫 번째 사례였다

수렵 채집인

인간은 어떻게 자신이 지구에서 산 역사의 99퍼센트의 기간을 편히 머물 수 있는 집이나 직업, 사유재산도 없이 자연 상태에서 살았을까?

1. 공유사회

우리가 가진 증거 가운데 많은 것들은 이 석기 시대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말한다.약 1만 년 전까지는 오랫동안 사는 집이나 마을이 없지는 않았어도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늘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남자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여자들은 자연 그대로 자란 열매를 땄다. 때로 여자들도 사냥하는 것을 도왔는데, 특히 도망가지 못하도록 빙 둘러서 포위할 필요가 있는 사슴 같은 동물을 잡을 때 그랬다.

늘 돌아다니는 방랑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실제로 소유할 게 거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밖에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동물 가죽이나 털가죽을 입었고, 날씨가 더워지면 거의 발가벗고 다녔다.

그러니 필요 없는 것을 무엇하러 가지고 다녔겠는가? 그들은 물을 넣은 호리병박같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또 사냥할 때 쓸 이나화살도 가지고 다니고, 죽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불을 피울 때 쓸 부싯돌로 만든 도구도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밖에는 거의 필요한 것이 없었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그들은 물건을 서로 공유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면 가지고 다닐 것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재산이 없었고, 누구도 땅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사유재산이니 여기서는 사냥하지 마시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땅은 오늘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우리 모두의 것, 살아 있는 생물이면 누구나, 다시 말해 동물과 식물, 인간이 모두 공유해야 할 자원이었다.

2. 초기 예술

사람들은 호모 하빌리스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아니 그에 앞서 적어도 300만 년 전에 루시의 사람들인 호모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런 자연 상태에서 살았다.

그들은 서로 사이좋게 살았고, 자연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사냥하고, 피곤하면 자고, 땅에 열매와 고기가 없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지구가 다시 기운을 차릴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아주 예술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수렵채집인들은 우리가 아는 최초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품이 프랑스 남서부와 에스파냐 북부에 있는 선사시대의 동굴 속 깊은 곳에 지금도 남아있다. 이 수렵채집인들이 최초로 새긴 것들에서 인류 예술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아마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굴 벽화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1875년 어느 가을 날 아침 마리아 사우투올라라는 여덟 살 난 에스파냐 소녀가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한 동굴 벽화일 것이다. 

이날 사우투울라는 아버지 마르셀리노와 함게 알타미라에 있는 그들의 집 근처에서 이상하게 생긴 동굴들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270미터나 되는 어두 침침한 동굴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사우투올라가 위를 쳐다보니 천장이 소처럼 생긴 것들을 그린 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열정적인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사우투올라의 아버지는 이것들이 들소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전문가 친구의 도움을 얻었고, 얼마 안 있어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라고 선언했다.

3. 동굴 벽화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런 솜씨 좋은 그림이 그렇게 오래되었다는 것을, 그것이 그렇게 ‘원시적인’ 사람들의 작품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벌컥 화를 내며 마르셀리노 사우투울라가 유명해지려고 누군가에게 돈을 주어 동굴에 그림을 그리게 했을 거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마르셀리노 사우투올라가 불명예스럽게 죽은 지 14년이 지난 1902년에야 다른 동굴에서 비슷한 그림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것들이 진품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현대의 연대 추정 기술에 따르면, 그것들은 거의 2만 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석기 시대 사람들은 정확히 무엇을 그렸고, 왜 그렸을까? 그들은 어떤 재료를 섰을까? 그들의 예술작품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들이 전시하려고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바르셀리노 사우투올라가 에스파냐에서 발견한 그림이나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유명한 라스코 동굴 벽화처럼 그것들 가운데 꽤 많은 것이 빛이라고는 거의 없는 굴 속 깊은 곳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사가들이 샤민이라고 하는 고대의 성자들이 굴 속 깊이 들어가 마법 의식을 치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동굴의 암석에 그림을 그려 그들의 어머니인 자연에게 동물과 식량, 행운을 달라고 기원하고 싶었을 거라고 말이다.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점토에 때로는 산화철을 섞어 여러 가지 색소를 만들고 그것에 동물의 기름을 섞어 끈적끈적한 그림물감을 만들었다.

4. 하드자베족

지금은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대 농업과 산업이 이런 오래된 인간 사회까지 거의 완전히 퍼진 탓이다. 그러나 거의 잊힌 세계의 오지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 숲속에서, 그들은 땅이 농사짓기에 좋지 않은 곳이나 도시가 번성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붙박여 살고 있다. 

하드자베족은 현재 탄자니아가 있는 중앙아프리카 오지에서 산다. 최근까지도 이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야생 동물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숲에서 잘 살았다. 그러나 2006년에는 겨우 2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곳을 침입하는 농부들과 야금야금 진행되는 도시화에 포위되어 나무가 울창한 숲 지대로 밀려난 탓이다.

이들에게는 침략의 역사가 없어, 침입하는 농부들과 도시 사람들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전통적 사냥터에서 물러나 훨씬 살기 힘든 숲으로 들어갔고, 지금 거기서 되도록 현대 사회로부터 숨어 지내고 있다.

하드자베족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한다. 최근에는 부족민 하나가 외부인에게 숲을 여기저기 보여주는 안내자로 고용되는 드문 일이 일어났는데 그의 봉급날에 돈을 다 같이 나누어 가지려고 부족민 전체가 진을 쳤다는 보도가 있었다.

현대 사회가 명령과 엄격한 통제, 법, 경찰, 행정관, 통치, 통치자에 기대고 있다면, 하드자베족은 거의 지성과 협력에 기대고 있고 부족이 관리하기 좋게 작은 집단들로 편성되어 있다. 그들의 생존 비결은 유연한 것과 서로 기꺼이 돕는 것에 있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고정된 집이 없어 발걸음이 가볍기 때문이다.

5. 마지막 혈통

이들의 DNA가 지금가지 연구된 모든 인간 집단 가운데 가장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근의 유전학적 연구 결과는 이들의 오랜 전통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유전자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들의 혈통이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유전자는 대대로 예측할 수 있는 비율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하드자베족의 혈통이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 과정 초기에 나머지 인간 혈통과 갈라졌다고 믿으며, 이는 곧 그들이 우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들도 현대 세계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이들의 혈통 또한 사라질 공산이 크다.

하드자베족의 생활방식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석기 시대의 생활일반에 관해 말해주는 것은 그것이 꽤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식량 생산 과정에 참여하고 부족 전체가 이동하며 살아, 통치자나 가만히 앉아서 먹여주기를 기다리는 집단이 없다. 

이 사람들은 숲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무엇이 먹기 좋고 무엇이 먹기 좋지 않은지를 잘 안다. 숲에서 나는 식물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고 다른 건강 문제를 다루는 법도 수백 세대 동안 구전 되었다.

현대의 약도 대부분은 결국 자연에서 발견되는 성분으로 만들어진다. 하드자베족 사람들은 석기 시대 사람들처럼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약초와 식물 치료제에 대해 가장박식한 현대 약학자들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다.

6. 자연을 위한 생활

모든 자연적인 것에 대한 깊은 존중과 배려는 수렵채집인의 신화, 또는 종교의 토대였다. 그들에게는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차 있었다. 숲에는 죽은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고, 조상들은 사후에 돌아와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위로해주었다. 

그들이 먹고 자고 쉬고 따뜻하게 지내고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자연의 숲을 돌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자연의 풍요와 자연의 자원을 완전히 믿고 의지했다.

아마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수렵채집인의 생활방식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인구의 전반적 수준이 저절로 조절된다는 점일 것이다. 수렵채집인은 늘 걸어서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므로 자식을 많아야 4,5년에 하나식 터울을 두고 낳을 필요가 있다.

자식이 너무 많으면 한꺼번에 데리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수만 년 동안 지구에서 약 500만 명이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고,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일이 없었다. 방랑자처럼 떠도는 생활을 하려면 500만 명 정도가 적당했고, 그것이 자연에서 지속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왜 수만 년 동안 행복한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던 500만 명의 사람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습관을 바꾸어 완전히 새롭고 훨씬 힘든 생활방식으로 돌아섰을까?

대약진의 시대

어떻게 인간의 종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 한 종만 마지막까지 지구상에 살아남아 그전까지 사람이 살지 않던 땅에 이주해 살며 말하는 것을 배우고 새로운 형태의 깃 달린 무기로 사냥하는 것을 배웠을까?

1. 현생인류의 조상

우리는 이제 호모 사피엔스, 즉 현대의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의 후손이 아니었다. 두 종이 수천 년 동안 동시대를 살아 두 종 사이의 짝 짓기도 있었겠지만, 최근의 유전학적 증거는 그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붉은 머리카락과 주근깨, 창백한 피부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물려받은 특징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발견된 25개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들은 거의 50만 년에 걸쳐서 존재했고, 이것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면 호모 에렉투스에서 오늘날의 우리까지 오는 데 진화의 발걸음이 몇 걸음밖에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에티오피아 남부에서 발견되었다 1967년에 오모 강바닥에 쌓인 진흙 속 깊이 파묻혀 있던 인간의 두개골 두 개가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최근에 연대를 다시 측정한 결과 지금은 약 19만5천 년 전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오모 1‘과 ‘오모 2‘로 불리는 두 두개골은 꼭 현생인류의 직계 조상처럼 보인다. 현생인류의 두개골보다 조금 큰 것을 제외하면 현생인류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것들은 얼굴이 납작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왓지만, 그 전의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눈 위고 튀어나온 눈썹뼈는 없었다.

2. 개체의 감소

1997년에도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의 두개골이 에티오피아의 헤르토라는 마을에서 세 개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석기도 640점 이상 발견되어,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 석기들은 아마 근처에 있는 아와시 강 옆에 있던 깊지 않은 호수에서 살던 하마와 악어, 메기를 잡아 살을 발라내는데 쓰였을 것이다.

유전학적 연구는 오늘날 살아 있는 인류는 모두 이즈음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한 종의 인간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유전적 변이가 거의 없다. 포유류에 속한 대부분의 종들에 비해 그 차이가 아주 작다. 

그렇게 유전적 변이가 작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언젠가 우리 종인 호모 사피엔스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었고 그들이 서로 아주 비슷한 유전자 정보를 지니고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전문가들은 호모사피엔스가 자신의 역사 초기에 개체수가 거의 치명적일 정도로 급격히 줄었을 거라는 생각에 들어맞는 ‘사건’을 찾는 또 하나의 사냥에 나섰다.

하나는 약 7만5천 년 전에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에 잇는 토바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 지수 8의 대폭발이다. 전문가들은 이때 거대한 열점에서 엄청난 양의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분출해, 1981년에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세인트헬렌스 산에서 일어난 화산 분출보다 3천 배나 많은 에너지를 분출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면 대기가 완전히 먼지로 뒤덮여 햇빛이 몇 개월 동안, 아니 어쩌면 몇 년 동안이나 차단되어 지구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을 것이고, 어쩌면 그 때문에 빙하기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질병의 발생으로 인구의 많은 부분을 쓸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아프리카의 조상들에서 온 호모 사피엔스는 조상들을 본떠 자기들도 세계를 돌아다녔고, 국 다른 종의 인간을 모두 대체했다

3. 대규모 이주

지금은 다양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인종적으로 다양한 현생인류의 수많은 유전자를 추적해 이들의 조상이 언제 어디서 왔는지를 밝히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계통지리학에서는 작은 유전적 변이를 통해서도 언제 어디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아마 처음에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이주를 한 것은 약 13만 년전에서 9만 년 전 사이에 빙하기 중에도 따듯한 간빙기가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약 7만 년 전부터 날씨가 추워져 빙하가 높은 산꼭대기를 덮으면서 아프리카 북부가 남부와 단절되고 아프리카 북서부와 북동부가 단절되었다. 

다윈이 발견했듯이 종이 물리적으로 단절되면 작은 변이들이 각각의 유전자 풀에 서서히 들어가기 시작해 종이 다양해진다. 인류도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네 인종 집단으로 분리되었다.

약 6만 년 전부터 이 네 무리의 인간들은 아프리카에서 따로따로 이주해 저마다 세계를 가로지르며 자기들의 작은 유전적 차이를 수출했다. 어떤 호모 사피엔스들은 아시아를 휩쓸며 마지막 남은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했다

어떤 호모 사피엔스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인도와 중국에 도달했다. 그들은 뗏목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약 4만 년 전부터 수백만 년 동안 유대류 포유동물의 영역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는 처음으로 노를 저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인간 사냥터가 되었다.

4. 도구의 발달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해수면이 역사에 남을 정도로 낮았을 때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왔다. 그들은 숲에서 500~800명 정도가 부족을 이루며 살며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발전시키고 그들만의 독특한 예술과 도자기, 도구로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그들은 250여 년 전에 최초의 유럽 탐험가들이 손에 총을 들고 와 이 땅을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살았다.

처음 유럽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들은 약 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동쪽으로 걸어갔다가 중동을 거쳐 북쪽으로 왔다. 이 사람들을 때로 크로마뇽인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름은 1868년에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에 있는 크로마뇽 동굴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유골이 발견된 것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생활양식과 과학기술, 문화에서 아주 큰 변화를 가져왔고, 세계 최초로 특수하게 날아가도록 설계된 도 만들어냈다. 활과 화살은 아마 이동 중에 어딘가에서 발명했을 것이다.

어쩌면 북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발명했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두 곳에 초목이 무성해 사냥감과 커다란 야생 동물이 가득했고,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이 만들어 쓴 몽둥이로 가까운 거리에서 죽이기보다는 먼 거리에서 죽이는 것이 훨씬 쉽고 안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부터 인간의 도구가 놀라울 정도로 복잡해졌다. 처음으로 뼈와 엄니, 나뭇가지 같은 뿔이 바느질할 때 스는 바늘과 동물의 기름을 태워서 불을 밝히는 숟가락처럼 생긴 등잔 같은 유용한 가재도구를 만드는 데 쓰였을 뿐 아니라 장식을 만드는 데도 쓰였다.

크로마뇽인의 무덤에서는 목걸이와 목걸이 장식의 형태로 보석이 묻혀 있는 것도 발견되었다. 최초의 질그릇 항아리도 이 시기의 것이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같은 세계 최초의 조각들도 마찬가지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1908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풍요의 여신 상으로, 약 2만4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5. 인류의 이동

그때는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약 2만2천 년 전에 마지막으로 북극에서 거대한 빙상이 내려왔고, 이것은 1만2천 년 뒤에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이 시기에 크로마뇽인은 한층 창백한 피부를 드러내 그러한 기후 변화에 적응했다. 흰 피부는 햇빛이 약한 빙하기에도 뼈를 만드는 데 필요한 비타민 D를 충분히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크로마뇽인은 약 2만 년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이들은 약 1만 년 전에 프랑스에서 걸어서 영국 해협을 건넜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은 뒤에야 그곳에 물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최초로 영국에 도착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최초로 영국에 도착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은 그 전에도 일곱 번이나 영국 제도로 이주해서 살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약 70만 년 전에 호모에렉투스가 처음 그런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아마 주기적으로 오늘날의 런던까지 얼음으로 뒤덮였던 빙하기의 혹독한 기후 조건 탓이었을 것이다. 빙하기에는 런던처럼 남쪽에 있는 지역에서도 추위가 극심해 어떤 유형의 인간도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6. 신세계의 발견

약 1만5천 년 전에도 지구의 많은 물이 거대한 빙하에 갇혀 해수면이 낮아졌다. 베링지아라는 폴란드만 한 거대한 육교가 지금은 너비 95킬로미터로 펼쳐져 있는 베링 해협을 가로질러 러시아의 동쪽 끝과 알래스카를 연결했을 정도다.

따라서 그때는 아시아에서 북아메리카로 걸어서 갈 수 있었다. 아마 그때까지는 북아메리카에 사람이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수천 년 전에 남아시아에서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거쳐 북아메리카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말이다.

남북 아메리카는 인간이 이주해 살 수 있는 마지막 거대한 대륙이었고, 그래서 지금도 그것을 가리켜 ‘신세계‘라고 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다. 아시아를 가로질러서 가는 동안 사람들은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큰 동물의 뒤를 따르기도 하고 이동하면서 사냥도 하고 들쑥날쑥한 자연의 기후 변화도 최대한 활용했다

북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파나마라는 거대한 두 대륙을 잇는 육교를 통해서였다. 남아메리카 대륙은 날씨가 훨씬 따뜻해 초목과 사냥감이 풍부했다.

석기 시대 사람들이 지구의 이 지역에 다다르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 다다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많은 야생 생물이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 자연의 생태계 가운데 소수는 아직도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이제 인간이 지구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널리 퍼지면서 세계의 생물 가운데 많은 것이 갈수록 확대되는 인간의 영향력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인류의 진화

어떻게 초기 인간들이 빙하기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해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로 퍼져나갔을까, 그리고 어떻게 불을 다룰 줄 알게 되어 갓 사냥한 고기를 요리했을까?

1. 호모 에렉투스

약 200만 년 전에 호모 하빌리스는 호모 에렉투스라는 새로운 종의 인간으로 진화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호모 사피엔스인 오늘날의 우리와 훨씬 많이 닮았다. 오랫동안 전문가들은 현대 인류의 조상이 중국이나 자바에서 처음 나타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적어도 5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모 에렉투스의 뼈가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 근처에 있는 늪에서 약 180만 년 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열 살짜리 남자아이가 발견된 덕분에 소년이 호모 하빌리스가 모두 자취를 감출 무렵에 아프리카에서 처음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투르카나 소년은 1984년에 아프리카에 사는 영국 고생물학자 리처드 리키가 이끄는 화석 사냥꾼 팀에게 발견되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얼마 안 되어 리키는 ‘소년의 뼈를 공들여 발굴했더니 인간이 되기 직전의 종이 나타났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는 아프리카인을 하나의 조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상은 이 소년과 같은 종이다’라고 했다.

투르카나 소년은 살았을 때 피부가 검고 땀을 많이 흘렸다. 소년과 같은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열기에 머리카락을 잃었고, 이는 곧 털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검은 피부와 땀샘은 이 초기 인간들이 아프리카 초원의 뜨겁고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었다. 

소년은 조상인 호모 하빌리스와 달리 코가 길게 튀어나왔고, 이것 또한 피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소년의 골반은 소년이 직립보행을 했음을 보여주고, 소년의 두개골은 크기가 눈에 띄게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그것이 1100cc나 되어, 호모 하빌리스보다 거의 두배나 컸다. 그런데 뇌가 크면 식량이 더 필요하다. 걸핏하면 굶주린 치타나 갑자기 덤벼드는 사자에게 희생되고는 했던 진화상의 조상과 달리 호모 에렉투스는 창을 만든 최초의 인간이었다. 들짐승들과 겨루어도 거의 언제나 이겼다.

2. 불의 사용

호모 에렉투스는 어떤 야생 동물보다는 유리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손과 뇌,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을 다룰 줄 아는 것이었다. 불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은 그의 조상들을 몸시 괴롭혔던 큰 동물들을 겁을 주어 쫓아버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그것은 또한 호모 에렉투스가 세계 최초의 요리사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7만 년 전 멸종되기 훨씬 전부터 이 초기 인간들은 요리를 해서 먹으면 날고기를 먹을 때보다 에너지를 빨리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리를 하면 소화되는 시간도 짧아진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거의 150만 년 전에 인간이 모닥불을 피운 잔해가 발견되었다. 불을 피우면 흙이 자기를 띠어 인간이 불을 피웠다는 숨길 수 없는 증거가 남는다. 그런데 누가 인간에게 불을 피우는 것을 가르쳐주었을까? 인간은 어떻게 불을 다룰 줄 알게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인의 신화에 따르면 티탄족이었던 프로메테우스가 회향나무 가지를 들고 가서 신에게서 몰래 불을 훔쳐 가지고 내려왔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죄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그 사실을 알고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묶어두고 날마다 독수리를 보내 그의 간을 쏘아 먹도록 했던 것이다. 그의 간은 독수리가 돌아와 다시 쪼아 먹을수 있도록 매일 밤 다시 자랐다.

제우스는 불을 다룰 줄 알게 된 인간에게도 복수를 했다.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어여쁜 여자를 상자와 함게 지상으로 내려 보내며 절대 상자를 열지 말라고 했다. 물론 판도라는 유혹에 못 이겨 상자를 열었고, 결국 인간은 영원히 고통과 절망에 신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언어의 사용

그러나 화석 증거는 호모 에렉투스가 돌을 사용해 불을 피우는 요령을 습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북부에서는 5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그은 부싯돌 조각이 그들의 야영지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100명가량이 무리지어 살며 날카롭게 간 부싯돌을 이용해 함께 사냥했다. 이들은 피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가서 야생 동물을 붙잡거나 덫을 놓아 잡았다. 이들이 만든 도구는 호모 하빌리스가 처음 만든 것들보다 훨씬 정교했다.

가장 큰 차이는 도끼를 양날 모두 날카롭게 만든 것이다. 이 ‘양면 석기‘는 그 전 시대의 것보다 네 배나 성능이 좋았고, 나무를 자르고 뿌리를 파내고 사냥한 동물에서 고기를 발라내고 가죽을 벗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을 할 수 있었을까? 과학자들은 투르카나 소년의 뼈를 보면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말을 하려면 호흡을 조절해야 하는데 그러는 데 필요한 복잡한 신경계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척추의 신경 구멍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종류의 몸짓 언어나 오늘날 십대들이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간단히 줄여서 쓰는 말 같은 것을 개발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은 휴대용 도구와 보호해야 할 공동체, 그리고 불의 마력이 있었기에 식량을 얻기 위해 필요하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 외부의 삶을 찾아나선 최초의 인간, 인류 최초의 이주민, 아프리카의 마르코 폴로였다.

4. 호모 하이델베르켄시스

지구의 대륙들이 거의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렬되어 그때도 지금처럼 육로로 아프리카에서 중동을 거쳐 남아시아와 인도, 중국으로 가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자동차나 배, 비행기는 물론 길도 없던 시절에 석기 시대 사람들이 정말로 그 먼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우리 대부분과 달리 그들에게는 한 가지 크게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저우커우텐의 산딩동화석은 중국의 동해안에서 발견되었다. 1927년에 여기서 40명이나 되는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약 4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안타갑게도 없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숨겨놓았다가 1941년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에 두려고 잘 싸서 보냈는데, 그후로 행방이 묘연하다. 1945년에 일본 병원선 아와마루 호에 있다가 물에 잠겼다는 설도 있다. 

호모 에렉투스는 평균 30년 정도 살았다. 그리고 아무리 느긋하게, 예를 들면 1년에 10마일씩 걸어갔어도 600년이면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6천 마일에 이르는 땅을 가로질러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약 30세대에 해당한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180만 년 전의 것이고 저우커우텐에서 발굴된 것이 40만 년밖에 안 되었으니, 그들은 충분히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갈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초기 인간은 호모 에렉투스 시대부터 살기 좋은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 대륙을 돌아다녔다. 영국에 인간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최초의 증거는 70만 년 전의 것이다. 서섹스 주에서 발견된 인간 두개골인 복스그로브 사람은 호모 하이델베르켄시스로 알려진 호모 에렉투스의 후손으로, 약 50만 년 전에 살았다. 

호모 에렉투스가 아시아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을 때는 날씨가 많이 나빠졌다. 빙하기가 시작되면서 차가운 냉기로 인해 빙하가 내려와 대륙을 덮었기 때문이다. 아주 멀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호모 에렉투스에게는 그런 추운 날씨가 큰 문제였다. 불의 마력도 한 번에 수천 년식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덮쳤던 아주 차가운 기온에서는 생존을 충분히 보장해주지 못했다

5. 네안데르탈인

1857년에 독일 북부의 뒤셀도르프 근처에서 일하던 채석장 노동자들이 네안데르 계곡에서 사람 뼈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의 발견으로 동식물학자들은 처음으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 전에 여러 종의 인간이 있었을지도 모르며 인간이 유인원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그들이 몰랐던 것은 유전적으로 우리 인간이 사실은 바로 유인원과의 한 갈래라는 사실이었다.

그후로도 많은 네안데르탈인 유적지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약 35만 년 전의 것이며, 이는 곧 아주 오랫동안 동시에 여러 종의 인간이 살았다는 말이 된다. 약 7만 년 전까지는 말이다. 이때 호모 에렉투스 계열이 사라졌고, 이는 아마 기후가 변하고 또 하나의 강력한 종인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탓이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 기간에 호모 에렉투스, 호모 에르가스테르,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호모 로데시엔시스 이렇게 적어도 다섯 종의 인간이 지구에 살았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종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과학자들은 여전히 그 5종 가운데 일부는 독립된 종인지 아종인지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싸웠을까? 이들은 함께 살았을까? 저마다 다른 공동체에서 살았을까? 이들은 이종교배를 했을까? 이들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모든 것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이견과 혼란이 있다. 그래도 확실해 보이는 것은 호모 에렉투스가 약 17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이주하자 세계 곳곳에서 여러 종의 인간이 진화되어 나왔다는 것, 그리고 지리적 차이와 기후의 차이가 작지만 의미 있는 진화상의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 종들은 많이 섞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는 세상에 인간이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아마 유럽과 아시아 대륙 전체에 100만 명 정도가 퍼져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두 대륙에 40억 이상이 사는데 말이다.

6. 도구의 사용

네안데르탈인은 약 35만 년 전에 아시아에 처음 나타났고, 날씨가 허락하자 북쪽과 서쪽으로 퍼져 유럽으로 들어갔고, 나중에는 영국까지 건너갔다. 영국에서는 토키에 있는 켄스동물에서 3만5천 년 전의 것으로 밝혀진 턱뼈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현생인류의 뇌보다 아주 크지는 않아도 결코 작지 않다. 네안데르탈인은 또 우리보다 털이 많고 키는 대개 작았지만 우리처럼 직립보행을 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우리보다 강했다.

코가 뭉툭하고 이마가 눈썹 위로 튀어나왔다. 이런 것들은 거의 모두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이 초기 인간의 표면적을 줄여 혹독하게 추운 빙하기에 보온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은 도구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는 이들의 손이 우리 손보다 민첩했으면 민첩했지 덜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안데르탈인의 도구가 발견된 곳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르무스티에라는 곳이다.

1909년에 거기서 고고학자들은 거의 완벽한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4만5천 년도 안 된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그곳에서 두개골과 함게 솜씨 있게 다듬어진 날카로운 석기도 수백 점 발견했다.

네안데르탈인은 그 가운데 일부는 무기로 썼다. 그들의 창은 던지도록 되어 있지 않아 찌르고 때리는 데 썼다. 석기는 그들이 썩 괜찮은 쉼터를 짓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인간 최초의 집이었다.

그들은 또 최초로 죽은 사람을 묻은 것으로도 알려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다음 생으로 갈 수 있도록 묘에 장식을 남겼다. 이는 분명히 그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쩌면 종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를 발전시켰다.

7. 언어 능력

아마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발견은 1995년에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의 화석 수집가 이반 투르크 박사가 네안데르탈인의 집에 있던 벽난로 옆에서 발굴한 것이다. 그는 속이 빈 곰뼈에 한 줄로 구멍이 여러 개 난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세상에 알려진 악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의 파편일 수도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의 플루트 말이다.

이 선사시대의 피리로 그들은 무슨 곡을 연주했을까? 말하기 어렵다. 일부밖에 남지 않아 전체는 얼마나 오래되고 원래는 구멍이 몇 개나 있었는지 아무도 확실히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그것으로 반음 낮춘 3음으로 오늘날 들으면 단조나 우울한 곡조로 들렸음직한 것을 연주했을 거라고 믿는다.

1983년에 이스라엘에 있는 한 동굴에서 현생인류의 설골과 거의 동일한 네안데르탈인의 뼈가 발견되었다. 설골은 우리의 혀를 목과 연결시키는 뼈다. 그렇다면 이는 곧 네안데르탈인이 거의 틀림없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네안데르탈인은 또 루시와 달리 척추에서 혀를 조절하는 신경이 들어가는 구멍의 크기도 현생인류와 거의 같다. 이는 그들이 광범위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음악과 의식, 무기, 도구, 대화는 지능과 두뇌, 문화가 있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인간의 것들이다. 네안데르탈인은 빙하기에 동굴에서 힘들게 살면서도 그것을 충분이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건장했겠지만, 그들이 우리보다 짐승 같았다고 말해주는 것은하나도 없다.

이 강하고 총명하고 환경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알려면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생각의 탄생

어떻게 유인원이라는 생물이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걷는 것을 배우고 사냥을 위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고 평균 뇌보다 큰 뇌를 가진 종으로 진화했을까?

1. 유인원 화석

차드는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이 나라는 대부분이 불모지다. 중앙은 매우 건조한 평원이고 북부는 사막, 북서부는 메마른 산, 남부는 열대 저지대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먼지가 많고 가장 황폐한 곳에서 역대 가장 흥미로운 역사적 유물 가운데 하나가 발견되었다.

2001년 7월에 모든 인간의 조상일 수 있는 생물의 두개골이 미셸 브뤼네라는 프랑스 사람이 이끈 네 명의 과학자 팀에게 발견되었다. 그것은 약 700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처럼 생긴 동물의 뼈였다. 어떤 과학자들은 바로 그 전에 유인원의 한 갈래인 호모가 오늘날의 침팬지가 된 갈래와 분리되었다고 믿는다.

뼈를 보면 이 생물은 눈썹이 짙고 이빨이 짧으며 얼굴이 현생인류와 매우 비슷했다. 머리는 작아, 350cc밖에 안 되었다. 이것은 침팬지와 비슷한 크기이며, 이에 비해 현생인류의 두개골은 1350cc에 이른다. 

안타깝게도 이 두개골만으로는 이 인간의 조상이 두 발로 걸었는지 네 발로 걸었는 지도 판별할 수가 없었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것이 유인원과 인간을 이어주는 고리라고 생각한다. 이행기의 종으로서, 모든 인류의 조상인 일종의 이브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과학자들은 이 뼈의 소유자가 암컷 고릴라의 초기 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2. 두 발로 걸은 ‘루시’

이 두가지 발견이 이루어진 뒤에 과학자들 사이에서 지루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들이 최근의 유전자 분석과 어긋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자시계’라는 것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의 분화는 적어도 500만 년 전이나 600만 년 전에 일어났어야 한다. 만일 그보다 오래 전에 일어났다면 우리의 유전자와 침팬지의 유전자가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다. 우리의 유전자와 침팬지의 유전자는 적어도 96페센트가 같다.

1974년에 발견된 ‘루시‘라는 이름의 뼈도 최근에 다시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유전학자들에게 인간과 침팬지의 분화가 700만 년 전보다는 더 최근에 일어났다는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화석 증거를 제공했다. 

루시는 320만 년 전에 에티오피아에서 살았다. 루시는 미국 화석 전문가 도널즈 조핸슨이 이끈 국제 과학자 팀에게 발견되었다. 1974년 11월 30일에 아와시 강 옆에서 조핸슨과 그의 학생 가운데 하나였던 톰 그레이가 인간의 화석을 찾다가 비탈면 위쪽에 팔뼈 조각이 쑥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흙을 파헤쳐보니 턱뼈와 넓적다리뼈, 갈비뼈도 있고 팔뼈 조각도 더 있었다. 결국 하나하나 발굴한 결과 완벽한 골격의 40퍼센트가 넘게 나왔다.

그들은 그녀를 ‘루시‘라고 불렀다. 분명히 여자였고, 그것을 발견했을 때 조핸슨이 비틀스의 노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키가 1.1미터쯤 되었고, 몸무게는 29킬로그램이었다. 루시의 발견을 세상에 알리자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과학자들이 루시의 골반 형태를 보고 그녀가 명확히 두발로 걸은 것으로 알려진 유인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직립보행의 시작

4년 뒤에 또 다른 화석 사냥꾼 팀이 탄자니아 근처에서 두 번째 놀라운 발견을 했다. 라에톨리라는 곳에서 푸석푸석한 화산재에 완벽하게 보존된 일련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루시 같은 생물이 우리처럼 직립보행을 했다는 것을 더욱 명확히 뒷받침해주는 증거였다.

이 발자국들은 초기 인간들이 근처에 있는 물웅덩이로 걸어가면서 만든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들이 지나가고 얼마 안 되어 화산이 터졌고, 산더미처럼 쌓인 화산재가 그들의 발자국을 바위에 남겨진 흔적 화석으로 보존했다. 이 발자국들은 370만 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것은 두 발로 걷는 생물이 만든 것이었다.

루시가 발견될 때까지는 과학자들이 초기 인간의 지능이 높아서 두 발로 걷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직립보행을 하면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해 도구와 무기의 형태로 과학과 기술을 이용할 수 있고, 이는 그들이 번창하고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시는 두 발로 걸었고 따라서 그녀의 종이 인류의 가장 먼 조상이었을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녀의 머리가 침팬지의 머리보다 그리 크지 않다는 것도 놀라웠다.

4. 직립보행의 진행

일반적으로 머리가 작다는 것은 뇌가 작다는 말이고 뇌가 작다는 것은 지능이 낮다는 말이다. 루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인류가 큰 뇌와 큰 머리를 갖기 오래전부터 직립보행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직립보행이 좋은 생각이라는 것을 이해할 지능이 생기기 전에 말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네 발로 걷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게 없었을 때에 루시에게 직립보행을 하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발로 걷는 것이 네 발로 걷는 것보다 어떤 큰 이득이 있었을가? 위험을 피하거나 먹이를 뒤쫓는 일은 두 발만큼이나 네 발로도 빠르게 할 수 있다. 

사슴이 달아나거나 치타가 사냥하는 것을 보라. 두 발로 사는 것은 몇 가지 큰 단점도 있다. 편안하게 걸으려면 두 발로 걷는 암컷은 골반이 좁아야 하는데, 그러면 출산할 때 무척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산모와 새끼의 목숨도 위태롭다. 

루시 같은 생물에게 똑바로 서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먹이를 찾으려고 숲에서 바닥에 쭈그리고 앉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이 평평해져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었고, 몇 세대가 흐른 뒤 똑바로 서서 걷는 습관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그것은 단순히 진화하며 적응한 결과치고는 아마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5. 공통의 조상

최근의 한 연구에서 러닝머신에서 걷는 인간과 침팬지를 비교했다. 그 결과 두 발로 걸으면 네 발로 걸을 때 쓰는 에너지의 25퍼센트밖에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살기 힘들었을 때는 두 발로 걷는 동물이 생존하는 데 상당히 유리했을 것이다. 똑바로 서서 걷는다는 것은 이런 동물들이 이동하면서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의미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이런 동물들은 이제 먹이도 임시 보관소로 쉽게 가져갈 수 있었고, 따라서 거친 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그들에게 숲 밖으로 퍼져나가 지구의 날씨가 나빠지면서 많은 숲을 대체하고 있던 드넓은 초원에서 사냥을 해도 좋겠다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루시가 발견된 뒤로 다른 비슷한 동물의 뼈도 많이 발견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것은 ‘살렘’이라고 하는 세 살 된 아이의 뼈다. 살렘의 뼈는 2000년에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되었다. 살렘은 그때부터 계속 공들여 발굴한 결과 완벽한 두개골과 빗장뼈, 갈비뼈, 무릎뼈를 드러냈다. 이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부르는 생물의 유골로, 이것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은 발‘은 290만 년 전의 것이다.

작은 발‘은 1994년에 화석 수집가 로널드 클라크가 오래된 소뼈가 든 자루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분자과학자들에게는 루시와 루시 같은 종류의 화석이 침팬지와 인간이 약 400만 년 전에서 500만 년 전에 공통의 조상에서 나왔다는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해주는 훌륭한 증거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대로 루시가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과 침팬지가 다르다는 결정적 증거도 제공해준다.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과 현대 침팬지를 가르는 첫 번째 주요 차이점이다. 

6. 큰 뇌의 진화

호모 하빌리스는 우리보다 작았지만 루시보다는 훨씬 크고 훨씬 똑바로 서서 걸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호모 하빌리스의 뇌가 루시의 뇌보다 거의 두 배나 컸다는 사실일 것이다. 호모 하빌리스를 보면 루시는 첫 번째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립보행을 하는 침팬지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게 된다.

호모 하빌리스는 영리하게 도구를 쓴 증거가 있는 최초의 인간이다. 이들은 부싯돌을 날카롭게 갈아 뼈에서 고기를 발라냈고, 이로써 우리는 구석기 시대로 알려진 시대로 들어서게 되며, 호모 하빌리스는 인간이 지구의 자연공원에 합류했다고 말해도 거의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모 하빌리스는 최초로 우리와 같은 것, 세계 최초의 호모였다.

호모 하빌리스는 똑바로 서서 걸음으로써 물건을 만드는 공작 기술을 펼치기 시작할 수 있었다. 목공이나 석공처럼 나무를 깎고 돌을 다듬으려면 아주 정교한 손과 눈의 협동 작업이 필요하다. 이 같은 기술에는 잘 발달된 운동 기능과 손과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므로, 그러한 과정은 아마 큰 뇌로의 진화를 촉진했을 것이다.

뇌는 클수록 에너지를 많이 쓴다. 우리 뇌를 작동시키려면 하루에 400칼로리가 필요하다. 그저 생각을 하는 데만 우리가 하루에 소비하는 전체 에너지의 20퍼센트가량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큰 뇌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는 고기를 먹을 때 가장 잘 공급된다. 

고기를 얻는 가장 성공적인 방법은 도구와 무기를 써서 사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도구를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생물은 뇌가 가장 큰 생물이었다. 눈사태처럼 진화상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두 루시가 운 좋게 두 발로 걷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사냥과 무기, 도구, 지능의 발달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진정한 호모의 출현, 호모 하빌리스와 그것을 넘어선 진화를 뜻했다.

루시의 조상 가운데 일부는 나무에 그대로 머물렀고, 그래서 굳이 직립보행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침팬지보노보로 진화했다. 자유로운 손이 없었다면 큰 뇌와 현생인류의 지능을 낳은 진화상의 연쇄반응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뇌도 작은 채로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7. 유인원의 의사소통

침팬지와 인간이 유전적으로 아주 가까운 것은 이런 진화상의 변화가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아마도 약 400만 년 전에 일어났기 대문이다. 그러나 이런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지능과 뇌의 크기에서는 큰 차이가 나타났다.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과 같은 변화는 언뜻 생각하면 단순해 보이는 변화지만, 이런 단순한 상황의 변화도 진화 과정에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에 가장 가까운 동물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침팬지도 고릴라처럼 의사소통을 한다고 한다. 칸지는 1980년에 태어나 지금 미국 조지아 주에서 사는 보노보 유인원이다. 칸지는 영어 단어를 3천 개 이상 듣고 이해할 수 있다. 고릴라인 코코보다 많은 수다.

칸지는 응답을 하고 싶으면 일련의 그림을 가리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2006년 11월에는 칸지가 마시멜로와 불을 상징하는 것을 가리키기에 칸지를 데리고 숲으로 갔더니 지나가면서 작은 가지들을 낚아채서는 높이 쌓아올려 불을 붙이고 막대기에 있는 마시멜로를 노르스름하게 구워 먹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