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정복자들

어떻게 인간의 자연계에 대한 이해가 철학과 법률로 표현되기 시작하고 또 그것이 정복을 통해 동양과 서양 전체로 퍼졌을까?

1. 자연의 지배자

그리스 철학자들은 점차 지구상에 사는 것들의 운명을 저 먼 산꼭대기에서 좌지우지하는 신 따위는 없다는 급진적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지적 능력으로 우주의 법칙을 해독해 모든 자연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인간 자신이었다.

그런 사상가들 가운데 최고의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의 광범위한 저작은 인간 영혼의 본성에 관한 사색에서부터 우주의 물리학까지, 심지어는 날씨까지 온갖 것을 다루었다.

그러나 2천 년도 더 뒤의 찰스 다윈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자연계에 있었다. 그는 젊어서 몇 년 동안을 그리스의 비옥한 작은 섬 레스보스에서 지냈다. 거기서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같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이용해 섬의 자연 생태계를 꼼꼼하게 관찰했다.

동물과 식물을 연구해 분류하고, 동물과 식물의 행동을 조사하고, 동물과 식믈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에 주목했다. 기원전 335년경에는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며 아테네에 정착했고, 여기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교를 세우고 그것을 리케이온이라고 불렀다.

2. 자연의 법칙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이나 탈레스 같은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배운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이 자연계에서 관찰한 모든 것을 결합했다. 그리하여 모든 현실의 밑바탕에는 일련의 보편적인 자연의 법칙이 있어, 지구상의 생명과 관계있는 모든 것과 우주의 본성을, 인간의 정치에서 날씨까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거대한 기계처럼 움직이므로 충분히 시간을 들여 관심을 기울이면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대 과학의 선조라고 할 만한 유일한 그리스 철학자는 아니지만, 분명 가장 유명한 철학자였으며, 그의 저작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이 되었다.

“꼭두각시 인형 놀이를 하는 사람이 줄 하나를 잡아당겨 목과 손, 어깨, 눈이 어떤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도록 하듯이, 신성한 자연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을 간단히 움직여 바로 다음에 있는 것에 자신의 힘을 전달해 이것이 계속 이어지면 결국 자연의 힘이 모든 것에 전달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면 순차적으로 이것이 또 다른 것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저마다 자신의 체질에 따라 움직이지 모두 똑같은 과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인 합리적 세계관은 우주가 어떤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것이라면 그러한 우주에서 예전의 변덕스러운 신들에게는 어떤 자리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자연의 법칙 자체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신성한 것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신이 우리에게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수정이나 변경을 허락하지 않는 법칙이 판에 새겨진 것들보다 훨씬 낫고 훨씬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호모 사피엔스와 자연계가 맺은 관계의 역사를 통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보다도 인류에게 탐구하고 발견하고 배울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통찰도 어떤 명석한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거나 돈 많은 후원자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면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지닌 잠재력을 펼치려면, 그것을 널리 퍼뜨려 되도록 많은 인간의 문화가 인간 두뇌의 힘을 자연의 힘에 발휘하도록 할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운 좋게도 때마침 그런 일을 하기에 딱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생이었던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드로스였다. 어쩌면 알렉산드로스의 마음에 불을 질러 세상에 있는 것을 모두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제국을 정복하겠다는 가슴 벅찬 결심을 하도록 한 것은 그의 위대한 스승의 자연계에 대한 열정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2세는 부케팔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궁중에서 아무도 그 말을 길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 살밖에 안 된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달래 해가 비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도록 했더니 더 이상 제 그림자에 놀라 겁을 먹지 않고 순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해준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그것을 보고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가 예언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 아들아, 네게 걸맞은 왕국을 찾아라. 마케도니아는 네게 너무 작다.”

얼마 뒤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거둔 군사적 승리 덕분에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군사적 모험으로 손꼽히는 전투에 나설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4. 그리스의 통일

기원전 338년에 필리포스의 군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주 기동력이 뛰어난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의 도움으로 아테네와 테베를 포함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동맹 세력을 격파했다. 필리포스는 이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그리스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계획은 하나로 통일된 그리스 군을 창설해 서로 싸우는 그리스 도시들을 통일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의 숙적이었던 페르시아로 진군해 5세기에 전쟁에서 패한 것을 설욕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가 불필요하게 아테네를 약탈한 것에 앙갚음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원전 336년 10월에 필리포스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출발하기 얼마 전에 딸 클레오파트라가 결혼해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잔치 중에 아이가이의 극장에 들어가다가 그만 자신을 호위하던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파우사니아스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연인들끼리의 사소한 말다툼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여럿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그런데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안되어 테베에서 새 마케도니아 왕에게 도전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으로서 당당하게 완강히 반항하는 도시를 완전히 짓밟고 집만 한 채 달랑 남겨 놓았다. 좋아하는 시인 핀다로스의 집이었다.

핀다로스는 그의 선조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를 찬미하는 시를 여러 편 지은 시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완전히 파괴한 뒤 테베 사람 전체를 노예로 삼아 보란 듯이 자신의 무자비함을 드러냈다. 그때부터는 마케도니아에 적대하는 호전적 통치자 데모스테네스가 통치하던 다테네마저 두려운 나머지 알렉산드로스의 권의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5. 헬레니즘 제국

그 뒤 30년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군 4만2천 명을 이끌고 페르아와 이집트를 지나 인도까지 갔다. 터키 중앙에 있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풀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터키 중앙에 있던 고르디우스라는 도시에는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다음번 아시아 왕이 될 거라는 전설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3년에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를 대파하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두 딸을 포로로 잡고 많은 재물을 얻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음에는 지중해 연안으로 진군해 티레라는 도시를 포위하고 7개월 만에 정복해 이집트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집트에서는 페르시아의 세력이 기운 덕분에 해방자로 환영을 받고 기원전 332년에 파라오로 선언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본떠 모든 도시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알렉산드리아를 세우고 이집트와 그리스를 잇는 항구도시로 삼았다. 알렉산드리아는 갈수록 강성해진 그의 새로운 헬레니즘 제국의 해양 중심축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18개월 만에 이집트를 떠나 페르시아로 다시 진군했다. 페르시아에서 다시 다리우스와 맞붙었고, 이번에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그를 무찔렀다. 페르시아에서 다시 다리우스와 맞붙었고, 이번에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그를 무찔렀다. 

페르시아 왕은 전장에서 달아났으나 나중에 메디아의 산에서 자신의 군대에게 살해되었다. 이제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전체를 정복할 길이 열렸다. 그는 먼저 바빌론으로 진군했고, 이어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수사로, 마지막으로 페르시아 왕들의 고향인 거대한 페르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그가 거기서 몇 개월 동안 쉬었는데, 그 뒤 도시가 완전히 불탔다.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고 우연히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수많은 보물을 잃었고, 그 가운데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마련된 소가죽에 황금 잉크로 썼다”는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같은 귀중한 자료와 문서도 있었다. 

6. 7대 불가사의

다리우스의 죽음과 이집트, 페르시아의 복종으로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적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새로운 제국의 군대에서 자기를 위해 싸우도록 용병을 모았다. 3년 동안 군사 작전에 들어가 스키타이와 아프가니스탄을 복속시켰고 인더스 강에서 치른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인도의 포루스 왕을 물리쳤다.

페르시아로 돌아간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을 융합해 하나의 문화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알렉산드로스는 모범을 보이려고 페르시아 공주인 다리우스 3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 사이의 적대감은 여전히 깊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은 그가 죽고 얼마 안 되어 네 개의 왕국으로 쪼개졌다. 그러나 그의 정복으로 그리스어가 중동과 이집트 전체에서 쓰이는 공용어가 되었다.

군인에서 상인과 장인, 과학자와 철학자까지 수많은 그리스 사람이 국외로 나갔고, 그러면서 그들의 실험적 세계관도 함께 퍼졌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다섯 가지가 그리스 사람들의 작품이고, 그것들은 저마다 인간의 힘으로 자연계를 정복할 수 있다는 이들의 확신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스파르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자유가 가장 고귀한 재산이라고 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시민들은 아주 예민해져 조금만 통제 수단을 써도 참을 수 없는 전횡이라고 분노할 것이다, 어떤 지배도 받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결국은 법도 무시할 것이다. 그것이 성문법이든 불문법이든…

1. 통치제도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철학서인 <공화국>에서는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놓고 계속 논쟁을 벌인다. 그는 민주적인 아테네 사회에서 친구이자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을 선고한 것에 분노했고, 그의 저작은 모든 대중적 정부 형태에 대해 냉소적이다.

그는 나쁜 민주주의보다 참주 정치가 낫다고 했다. 참주 정치에서는 한 사람만 나쁜 짓을 저지르지만 민주 정치에서는 모든 사람이 나쁜 결정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허상만큼 그가 냉소한 것은 없다. 그는 자유가 금방 부도덕과 무법, 무정부로 전락할 거라고 믿었다.

탈레스처럼 플라톤도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의심이 없는 순진한 세상에 환상을 심어준 제우스와 아폴론, 아프로디테 같은 그리스의 전통적인 신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도 철학적 추론과 사색을 통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가 그린 이상 사회에서는 자신의 통찰을 백성들과 공유하는 철학자 왕이 다스렸다.

2. 선택적 번식

플라톤은 사람이 식물과 동물을 선택적으로 번식시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도 같은 기법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기발한 제안을 했다.

” 되도록 많은 아이가 용감한 사람을 아버지로 둘 수 있도록 용감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용감한 사람을 결혼 상대자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 남부에 있던 스파르타라는 도시는 이런 급진적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431년에서 405년까지 동맹을 맺은 도시 국가들을 이끌고, 갈수록 세력이 커지고 있던 아테네 동맹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스파르타의 유명한 사령관 리산드로스 덕분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전설적인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궤멸시켰다. 아테네는 포위당한 지 얼마 안 되어 항복했고, 그후 30년 동안 스파르타의 왕이 그리스의 대부분을 다스렸다.

3. 두려움 없는 전사

이 도시가 막강한 아테네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비결은 인류가 실험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조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스파르타는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전체주의적 군사형 사회였다. 

스파르타를 세운 전설적 인물 리쿠르고스델포이 신전에서 받은 신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델포이 신전은 그리스 사람들이 의학과 치료, 빛과 진리의 신인 아폴론에게 바친 유명한 신전이다.

리쿠르고스는 너무 약하게 태어나 군인이 될 수 없는 남자아이는 타이게투스 산의 황량한 비탈에 버려 죽게 내버려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 않은 남자아이들은 모두 일곱 살이되면 군사훈련소로 보내 두려움이 없는 전사가 되도록 배워야 했다.

소년들은 청년들이 채찍을 휘두르는 고된 시련을 견뎌내야 훈련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가장 약한 아이들이 죽었고, 따라서 선택적 번식이라는 원칙이 더욱 철저하게 지켜졌다. 소년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 않고 훔쳐 먹도록 했다. 훔치다가 붙잡히면 훔쳤다고 벌을 주는 게 아니라 서툴러서 붙잡혔다고 벌을 주었다.

4. 스파르타 사회

스파르타 사회는 ‘호플리테‘와 ‘헬로트‘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전자는 통치를 하고 군사 훈련을 시키는 스파르타 원주민이고, 후자는 해외에서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들에서 농사를 짓는 노예들이었다. 

스파르타에서는 군인들이 훈련을 마치면 시골로 보내 어두워진 뒤에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헬로트가 있으면 무조건 죽이도록 했다. 크립테이아라는 이런 조치는 젊은 스파르타 병사들이 왕성한 살인 욕구를 느끼도록 할 수 있었을 뿐 아니가 헬로트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일거양득의 조치였다.

스파르타 사회는 플라톤 같은 일부 고대 철학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훗날 1930년대의 히틀러유겐트 운동 같은 이데올로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히틀러유겐트 운동에서는 아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가 개인이나 가족에 대한 의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흐플리테는 당연히 가족에 대한 의무보다 도시의 복지를 우위에 두어야 했다. 이들은 방진법으로 훈련을 받았다. 방진에는 절대적 충성이 요구되었고, 모든 사람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가장 강하고 가장 두려움이 없는 병사들로 진을 치고 뒤에서 강하게 밀면 어김없이 승리를 거두었다.

선택적 번식은 성인 남성들에게도 실시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스파르타 여성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오더라도 방패 없이 돌아오는 호플리테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5. 군사적 사회 구조

스파르타 여성들은 고대 그리스의 어느 곳에서보다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여성들이 아름다움과 지성, 힘을 기르면 지배자 인종을 낳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남녀가 모두 발가벗고 나란히 육상 경기 훈련을 받았고, 여성들이 채찍을 휘둘러 누가 가장 인내력이 강한지를 보는 디아마스티고시스로 알려진 경기에 참여 하기도 했다. 이것은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치는 의례였는데, 리쿠르고스가 그 전에 제물이 될 사람을 제비뽑기로 뽑아서 바치던 의례를 대신하도록 장려한 것이었다.

완전히 체력 단련과 선택적 번식, 군사적 승리에 토대를 둔 사회 구조였으니, 근처에 있는 올림피아에서 경기를 통해 인간의 신체적 능력의 절대적 한계를 시험하는 육상 경기 대회를 연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최초의 올림픽 경기장은 헤라클레스가 열두 가지 노역을 마친 뒤 아버지 제우스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와 6세기에는 그리스 사회에서 이 대회가 엄청나게 중요해졌다.

도시 국가들마다 시민의 긍지라는 최고의 영예를 얻으려고 가장 훌륭한 선수들을 출전시켰다. 승리자는 시와 조각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예로운 월계관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6. 스파르타의 종말

올림픽 대회는 서기 393년까지 계속되었으나,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것을 야만적인 이교도의 축제로 불법화했다. 그러다 1896년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체력을 향상시키고 세계의 젊은 이들이 스포츠를 겨룸으로써 현대 국가들이 좀 더 가까워지는 길로 올림픽 대회를 부활시켰다.

모든 제국과 마찬가지로 스파르타도 결국 막강했던 세력이 약해졌다. 스파르타의 인간 공학 실험은 결국 실패했다. 대중의 지지가 없고 군을 크고 강하게 유지할 자발적이고 능력 있는 남성의 공급이 줄어든 탓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그 지경에 이르기 오래전인 기원전 380년경에 또 다른 세력이 이미 고대 그리스의 북쪽에서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이것은 도시 국가들의 독립성에 종지부를 찍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 문명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본보기를 전 세계에 널리 퍼뜨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 초기 민주주의

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것을 배운 아주 경쟁력 있는 도시 국가들의 무리에서 어떻게 일련의 실험적 생활방식이 나타났을까?

1. 올리브 무역

수천 년 동안 올리브에서 짠 기름은 고대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천연 연료였다. 가정에서는 그것을 요리에서 등불까지 온갖 군데에 썼다. 올리브맛도 좋고 저장하기도 쉽고 영양가도 높아 고대 인간 세계의 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약 2500년 전에 올리브는 갓 태동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점차 중앙집권화된 중국의 비단과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다.

아테네와 테베, 스파르타, 코린트, 아르고스는 많은 독립된 작은 도시 국가들 가운데 일부였을 뿐이다. 이들 도시는 기원전 650년경부터 자연인간 문명 사이에서 아주 흥미로운 일련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 혁신적인 사회의 토대는 올리브 무역 위에 세워졌다. 마케도니아의 산기슭에서 지중해 동부에 있는 이들 섬까지 펼쳐진 메마르고 험준한 바위투성이 지형에서는 올리브 말고는 거의 자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통틀어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고대 그리스서양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데, 만일 이런 기적 같은 열매가 저절로 열리지 않았다면 고대 그리스는 아마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2. 교역을 통한 부의 생산

그리스 사람들은 곧 올리브를 삶에 필요한 다른 중요한 식량들과 교환할 줄 알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100개나 넘는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 전체에 교역망을 구축해, 올리브가 이집트의 곡물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 나는 철과 구리 같은 원료, 선박을 건조할 때 없어서는 안 될 레바논의 삼나무 목재와 거래되었다.

고대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뒤 다양한 물결의 유목민 부족들이 철로 만든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이주해와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정착했다. 기원전 600년경에는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올리브를 재배하는 방법을 습득해 잘 사는 방법을 발견했다.

생존을 완전히 교역에 의존하는 데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길러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실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먼저, 교역에 기반을 둔 경제로 이들 도시에서는 시장을 중심으로 부를 생산하는 시스템이 고도로 발달했다. 이들 도시의 시민들에게는 곡물이나 쌀, 노예 노동보다 주화대여금이 거래를 할 때 주로 쓰는 통화가 되었다.

이들은 또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는 것이 많이 있었다. 여가 시간이었다. 올리브는 1년 중 몇 개월을 교역으로 얻은 부를 새로운 도시를 짓는 데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이들의 생존이 교역에 달려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의 도시들이 늘 다른 문화와 문명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과 새롭게 유리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받아들여 자기들에게 맞게 고칠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이다.

3. 초기 형태 민주주의

독특하고 새롭고 별난 인간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호는 아테네에서 처음 나타났다. 기원전 594년경 솔론이라는 시인이 살라미스 섬을 점령해 도시에 승리를 안겨주고 상당한 권력과 명성을 얻게 되고, 솔론은 기존의 억압적인 정치 체제와 법률 체계를 개혁했다. 솔론이 제안한 헌법은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먼저 솔론은 통화의 가치를 평가절하 해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던 부채 위기를 바로 해소했다. 다음에는 그 전에 추방된 아테네 시민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노예가 된 시민들을 해방했다. 가장 큰 개혁은 정치권력을 다시 분배해 힘이 있는 집안에서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인구 전체에 발언권이 있는 체제로 모든 사회적 분쟁에 배심원단을 도입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일반 시민도 법률의 집행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 평민들에게 필요한 힘을 모두 주었다. 그렇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도 유지했다.”

여기서 새로운 두 정치 기구가 탄생하였다. 하나는 귀족을 대표하는 기구로, 아레오파고스 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불레라고 하는 두 번째 회의에는 아테네에서 오랫동안 산 주요 부족의 대표자 100명이 포함되었다. 구성원들은 저마다 임기가 1년이고, 제비뽑기를 통해 무작위로 선발되었다.

솔론이 죽고 200년 동안 이 초기 형태의 민주주의는 아테네가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도시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솔론이 새로운 형태의 시민 정부를 실험하고 있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편에서는 과학과 종교에서 곧 혁명이 일어날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4. 보편적 자연법칙

터키의 서해안에 있던 밀레토스는 교역과 부, 온갖 다양한 문화로 활기가 넘치는 고대 도시였다. 행성이 신이라고 믿던 시절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행성의 움직임과 연관시킨 것은 ‘점성술‘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탈레스는 일련의 천문표를 이용해 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천문표는 원래 바빌론과 이집트의 성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그들의 신전과 지구라트에서 행성과 달의 움직임을 연구해 펴낸 것이었다. 그런 지식이 숫자와 수학에 밝은 탈레스 같은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자 행성의 움직임에 어떤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추론을 통해 일식 같은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을 설명해주는 일련의 보편적 법칙을 찾으며 보냈고, 수십년동안 아테네에 평화가 지속되면서 다른 철학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의 거지 철학자였다. 그는 고결한 생활방식은 사람을 옷이나 직업, 수입 따위로 판단하는 인간 사회 밖에서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디오게네스는 최초로 자신을 ‘세계의 시민‘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야생 동물 같은 다른 세계의 시민들이 먹을 수 있게 비바람에 노출시켜 달라고 했다. 디오게네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동방의 자이나교 승려들처럼 개인의 행복은 물질적 환경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믿었다.

5.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유명한 철학자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를 서양 현대 사상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한다. 탈레스처럼 그도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믿었고, 그것을 철학적 사색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통찰은 결국 큰 지혜와 개인적 깨달음을 낳을 것이었다. 

붓다처럼 소크라테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영혼이 개선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문제를 해결하는 이성을 쓰고 정렬적인 토론과 열띤 논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60년경에는 토론과 논쟁, 수사와 웅변술이 아테네 사회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주요 덕목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그런 것들이 철학을 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가 실제로 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가 그와 그의  사상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은 그의 제자 플라톤 덕분이다. 플라톤도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플라톤의 저작 가운데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극적이고 기이한 상황에서 죽임을 당했는지를 말해주는 것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런 죄목은 그의 사상을 이단으로 본 사람들이 날조한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기회가 있었지만 민주적인 법정에서 유죄로 판결했으니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판례에 따른 의례를 마친 뒤 독미나리에서 추출한 독을 마시고 죽었다.

동서 분열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아후라 마즈다라는 유일신을 믿는다. 그리고 삶을 선과 악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본다. 하지만 결국은 선이 승리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스스로 진실과 거짓 중 어떤 길을 택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1. 조로아스터교

키루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조로아스터교도였다. 이 고대 종교는 오늘날에도 이란의 일부 지역에서 믿으며,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창시했다. 자라투스트라는 <아베스타>라는 경전에 신에게 받은 계시를 기록했다. 이들의 종교는 진실하고 성실한 것을 높이 평가하며, 이것이 그들 신앙의 핵심이다. 그 결과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이 페르시아 문화의 특징이 되었다.

한편 지구상에서 두 번이나 사라질 뻔한 유대인은 이제 신이 약속한 땅의 소유권을 단호하게 주장하기로 했다. 새로 지어 반짝이는 예루살렘의 신전으로 돌아온 뒤 유대인은 그동안 대대로 구전되었던 구약성서 이야기를 필경사들에게 쓰게 해서 편집해 신의 말로 공식화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어떤 성경학자들은 구약성서 이야기를 약속의 땅에 대한 그들의 역사적 주장을 신과의 신성한 계약을 통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는다. 이제부터 그것을 빼앗는 사람은 누구나 역사적으로 이미 정당하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이며 신을 진노하게 할 뿐이었다.

2. 페르시아 제국

한편 키루스는 다시 북쪽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스텝 지대의 유목민들이 또다시 제국의 변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기원전 529년에 스키타이의 한 갈래인 마사게타이족티그리스강의 발원지에서 총공격을 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 군대가 처음에는 잘 싸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리해졌고, 결국 키루스는 죽임을 당했다. 

키루스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제국은 그 뒤로도 200년 동안 번성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관용 정책지역의 종교와 믿음에 대한 존중 덕분이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결국 이집트를 정복하고 마사게타이족을 물리쳤다.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되찾아 오래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파사르가다에 무덤을 만들었다. 

캄비세스의 사촌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22년부터 485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제국을 재조직하고 페르세폴리스라는 수도를 새로 웅장하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오늘날의 이란에 있었고, 높이 20미터에 두께가 10미터나 되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장관이다. 다리우스는 최초의 수에즈 운하도 건설해 배가 운하를 통해 지중해에서 홍해로 갈 수 있도록 했다.

카브레트 근처에 있는 나일 강의 둑에는 지금도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다리우스 왕은 말한다. 나는 페르시아 사람이다. 페르시아에서 출발해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집트에서 흐르는 나일이라는 강에서부터 페르시아에서 시작되는 바다까지 이 운하를 파라고 명령했다.  내가 명령한 대로 운하를 파자 역시 내가 의도한 대로 운하를 통해 배들이 이집트에서 페르시아로 갔다.”

3. 페르시아의 번성

다리우스는 제국에 주조 화폐를 도입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터키 서부에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 사르디스로부터 페르세폴리스까지 길이가 2500킬로키터나 되는 도로를 건설교역을 장려했다.

이 길에 여관을 짓도록 해 상인들이 쉬어갈 수 있게 하고, 수비대를 두어 산적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 키루스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노예를 금지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그의 많은 건축 계획에 참여해 일한 사람들은 모두 대가를 받았다.

아마 북쪽에서 유목민 부족들이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골치 아픈 문제가 없었다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이러한 정책은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르시아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북쪽의 유목민들 역시 다른 유목민들 때문에 서쪽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이런 부족들에게 계속 시달리다 페르시아는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분쟁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리하여 결국 한때 득의양양했던 페르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서쪽에서 그리스가 부상하게 된다. 골치 아프게 하는 스키타이의 침입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다리우스는 기원전 512년경에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오늘날의 그리스로 들어갔다.

그는 멀리 도나우 강까지 진군해 배후에서 그리스를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역의 지리를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스키타이는 모두 놓치고 대신 그리스 북부에서 트라키아마케도니아 사람들을 공격해 복속시켰다. 다리우스는 그곳에 군을 주둔시키고 자신의 사트라프를 임명해 제국의 북서 변경 지대를 보호하는 완충지로서 이 지역을 지키도록 했다.

4. 마라톤 전투

이 선제공격은 역효과를 낳았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같은 독립심과 자긍심이 강한 그리스 도시들이 터키 서부에서 페르시아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고, 그리스 이오니아 사람들이 반란을 이끌었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492년에 반격했지만 2년 뒤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패해 충격파가 그의 제국 전체로 퍼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투 후에 아테네로 전령을 보내 그리스 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제는 페르시아의 해상 공격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는데, 전령이 26마일이나 되는 길을 달려오는 바람에 너무 지친 나머지 소식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장거리 경주를 유산으로 남겼다고 한다.

마라톤 전투는 그리스가 막강한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잇따라 그리스 도시들이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제 서부 스텝 지대의 유목 민족을 막을 수 있는 완충지대를 갖기는 커녕 오히려 새로운 적이 생기고 말았다. 갈수록 강성해지는 아테네라는 도시가 이들을 이끌었고, 이들은 해전의 전문가라는 기량까지 갖추고 있었다.

5. 페르시아의 멸망

다리우스는 마라톤 전투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기원전 480년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이처럼 유럽에서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른 존재를 물리칠 준비를 했다. 그의 군은 얼마나 규모가 컸던지, 각각 300척이 넘는 목선으로 부교 두 량을 만들어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데 이레 밤낮이 걸렸다.

그리고 중동부 산에 있는 테르모필레에서 에피알테스라는 지역 사람이 페르시아 군에 그리스를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려주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이제 그의 군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자원병 1천 명으로 페르시아 군의 맹공격을 견뎌냈다. 그의 군이 오랫동안 페르시아 군을 저지한 덕분에 나머지 그리스 군은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아테네 해군은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다.

성질이 나쁜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와의 전투에서 병사를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수의 힘으로 밀어붙여 아테네를 점령하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 덕분에 아테네 시민들은 근처에 있는 섬으로 피할 수 있었고, 거기서 자기들 집이 불타면서 밤하늘을 밝히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결전은 9월에 시작되었다. 그리스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이 살라미스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3단으로 노를 젓는 페르시아 군용선은 훨씬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그리스 배들에 비하면 너무 둔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박살이 났고, 200척이 넘는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6. 동서 문화의 분열

어떤 역사가들은 그리스가 승리를 거둔 살라미스 해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전투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그리스의 독립과 통일을 가져와 현대 서양 문명의 토대를 놓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는 해군의 지원 없이는 육지의 대규모 군을 지탱할 수 없었고, 결국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해에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그리스를 쳐부수는 일을 맡겼으나, 그리스 연합군은 결국 플라타이아 전투와 미칼레 전투에서 그를 궤멸시켰다.

이제는 유럽과 아시아가 전쟁을 했다. 변경에서 물이 풍부한 땅에 접근하려고 밀치락달치락하던 유목민과 정주민의 싸움이 어느새 커져 서로 적대하는 제국과 제국, 도시 국가들과 도시 국가들 사이의 분쟁이 되어버렸다. 

이들은 이제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해갔고, 다른 종교와 문화를 야만적인 이단자로 여김으로써 침략과 정복을 정당화했다. 왕은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지향해야 하며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아소카의 생각은 이제 완전히 철 지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중동의 페르시아 문화서양의 유럽 문화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은 곧 유대인이 그 사이에 끼여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는 어떤 것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 왕국

떠도는 유목민들과 이들과 경쟁한 문명들 사이의 충돌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파괴적이며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인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을까?

1. 고대의 분쟁

아소카 왕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동 지방에서는 그가 주창한 불교의 왕도가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기원전 900년경부터 300년경까지 세계의 이 부분은 유목민과 정착민, 동쪽과 서쪽에서 새롭게 떠오른 제국들 사이의 갈등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이들은 패권을 놓고 다투면서 서로 맞서는 종교를 채택했고, 오늘날까지 계속되며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분쟁이 거기서 비롯되었다.

이런 고대의 분쟁이 일어난 것은 아마 모든 생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연 현상인 물의 순환이 지닌 특이한 성질 탓이었을 것이다. 동유럽에서 흑해를 지나 중국 동북부까지 드넓게 펼쳐진 초원 지대인 스텝을 가로지르면서 세계의 기후는 점차 건조해지고 뜨거워진다. 

그리고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습하고 따뜻한 바람은 유라시아 스텝 지역의 동쪽에 있는 고지대보다 서쪽에 있는 저지대에 훨씬 인간과 동물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동쪽에 있는 고지대는 고도가 올라가면 비가 자취를 감추어 내륙 지역이 속살을 드러낸 거친 관목 지대나 다름없는 황량한 땅이 된다.

유목민은 푸른 채소가 많고 비가 충분히 오면 아주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때로 그렇듯이 날씨가 너무 뜨거워지고 건조해지면 꼼짝없이 서쪽과 남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원전 700년경부터 동물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스텝 지역의 인구가 증가했고, 인구는 증가했는데 건조한 날씨가 닥치자 잘 무장된 유목 민족이 잇따라 비옥한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과 중동 지역에 사는 정주민 공동체들이 삶을 위협했다.

2. 유대인 왕국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00년부터 448년까지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벌인 치열한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무서운 유목민족 스키타이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 한때 아시아에서 살았고, 거기서 마사이게타이족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하자 아라스 강을 건너 킴메르족의 땅으로 들어갔다.”

스키타이와 킴메르족은 비옥하고 물이 많은 땅을 찾아 서쪽으로는 동부 유럽으로, 남쪽으로는 중동으로 밀고 내려오기 시작한 많은 기마민족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들이 2500년도 더 전에 기후와 강수량의 변화에 밀려 이주하면서 일어난 일대 혼란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아주 뿌리 깊은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분쟁의 형태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1050년경부터 700년경까지 이 사람들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땅에 용케 정주하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에는 이들이 어떻게 이집트로부터의 대탈출이라는 것을 해서 그들의 나라를 세웠는지가 나와 있다.

전문가들은 아마 기원전 500년경에야 구약성서가 쓰였을 것이라고 믿으며,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역사가 오랫동안 대대로 구전되면서 신화와 뒤섞였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성경에서 기원전 1050년경에 유대인 왕국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말하는 것들 가운데는 적어도 실제로 일어난 일을 어떤 시각에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많다는 확신이 되살아났다.

3. 약속의 땅

유대인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우르라는 도시에서 양을 치던 유목민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신에게 가나안이라는 땅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신이 자신을 유일한 신으로 숭배한 대가로 그와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그 땅을 준 것이다

아브라함이 실존 인물임을 확인해주는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그에게는 두 여자에게서 낳은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스마엘은 하갈이라는 하녀에게서 낳은 장남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기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이 하갈과 아이를 갖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태어난 뒤 놀랍게도 사라도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이 아들을 이삭이라고 불렀다. 이삭의 자식 가운데 하나인 야곱은 아들을 열둘 두었다. 이들이 저마다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 열두 부족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이 먹을 것을 찾아 이집트로 달아나 노예가 되었을 때에도 신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모세에게 했다. 신은 모세에게 유대인 부족들은 자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일련의 법을 주었고, 그것이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의 토대가 되었다. 모세는 결국 신의 도움으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했고, 이들은 신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장남 이스마엘은 유대인 성서에서 금방 사라지지만, 훗날 우리의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무함마드가 서기 610년경부터 신에게 받은 계시를 집대성한 코란에 따르면, 이스마엘도 아들을 열둘 두었고 아랍인은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신은 정확히 누구에게 약속한 땅을 주었얼까? 아랍인일까, 유대인일가? 아니면 이들이 공유하는 법을 배우도록 둘 다에게 주었을까? 누가 이땅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끈질기게 오랫동안 계속된 분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4. 분열의 시작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은 기원전 1050년경부터 930년경까지 가나안에서 살았다. 기원전 1008년경에는 돌과 물맷돌로 펠리시테의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소년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어 요르단 강변에 있는 예루살렘에 그들의 수도를 세웠다. 다윗의 아들인 현명한 솔로몬 왕은 여기에 최초의 신전을 지었다.

한 집단의 사람들이 다른 모든 집단을 누르고 신에게 선택되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그들의 문명이 가장 뛰어나다고 믿었고, 중국의 상 왕조도 갑골에 새겨진 것들이 증언해주듯이 그들의 통치를 하늘이 승인했다며 정당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받은 약속은 다른 약속과 달랐다. 그것은 하나뿐인 전능한 신이 두 번이나, 즉 한 번은 아브라함에게, 한 번은 모세에게 한 약속이었다. 게다가 유대인의 역사 초기에 일련의 참담한 일을 겪은 뒤에는 그런 약속을 문서로 만들어두는 것이 바로 그들의 생존의 열쇠가 되었다.

솔로몬의 치세 뒤에 유대인 열두 부족은 옥신각신하다 왕국을 둘로 쪼개기로 했다. 이스라엘로 불린 북쪽 반에는 열두 부족 가운데 열 개 부족이 자리를 잡고, 나머지 두 부족은 남쪽에 있는 유다에 자리를 잡았다. 

기원전 722년에 북쪽에 자리 잡은 부족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동쪽에서 아시리아의 왕 샬마네세르 5세와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가 쳐들어와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정복했다. 아시리아 사람들은 나중에 도시를 재건했지만 그곳에 다시 아라비아 사람들과 시리아 사람들이 살도록 했다.

5. 선택받은 사람들

유대인들은 4만 명이나 아시리아의 도시 니네베로 끌려가 관개 시설에서 노예로 일했다. 수천 명은 남쪽에 있는 왕국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달아나, 예루살렘의 인구가 다섯 배나 증가했다. 유대인들은 금방 통합되어 과거의 이질적인 부족들의 집합체에서 자기들은 하나뿐인 전능한 신, 여호와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신에게 약속의 땅을 받았다는 공통된 믿음을 가진 한층 통일된 공동체가 되었다.

아시리아의 사르곤의 최대 관심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위협적인 존재가 북쪽과 동쪽에 있었다. 유목민인 킴메르족과 스키타이였다. 이들은 둘 다 가축을 방목할 습하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705년에 이들의 흉표함이 사르곤을 능가해, 사르곤은 이들과 싸우다 죽었다.

사르곤의 후계자 센나케리브는 아시리아의 화력을 다시 오늘날의 이라크에 있던 바빌론으로 돌렸다. 바빌론 사람들도 몇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에사르하돈 왕 밑에서 바빌론은 아시리아의 수도가 되었고, 에사르하돈 왕은 이제 서쪽으로 눈을 돌려 가장 군침이 흐르는 사냥감인 이집트를 노렸다.

기원전 671년에 에사르하돈은 이 역사적인 땅을 침입해 약탈하는 데 성공해 잠시 동안이나마 아시리아 제국을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만들었다. 이제 아시리아 제국은 이집트에서 인도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원전 627년에 그의 아들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자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제국은 결국 스키타이와 킴메르족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다.

아시리아의 세력이 기울자 바빌론은 다시 독립했다. 기원전 612년에 바빌론 군이 니네베에 있던 아시리아의 수도를 점령해 아시리아 사람들을 해치웠고, 그 전에 먼저 골칫거리인 스키타이와 되도록 견고한 동맹 관계를 맺었다. 안타깝게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는 독립한 바빌론 세력의 부상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6. 바빌로니아

비빌로니아는 갈수록 강성해져 무시무시한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치세에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폐허가 된 도시 바빌론을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신전을 복구하고, 왕궁을 완성하고, 지하도를 짓고, 유프라테스 강에 돌로 만든 다리를 놓고, 도시 둘레에 난공불락의 성벽을 세 겹이나 둘렀다. 그렇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바빌론의 공중정원이다. 아내 아미타스가 고향 근처에 있는 산속의 샘을 그리워하자 아내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또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메디아 성벽을 세워 북쪽의 스키타이와 킴메르족의 공격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했다. 이제 그는 누구나 가장 탐내는 이집트를 집어삼킬 준비가 되었다. 

서쪽으로 가는 길에는 물론 예루살렘이 있었고, 그는 기원전 59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해 당시 유대인의 왕이었던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보내고 시드기야를 대신 왕의 자리에 앉혀 봉신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몇 년 뒤에 시드기야가 예루살렘 사람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결과는 처참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또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봐주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불태우고, 신전을 박살냈다. 

시드기야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예리코 평원에서 붙잡혔다. 그리고 눈앞에서 아내와 자식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지상에서 그가 본 마지막 장면이 되도록 눈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완전히 실의에 빠져 포로로 잡힌 유대인 2만7천여 명과 함께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7. 키루스

이때 유대인의 수도 두 곳이 모두 약탈당하고 불에 타, 이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은 집도 절도 없이 뿔뿔이 흩어지고 노예가 되어 금방이라도 역사책에서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70년 뒤에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실질적으로 바꾸어놓았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이들을 구했다. 생전에 그는 아시리아 제국보다 훨씬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이름은 키루스, 기록된 역사에서 최초로 후대에 ‘대왕‘이라고 불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키루스는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그의 아버지가 페르시아 왕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근방에 있던 메디아 왕국 통치자의 딸이었다. 키루스는 이들의 외아들이었고, 따라서 두 땅을 모두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둘을 합쳐 하나의 영토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키루스는 기원전 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메디아 왕국으로 진군해 들어가 자기 할아버지인 메디아 왕국의 왕 아스티아게스를 물리치는 큰 기쁨을 누렸다. 전설에 따르면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가 어렸을 때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키루스는 다음에는 북쪽으로 진군해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맹자인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을 물리쳤다. 그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생뚱맞은 전술로 꼽힐 만한 묘책을 써서 말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군대 앞에 낙타의 무리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낙타들에게서 어찌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 리디아 말들이 질색을 하고 달아났고, 크로이소스는 붙잡혔다.

기원전 542년에는 키루스의 오랜 친구이며 동맹자인 하르파구스가 소아시아와 페니키아를 그의 영토에 보태 명실상부한 제국이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키루스는 남쪽으로 관심을 돌려,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운하로 돌린 뒤 강을 건너 바빌론으로 쳐들어갔다. 기원전 539년 10월12일 밤에 그들은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았다. 바빌론의 점령으로 시리아와 페니키아, 이스라엘이 키루스의 제국에 더해졌다.

8. 키루스 원통

키루스의 페르시아 제국은 다른 문화와 종교를 용인하고 존중하는 정책을 쓴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사트라프라고 하는 지역의 통치자를 정복한 땅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바빌론을 점령한 후 키루스는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고, 새 신전을 지어 넵카드네자르가 파괴한 것을 대체하도록 했다.

키루스는 “비용은 왕실에서 대도록 하라. 예루살렘 신전에서 가져온 금그릇과 은그릇도 되돌려주어라. 모두 예루살렘 신전 본관 제자리에 가져다 두도록 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것은 성경 에스라서에 이야기되어 있다. 에스라는 수많은 유대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키루스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성경에서 메시아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는 그들의 유일신 여호와가 보낸 왕, 신이 임명한 왕이었다.

1879년에 고대 바빌론의 성벽 아래서 키루스 원통이 발견되었다. 이 원통은 성경에서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이 사실임을 확인해준다. 원통에는 또 키루스가 모든 형태의 노예제와 강제 노동을 없앴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원통은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뉴욕에 있는 국제연합 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는 방 옆에는 이것의 모형이 있다. 키루스는 관용 정책의 일환으로 자신은 유일신을 믿는데도 바빌론 사람들이 계속 그들의 으뜸 신인 마르두크를 비롯한 많은 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했다.

싯다르타

스리랑카 강가라 사원의 벽에 조각되어 있는, 깊은 명상에 잠긴 붓다. 스리랑카는 아소카의 자손들에 의해 불교로 개종했다.

1. 싯다르타 고타마라

자연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태도는 호모 사피엔스가 문명을 개조해 자연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네 사람에 의해 널리 퍼졌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은 종교를 창시했고, 두 사람은 그 종교가 세계로 널리 퍼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는 싯다르타 고타마라는 인도의 왕자였다. 그는 기원전 563년부터 483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오늘날의 네팔에 있는 룸비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그가 죽고 400년 정도 지났을 때 그의 추종자들이 쓴 문헌에서만 찾을 수 있어, 오랜 세월 구전되면서 일부 상세한 것들은 신화와 합쳐졌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그가 태어나고 며칠 안 되어 죽어, 그는 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왕이거나 부족의 추장이었던 슈도다나는 아들의 탄생을 기념해 궁전을 세 채 짓도록 했다. 슈도다나는 싯다르타가 종교적 가르침에 노출되지 않고 인간의 고통도 모르게 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가 강한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2. 붓다 – 깨달음을 얻은 자

그러나 싯다르타는 스물아홉 살에 궁전을 떠나 백성들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빈곤과 고통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싯다르타는 처음 나갔을 때 늙은 사람을 보았다. 그때까지 그는 노년의 시련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다음에 나갔을 때는 병든 사람죽어가는 사람을 만났다. 결국 자기가 본 것에 점차 괴로워하다가 싯다르타는 사치스러운 궁전에서 벗어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수도사로 살았다. 그러다 은자가 되었고, 두 스승의 도움으로 명상을 함으로써 마음을 비우는 것을 배웠다.

다음으로 싯다르타는 함께 도를 닦던 다섯 사람과 함께 세속의 것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으려고했다. 그것에는 먹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하루에 잎사귀 한 장이나 견과 한 알밖에 먹지 않았다. 그러나 강에서 쓰러져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뒤에 싯다르타는 ‘중도‘로 알려지게 된 것을 발견했다. 중도란 방종이든 자기 부정이든 극단으로 치달을 필요 없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다.

싯다르타는 마을 소녀에게 우유죽을 얻어먹은 뒤 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진리를 발견했다. 49일 동안의 명상 끝에 서른다섯의 나이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고, 그 뒤로 그는 붓다로 알려지게 되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뜻이다.

3. 힌두교의 확장

타푸사발리카 두 상인이 그의 첫 제자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이 붓다의 수염을 몇 가닥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지금은 미얀마의 랑군에 있는 쉐다곤 파고다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45년 동안 인도의 북동부와 네팔의 남부에 있는 갠지스 강 유역의 평원을 걸어다니며 왕족에서부터 테러리스트와 거지에 이르기까지 범위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리를 가르쳤다. 수많은 개종자를 만든 뒤 여든 살쯤 죽었는데, 사인은 아마 식중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사실 힌두교에서 전통적으로 믿었던 많은 것들을 확장하거나 대중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호소력이 있었고, 특히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랬다. 

붓다는 자신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따르면 이 사람들이 사제나 왕 같은 어떤 매개자 없이도 내면의 욕망을 없애고 영혼을 영원히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다.

4. 자이나교

싯다르타 고타마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한 왕자도 자신의 왕국을 포기했다. 그는 깊은 침묵과 명상 속에서 12년 반을 떠돌다가 영혼의 깨달은을 얻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위대한 영웅‘을 뜻하는 마하비라로 알려졌고, 자이나교의 스물네 번째 예언자이자 마지막 예언자가 되었다.

자이나교의 경전은 오랜 시기에 걸쳐 쓰였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800여 년 전에 우마스바티라는 인도 승려가 쓴 것이다. 그의 <타트바르타디가마 스토라>에는 자이나교의 주요 특징을 설명하면서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모든 생명은 신성하다는 것이 자이나교의 중심 사상이라고 말한다.

자이나교도에게는 아무리 화나게 하고 위협을 해서 죽였어도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들은 불필요하게 무자비한 행위로 얻은 식량은 모두 거부한다. 자이나교도는 채식주의자이며 동물의 행복도 열렬히 지지한다. 

오늘날 인도의 많은 도시에서 동물보호소를 운영하는 것은 자이나교도들이다. 뿌리를 뽑으면 식물 전체가 죽기 때문에 뿌리채소는 피하지만, 사과 같은 열매는 따도 나무에 해가 가지 않으므로 그것은 받아들인다. 비폭력과 종교적 관용, 자연의 존중은 자이나교 철학의 세 토대이고, 힌두교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자이나교도 깨달음을 통한 개인 영혼의 해방에 관심을 기울인다.

깨달음은 일련의 행동 규범을 통해 얻어지는데, 여기에는 다섯 가지 서원도 포함된다.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거셍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는 것, 순결하겠다는 것, 물질적 소유로부터 초연하겠다는 것이다.

5. 인도 공화국

붓다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마하비라의 가르침도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만질 수 있는 사람과 만질 수 없는 사람을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사람은 누구나 해탈할 수 있고 해탈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불교나 자이나교나 세속의 어떤 통치자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 역사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서쪽에 있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동쪽에 있는 방글라데시까지 인도아대륙이 마하자나파다로 알려진 열여섯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쿠루 왕국처럼 오늘날 인도의 수도인 델리 근처에 중심을 둔 일부 왕국은 예술과 철학의 중심이 되었다. 전설적인 쿠룩셰트라의 전투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이 왕국들은 대부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통합되어 인도 최초의 제국이 되었다. 중국과 달리 인도의 중앙집권화는 왕국들 간의 권력투쟁보다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기원전 500년경부터 페르시아 군과 그리스 군이 그들의 국경을, 그 중에서도 특히 북서쪽에 있는 국경을 쉴 새 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03년 찬드라굽타가 병사 60만에 기병 3만, 코끼리 9천 마리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이나교 승려가 되었고, 결국 굶어 죽었다고 한다.

6. 아소카 대왕

찬드라굽타가 자이나교를 인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가문이 좋아하는 철학으로 만들었다면, 그의 손자 아소카 대왕은 자이나교의 확산에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는 그도 여느 황제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하고 난폭했다. 그는 힘으로 백성들을 위협해 제국을 통치했다. 사실 ‘아소카’라는 이름도 산스크리트어로 ‘슬픔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주 피비린내 나는 큰 전쟁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완전히 바뀌었다.

칼링가 전쟁은 유명한 칼링가 전투로 끝났는데, 이때 전장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날 아소카가 밖에 나가 도시를 돌아보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불탄 집과 죽은 말, 흩어져 있는 시체들뿐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하고 그는 울부짖었다.

그 순간부터 아소카는 자신의 삶과 치세를 비폭력에 헌신했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불교도가 되었고, 그 뒤 20년 동안 이 강력한 종교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죄수들을 풀어주고 땅을 돌려주었다. 

불교의 비폭력 원칙인 아힘사가 그가 다스리는 영토 전역에서 채택되어 불필요한 동물의 살육이 금지되었다. 재미로 동물을 죽이는 행위가 금지되고, 동물에 낙인을 찍는 것이 불법이 되었으며, 채식주의자가 공식 정책으로 장려되었다.

아소카는 집을 지어 여행자와 순례자가 쉴 수 있게 하고, 대학을 세워 사람들이 더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인도 전역에 병원을 지어 사람과 동물 모두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다.

7. 다르마

그는 불교 신자들을 위해 기념비와 사원도 8만4천 개가 넘게 세웠고, 이것들은 붓다의 삶과 연관이 있는 곳에 많이 세워졌다. 아마 그가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오래 간 것은 그의 석주 조칙일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 전역에 사암을 깎아서 만든 기둥 수십 개를 세우고 평민들이 널리 쓰던 프라크리트라는 언어로 불교의 다르마 개념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새겨 널리 알렸다. 기둥에는 칼링가 전투 뒤에 그가 개종하게 된 사연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비폭력 정책을 쓴 것도 자세히 새겨져 있다.

” 어디에나 모든 종교가 존재해야 한다. 종교는 모두 자제와 긍정적 본질, 관용의 장려,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를 바라기 때문이다.”

바라나시라는 인도의 성스러운 도시 바로 북쪽의 사르나트에 있는 아소카의 기둥은 황제가 이 도시를 방문한 것을 기록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것에 새겨진 네마리 용과 법륜은 2천 년도 더 지난 뒤에 현대 인도 공화국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아소카는 새로운 개념의 왕권을 주창했다. 그는 통치자의 합법성이 신성한 신의 너그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이상을 지지하고 사원을 세우고 수도자를 지원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데서 온다고 했다.

아소카의 치세 뒤에 불교는 널리 퍼졌다. 서기 100년에는 불교 승려들이 중국에 발판을 마련했다. 중국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이 도교라는 비슷한 철학과 융합했다. 도교는 제자백가 시대에 살았던 노자라는 철학자가 세웠다. <도덕경>이라는 그의 책은 왜 폭력을 피해야 하고, 사람이 침묵과 명상을 통해 격정과 욕망을 제거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8. 불교의 전파

아소카의 영향이 지금은 인도보다 인도 밖에서 더 강력한 것 같다. 중국에서 다양한 갈래의 불교가 한국과 베트남, 태국으로 퍼졌다. 서기 538년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일본 열도에 전파되었고, 9세기에는 자바 섬에 있는 보로부두르에도 전파되었다. 오늘날에도 자바 섬에는 수없이 많은 불탑이 언덕을 이루고 있는 보로부두르 사원이 남아 있다.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와트사원은 그로부터 300년 뒤에 세워졌다. 힌두교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이곳에는 웅장한 불교 조각품들이 있다. 아주 종교적인 문명의 절정기에 세워졌지만 지금은 밀림 속에 파묻혀 있는 이 유적은 40제곱마일에 이르는 땅에 드넓게 펼쳐져 있다.

오늘날 불교 왕국의 가장 빛나는 예는 히말라야 산 속에 높이 자리 잡고 있는 부탄 왕국이다. 부탄과 티베트에는 서기 747년에 파드마삼바바라는 승려가 붓다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부탄의 4대 왕 지그메 싱계 왕추크는 그의 국민들에게 국민총생산보다 국민총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사회복지와 환경 보존, 문화 보호에 대한 관심을 경제 성장보다 우위에 놓았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 작고 영적인 부탄 사회는 물질적 정신적 번영을 자연환경 보호와 나란히 두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지구 온난화는 특히 부탄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히말라야의 높은 산에 있는 빙하들이 현재 거의 녹기 일보직전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빙하의 쓰나미가 이 사람들과 이들의 사회를 쓸어버릴 것이다. 3500년 전에 크레타섬에 살았던 미노아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고 대책을 세워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그것이 그렇게 느닷없이 일어나지는 않으리라는 것뿐이다.

힌두교

어떻게 한 문명이 인간이 자연과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재발견하고 그 깨달음을 전파하려고 했을까?

1. 생물과 지구의 협력

약 4천만 년 전부터 인도 대륙판이 아시아 대륙판의 남쪽 면과 충돌해 생긴 산맥이 지난 몇 천 년 동안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고 한 이야기나 그동안 인간들 사이에 벌어진 일들과 무관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히말라야 산맥은 그것에 대해 대답해줄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웅장한 산맥의 어마어마한 높이가 지구의 기온을 조절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지나면서 차가워져 거대한 계절풍이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기 속에 있는 이산화탄소가 수십 억 톤 빗물에 녹아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갔고, 바다 속 생물들은 그것을 세포를 만드는 재료로 썼다. 

그리고 이것들이 죽으면 탄소가 풍부한 껍질과 시체가 해저로 떨어져 지구의 진흙 속에 깊이 파묻혔다. 대기 속 이산화탄소의 양은 이렇게 자연의 힘과 생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조절되었고, 이로써 갈수록 뜨거워지는 태양 앞에서도 지구의 기온은 시원하게 유지되었다.

어쩌면 생물과 지구의 이런 오랜 협력 관계가 이 거대한 산맥의 기슭 너머에서 한 인간 사회가 약 2천 년 동안 자연과 아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 것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2. 인도 갠지스 강

히말라야 산맥은 분명 우리가 지금 인도라고 부르는 곳에서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던 사람들을 중앙집권화하고 정복하고 병합하려는 중국의 군사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서쪽에서는 히말라야 산맥의 방벽 효과가 감소한 탓에, 그곳 사람들은 걷거나 말을 타거나 마차로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북쪽에서 몇 차례나 침입자들이 밀려왔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마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 살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거기서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질러 인도북부에 있는 갠지스 강 유역으로 밀려 들어왔고, 그들을 막은 것은 하늘 높이 치솟은 히말라야 산맥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이 침략의 역사를 꿰맞추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고고학적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 남아 있는 증거는 대부분 문헌에 있는 것이다.

베다라고 하는 경전은 원래 중동에서 생긴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 베다는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해준다. 이 책은 브라만이라고 하는 승려들에게 신에게 희생제를 지내는 법을 가르치는 용도로 쓰였다. 베다에는 기원전 1700년경부터 1100년경까지의 생활이 기술되어 있다. 베다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기원전 4000년경에 쓰였다고 믿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말이다.

베다는 이 초기 침략자들이 말과 바퀴, 금속의 형태로 가져온 도구들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말해주고, 귀족들이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전장을 질주하며 서로 일제히 활을 쏘아 대결하는 이야기도 해준다. 

베다에는 갠지스 강의 밀림을 개척할 때 쓰는 도구들의 용도도 기술되어 있다. 갠지스 강 유역은 정착하기 좋은 곳이었다. 많은 비는 채소를 기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 벼농사가 잘 되었고, 그렇게 수확한 쌀로 군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3. 마하바라타

이 인도의 고대 경전을 일부만 피상적으로 읽으면 이 사람들의 운명도 북쪽과 동쪽, 서쪽에서 부상하고 있던 사회들의 운명만큼이나 폭력적이었을 거라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고대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의 핵심에는 역사상 가장 성스러운 시들 가운데 하나인 마하바라타가 있다. 이것은 고대에 쓰여진 모든 시 가운데 가장 긴 서사시이기도 하다. 호메로스의 트로이 이야기보다 훨씬 길어, 7만4천 개의 시구로 이루어져 있고, 쓰인 단어가 180만 개가 넘는다. 

마하바라타는 쿠루 왕국의 왕권을 놓고 두 갈래로 갈라진 왕가의 자손들인 카우바라라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싸우는 서사시적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일컬어지는 18일간의 쿠룩세트라 전투에서 절정에 이르고, 여기서 결국 판다바 형제들이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마하바라타에서 가장 신성한 부분으로, 아마도 기원전 550년경에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이야기에서 판다바 형제들의 지도자인 아르주나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전사가 된 크리슈나와 논쟁을 벌인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아르주나가 전쟁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급히 크리슈나의 조언을 구한다. 그는 전쟁을 하면 자신의 가족들을 죽여야 하는데 그들은 과거에 충성을 맹세한 것 때문에 그와 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4. 아트만

바가바드기타, 또는 짧게 기타로 알려진 이 부분에서 크리슈나는 지금도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이들이 자연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신비로운 철학을 드러낸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전쟁을 피할 수는 없지만 전쟁에서 죽는 사람들을 애도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의 영혼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로 태울 수도 없고 물로 적실 수도 없으며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는다. 크리슈나는 이 자아는 사람이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이동한다고 말한다.

윤회는 힌두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해주는 핵심적인 믿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저마다 아트만이라는 영혼이 있고, 이것은 모든 생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편적 힘인 브라만의 일부다. 모든 개별자의 목표는 아트만을 해방해 브라만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아트만은 충분히 발전된 상태가 되어 깨달음을 얻고 영원히 해방될 때까지 동물이나 식물, 인간의 형태로 계속 윤회하도록 되어 있다.

아트만은 명상을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개별자가 어떻게 네 가지 유형의 요가를 이용해 마음에서 이기적 욕망을 떨쳐냄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자세히 설명해준다.

크리슈나의 조언은 오랜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처음 기록되고 2천 년도 더 지난 뒤에도 영국의 인도 지배에 맞서 비폭력 운동을 이끌었던 인도의 평화주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기타가 자신에게는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 기타는 보편적 어머니다. 너무 실방스러운 일에 부딪혀 나 혼자서는 한 줄기 빛도 볼 수 없을 때, 나는 다시 바가바드기타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여기서 시구를 찾고 저기서 시구를 찾으면 어찌할 수 없는 비극 속에서도 나는 금방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내 삶은 외적인 비극으로 가득 찼지만, 그런 비극들이 내게 어떤 지울 수 없는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로지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 덕분이다.”

5. 카스트 제도

윤회설과 누구나 요가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키면 보편적 영혼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아주 인기 있고 호소력 있는 관념이었다. 그런 철학은 고대 인도 문명이 이 남아시아 대륙에 가끔씩 들이닥쳤던 이주와 침략, 정복의 물결을 달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분열을 초래하는 카스트 제도로 알려진 사회구조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모두 한 공간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인도 사회가 갈수록 복잡해지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인도의 생활방식은 새로운 문화가 들어올 때마다 한데 뒤섞여 다양한 사회 집단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섞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케이크 같은 모습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생각은 아마 처음에 말과 전차를 타고 청동 무기를 휘두르며 들이닥친 침략자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에 북쪽과 서쪽에서 몰려온 침략자들은 그들의 사제와 전쟁과 천둥의 신인 인드라 같은 많은 신에 대한 믿음도 함께 가져왔다. 

처음 카스트에는 네 계급밖에 없었다. 브라만은 기도를 하는 사제였고, 크샤트리아는 싸우는 군인, 비이샤는 일하는 농부와 장인, 마지막으로 이 계급구조에서 가장 밑에 있는 수드라온갖 ‘깨끗하지 않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노예 같은 사람들은 사회의 하수구에 처박혔고, ‘불가촉천민‘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계급들 사이의 뒤섞임은 한 번도 장려되지 않았고, 따라서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윤회설은 이 사람들에게 적어도 다음 생에서는 더 높은 계급의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을 주었다.

6. 아힘사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말할 수 없이 한층 복잡해졌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인간 문명을 카스트로 조직하는 일이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계속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몇 세대에 걸쳐 이민은 받아들이면서도 기존의 문화가 자기들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이 희미해지거나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문화가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카스트가 생겨 이미 존재하는 카스트들의 위나 아래에 자리를 잡으면 기존의 관습이나 습관을 근본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없다. 이런 시스템은 고대 문화와 신앙이 세계의 다른 지역들보다 인도에서 더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했고, 이는 힌두교가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종교인 것도 설명해준다.

자연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은 힌두교 사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우파니샤드는 고대 힌두교 경전을 모은 것으로, 기원전 500년경에 베다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석서로 처음 쓰였다. 여기서 아힘사가 처음 언급된다. 이것은 많은 힌두교 신자들이 자연에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채식주의는 이러한 철학의 일환이며, 이런 이유로 인도는 오늘날에도 전체 인구의 40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다. 

고기를 먹는 힌두교 신자들도 소는 거의 먹지 않는다. 소는 모든 동물 가운데 마실 젖을 주고 쟁기를 끄는 힘을 제공하고 땅을 비옥하게 하는 비료를 주는 자연의 선물로서 높이 숭앙받기 때문이다. 힌두교 신자들에게는 소가 아낌없이 주는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고, 따라서 오늘날에도 인도의 거의 모든 주에서 소를 죽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중국의 통일왕조

” 복수에 나서려거든 먼저 무덤을 두 개 파라.”
” 옛것을 익히면 새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1. 제자백가 – 공자

이 시대에는 ‘제자백가‘라고 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나타났다. 현자와 사상가들은 이 궁 저 궁으로 찾아다니며 왕과 귀족들에게 바르게 살고 현명하게 통치하고 왕국을 발전시키는 방법에 관해 조언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공자였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공자는 기원전 약 551년부터 479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의 유산은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과 베트남까지 극동에 있는 사회 전체에 남아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재상으로, 오늘날의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를 지냈다. 쉰다섯 살쯤 되었을 때 그는 어느 날 일을 그만두고 중국 북부에 있는 왕국들을 돌아다니며 어떻게 살아야 도덕적 삶을 살 수 있고 어떻게 다스려야 왕국을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는지를 가르치기로 했다.

공자는 세상이 권력투쟁군사적 대립으로 혼란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다시 통합과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삶의 체계를 찾았다. 복종하고 올바로 행동하고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가르쳤고, 훌륭한 왕은 백성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훌륭한 신하는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2. 실용적 학문

유교의 가르침으로 전해진 것은 공자가 생전에 가르친 것만이 아니다. 그의 제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맹자와 순자는 그가 말한 것을 좀 더 완벽하지만 서로 다른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맹자는 개인이 자기 안에 내재된 선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왕은 백성들의 암묵적 동의 없이는 다스릴 수 없다고 했다. 왕도 백성의 지지를 잃으면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잃을 수 있었고, 이것은 시민 불복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순자는 국가는 강해야 하고 사람은 본래 악하고 이기적이라 늘 백성 개개인의 행동을 통제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공자가 가르친 것만큼이나 그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의 철학에는 의 자리가 없고, 내세도 없으며, 신성한 영혼에 관한 논의나 고려도 없다. 어떤 점에서 공자는 개인의 행동과 정치적 행동에 관한 이론으로서는 최초로 신이 없는 이론을 정립했다.

그에게는 가정에 충실하고 연장자를 존중하고 과거를 숭상하는 것이 사회적 미덕의 세 기둥이었다. 그는 전쟁과 대립을 싫어하고 역사를 사랑했으며 늘 실용적이었다.

공자의 학문적 저작은 수없이 많지만, 공자가 그것을 실제로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거의 2천 년 동안 중국의 관리와 법률가, 장교들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사서삼경‘이라고 하는 책들을 공부해야 했다. 사서삼경은 교육과 가르침, 순종과 복종을 강조했고, 이런 사상은 지금도 오늘날의 중국이라는 오래된 사회의 특징으로 남아 있다.

3. 통일 왕조 – 진

평화와 질서를 설파한 공자의 가르침은 기원전 221년까지 중국인의 삶을 지배한 전쟁과 갈등에 파묻힐 뻔했으나, 이라는 나라가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두어 이 나라를 통일함으로써 그 위기를 넘겼다. 진이 승리를 거둔 이야기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끔찍하다.

진은 중국의 북서쪽에서 말을 기르고 현상금이 걸린 사냥을 하던 외진 나라였다. 그러나 선택적 번식을 통해 크고 좋은 말을 얻을 수 있었고, 덕분에 병사들이 값비싸고 다루기 힘든 전차에서 벗어나 말을 타고 전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이제는 이 있으면 누구나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었고, 활과 화살을 들고 말이 적어도 두 마리 아니면 네 마리는 있어야 끌 수 있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사람들보다 금방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기마전으로 어떤 통치자들은 군사적으로 아주 유리한 고지에 섰다.

진의 군사력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무자비함뿐이었다. 백기라는 한 유명한 장군은 병사들을 100만 명 넘게 죽이고 도시를 70개 이상 점령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78년에 그는 진의 군사를 이끌고 양쯔 강 남쪽에서 가장 큰 적이었던 금나라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장평 전투에서 중국의 명목상의 왕이었던 주 왕조를 쓰러뜨렸다. 장평 전투 후에 그는 40만 명이 넘는 전쟁 포로를 생매장하도록 했다.

4. 법치 사회

민간 관료들도 군 못지않게 가혹했다. 상앙이라고 하는 관료는 진나라의 운영 체계를 개혁해 진나라를 무질서한 부족 세력에서 효율적으로 잘 돌아가는 전쟁 기계로 바꾸어 놓았다. 상앙은 또 통치자인 효공의 지원으로 무조건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그에게는 늘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가족에 충실한 것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는 귀족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들에게 상으로 주는 개혁도 실시했다. 더 많은 사람을 부양하고 더 많은 병사를 먹여살릴 수 있도록 농업 개혁에도 힘썼다.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정부에서 할당한 양을 맞추는 농부들에게는 노예로 보상을 했다.

상앙이 개혁한 것들은 나중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상군서>라는 법률서가 되었다. 진은 머지않아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고, 전국칠웅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영정이 진의 통치자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면서 진나라의 세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기원전 221년에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물리친 뒤 영정은 최초로 중국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고, 중국 신화에 나오는 신성한 통치자들의 이름을 따 본인의 이름을 진시황으로 바꾸었다.

5. 중앙 집권화

진시황은 승상 이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권력이 중앙에 집중된 나라로 만들었다. 지역 통치자들을 파면하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어 모든 군을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군정장관들도 임명했고, 감독관들이 전국을 돌며 지역세력 기반을 다지지 못하도록 했다

기원전 213년에 진시황은 분서갱유라고 하는 것을 명령했다. 언론의 자유를 막아 사상과 정치적 견해를 모두 통일하려고 한 것이다. 수많은 책이 불탔고, 그 가운데는 제자백가의 철학자들의 사상이 담긴 것이 많았다. 국가가 모든 권력을 쥐고 통제하는 것을 지지하는 책 말고는 모든 책이 금지되었다.

누구든 불법적인 것을 논하는 것이 발견되면 가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30일 안에 금서를 모두 태우라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금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 모두 북쪽으로 추방해 중국 최초의 만리장성을 쌓는 죄인으로 일하도록 했다.

기원전 246년에는 진시황의 아버지 때 시작되었고 정국이라는 뛰어난 기술자가 건설한 거대한 운하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더 북쪽에서도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진 왕조에 거의 무한하게 식량을 공급했고, 그 덕분에 진의 군과 백성은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강력한 위치에 올라섰.

마지막으로, 새로운 제국의 정부는 중앙 집권화된 제국을 좀 더 쉽게 운영할 수 있도록 문자서체에서부터 수레 차축의 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을 표준화했다. 차축 폭의 통일로 제국의 수레들은 길에 파인 바퀴자국으로 좀 더 수월하게 달릴 수 있었다. 또한 황제의 명령을 산둥 성에 있는 신성한 태산에 새겨 전능한 하나의 제국 아래 세상이 새롭게 통일되었음을 하늘에 알렸다.

6. 진시왕릉

진시황은 생이 막바지에 이르자 길가메시 왕처럼 자신에게 불멸의 삶을 가져다줄 영약을 찾는 데 골몰했다. 하인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 영생하는 신들이 산다는 래산을 찾도록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이들은 일본 열도까지 가 아직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던 사회에 중국 문화를 전파한 초기 전달자들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은 암살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돌아다닐 때는 일련의 대역을 데리고 다녔지만 결국 기원전 210년에 동부 지방을 순행하다 불로장생약이라고 믿고 신하들이 준 수은이 든 알약을 먹고 죽고 말았다.

2천 년 동안 아무도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몰랐다. 그런데 1974년 어느 날 사람들이 우물을 파다가 동서남북으로 몇 백 미터를 가로지르는 왕릉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진흙을 구워서 만든 실물 크기의 병사가 8천 기 넘게 들어있었다. 내세에서 진시황제를 지키도록 만든 병사들이었다.

진시왕릉을 만드는 데 참여한 노동자가 70만 명이 넘었다. 병사들은 하나하나 손으로 만든 예술 작품이며, 원래는 청동으로 만든 창과 화살, 활을 갖추고 있었다. 병사들은 전투 대형으로 배치되었고, 점토로 빚은 말 600마리와 나무로 만든 실물 크기의 움직이는 전차 100대 이상이 이들을 지원했다. 황제 자신이 묻힌 능은 구리를 녹여 봉해놓아 아직 열지 않았다. 

진 왕조는 진시황이 생전에 한 일이 불러일으킨 증오와 독설 탓에 그가 죽고 몇 년 안 되어 무너졌지만, 그가 이룬 것은 완벽했다. 그는 전국칠웅을 통일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제국을 세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국을 통치할 때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에서부터 그런 원칙이 현실에서 실행되는 데 필요한 핵심 기구와 제도까지 모두 정비해 제국을 다스릴 수 있는 완벽한 모델을 만들어냈다.

쌀과 비단, 철은 세력을 확장하고 싶은 욕구와 정복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제공해 지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권력을 낳았다. 자연에 대한 최고의 지배력은 이 고대 사람들을 그 뒤로 수천 년 동안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강건하고 독창적인 문명으로 바꾸어놓았다.

 

중국 왕조의 통합

중국은 수천 년 전부터 길흉을 점치기 시작했다. 갑골에 질문을 새겨 왕이 신들에게 물었고, 불에 달군 봉을 갑골에 집어넣었을때 생기는 금의 형태를 보고 신의 대답을 읽었다.

1. 중국 상 왕조

상 왕조는 최초로 분명히 실재하는 고고학적 증거를 남긴 일련의 중국 통치자들이다. 그 전의 이 나라 역사는 신화와 전설, 주술의 멋진 조합이었다. 이때 중국을 지배한 삼황오제는 기원전 약 2852년부터 2205년까지 고대 중국을 다스린 신화 속 인물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중국의 초기 역사를 말해주는 <죽서기년>이라는 문헌 덕분에 알려졌다. 이것은 기원전 299년에 죽은 양왕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까지 사마천이라는 필경사 혼자 쓴 대작 <사기>도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기>는 130권으로 쓰였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세 번째 인금 신농은 중국 농업의 아버지이며, 차를 발견한 것도 신농이다. 황제는 중국 의학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이들의 통치 뒤에 주 왕조가 나왔는데, 이 왕조 역시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검증할 만한 물증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주 왕조의 창시자 우왕은 사람들에게 홍수를 조절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이때 여신 여와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은 듯하다. 우왕은 수많은 관개용수로와 배수로의 건설을 감독했고, 여기에는 약 2만 명의 노동력이 들어갔다고 한다.

2. 신화 속 중국

이런 이야기들에는 창조 신화와 중국 민속에서 가장 중요한 신화 속 동물인 에 관한 전설도 있다. 용은 입김을 불어 구름을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가뭄이 들면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역사상 아주 유명한 용인 비의 신, 응룡에게 빈다.

중국 통치자들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증거에 따르면 상 왕조는 기원전 16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은허라는 유적지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왕릉 11기와 왕궁의 토대를 발견했다. 청동과 비취, 돌로 만든 수많은 유물도 발견했다. 이것들은 상 왕조가 고도로 발달된 문화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 왕조에는 완전히 발달된 문자 체계의례 체계가 있었고, 인상적인 무기와 장비는 주변의 드넓은 땅을 정복해 통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푸아비 여왕처럼 상 왕조의 왕실 사람들도 온갖 하인들과 더불어 전차와 말, 전차를 모는 전사 등 내세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 모든 것과 함께 묻혔다.

주목할 만한 한 왕릉은 1976년에 발견된 부호의 무덤이다. 부호는 상 왕조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왕 가운데 하나였던 무정의 아내였다. 부호의 무덤에서 발굴된 뼈에 새겨진 글에서는 그녀가 1만3천 명이 넘는 병사를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고 한다. 무덤에서는 1600점이 넘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단검 89자루와 벽옥으로 조각한 완벽한 군대도 있었다.

3. 갑골 문자

싸움이 중국 북부를 다스린 이들 초기 왕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끈은 하나밖에 없다는 그들의 강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들 왕은 길흉을 점치는 아주 정교하고 전문적인 의식을 직접 거행했다. 그들은 사제나 샤먼 같은 성자들이 필요 없었다. 하늘과 접촉하는 것도 왕의 일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거북 등딱지와 황소 뼈를 이용해 아주 기발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했다. 뜨겁게 달군 봉을 등딱지나 뼈에 집어넣어 금이 가도록 했고, 마치 오늘날 손금 보는 사람처럼 왕이 금의 길이와 방향을 해석해 자신과 백성들에게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중요한 질물이란 비가 언제 올까, 다음 전투에서는 이길까,올해는 풍년일까 하는 것들이었다. 때로는 상징 문자를 이용해 그런 질문을 등딱지에 직접 새기기도 했는데, 그런 문자들은 현대 역사가들이 해독하기가 쉬웠다.  현대 중국 문자와 아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오늘날의 중국이 과거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고 중국 문화가 지금까지는 문명화한 인간 행동양식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은 문화임을 증언해준다.

최근에도 고대 문자가 새겨진 갑골이 수없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한때는 중국 시장에서 약효가 있는 ‘용골‘로 선전되어 팔리기도 했다. 왕의영이라는 학자가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다가 지역시장에서 약재로 쓰는 뼈를 조금 구했는데, 그의 친구 유악이 그것을 갈아 가루로 만들려다가 이상한 유형의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은 갑골이 대부분 은허에 있는 무덤들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여기서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발굴 때 2만 개가 넘는 갑골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중국 문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4. 왕조의 통합과 정복

기록된 중국의 역사에서 처음 1천 년 동안은 통합과 정복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쌀과 비단, 철의 결합 효과 탓이었다. 상 왕조의 왕들과 주 왕조의 왕들은 황허 강을 권력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기들의 권력이 바로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통치 스타일을 상징하는 것은 도끼였고, 그것은 대개 굶주린 미소와 집어삼킬 듯한 이빨로 장식되어 있었다.

주의 왕들은 농사야금술로 쌓은 양쯔 강 유역의 부를 가로채고 싶은 마음에 남쪽으로 진군하는 일련의 군사 작전도 지휘해 두 거대한 수계 사이에 있는 산들을 넘었다. 그리고 기원전 800년경부터는 정복한 땅의 권력을 귀족들과 믿을 만한 가족들에게 점차 이양했지만, 북쪽으로부터의 위협에 정신이 팔려 효율적이고 평화로운 정부를 만들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수도 호경이 야만적인 침입자들에게 약탈당하자 기원전 722년에 근거지를 더 동쪽에 있는 낙양으로 옮겨야 했다. 주 왕조의 중앙 권력이 빠르게 무너졌고, 일련의 소국들이 나타나 그 틈을 메웠다. 이들 소국들은 기원전 500년에 일곱 개의 주요 세력으로 통합되었고, 이들은 서로 통일된 중국과 이것이 약속하는 거의 무한한 식량과 부, 권력을 놓고 다투었다. 다음 300년 동안은 이들 사이에 치열한 패권 다툼이 벌어졌고, 전국시대로 알려진 이 시대는 결국 중국 전체를 통일하는 토대가 되었다.

중국 문명의 시작

어떻게 동방에서 쌀과 비단, 철이라는 풍부한 자원 덕분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강력한 인류 문명이 발생했을까?

1. 중국 문명의 토대

만일 지구상에 존재한 인류 문명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견고한 문명에 금메달을 수여한다면, 진정으로 그것을 받을 만한 후보는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이다.

현대 중국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막강하다. 중국은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넘는 13억 인구가 사는 곳이다. 중국의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아마 역사상 어떤 나라보다도 인간의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킨 발명과 발견을 많이 한 것을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중국은 과거제도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용광로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도 모두 중국에서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중국의 역사다. 중국 문명은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지대에서 일어난 초기 문명들만큼이나 오래된 문명이다. 게다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일어난 문명들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거나 다른 문화와 제국에 잠식되었지만, 현대 중국의 토대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3천 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나운 용과 거대한 판다의 땅은 인류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생존자이며, 지금은 어느 문명보다도 이 문명에 인류의 미래가, 더 나아가 지구라는 행성 자체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강대국을 그렇게 다르고 그렇게 특별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나라는 어떻게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2. 벼의 재배

중국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에 북쪽의 황허 강 유역과 남쪽의 거대한 양쯔 강 유역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독특한 문명이 나타났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수계이고 세계에서 나일강과 아마존 강, 미시시피 강 다음으로 가장 긴 강인 양쯔 강 유역에서는 아마 기원전 7000년경부터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부족들이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티베트의 빙하 지대에서 발원한 이 거대한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약 4천 마일을 흐른 뒤에 동지나해로 흙탕물을 쏟아낸다. 오늘날에는 강이 혼잡할 정도로 배가 많이 다니고, 강바닥을 준설하는 통에 강에서 사는 동물 가운데 가장 희귀한 종 일부가 멸종 위기에 있다. 그 중에서도 양쯔 강 돌고래는 2006년에 멸종된 것으로 공식 선언되었고, 쇠돌고래는 현재 1400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기원전 3000년경에는 양쯔 강과 700개에 이르는 지류가 자주 범람해 양쯔 강 유역은 을 재배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놀라운 정도로 생산적이고 영양분도 많은 식량인 쌀은 지구상 어떤 농작물보다도 크고 밀집된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 좋은 농작물로 손꼽힌다. 오늘날 인도 중국은 일찍부터 쌀을 생산한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인간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쌀은 영양가도 높지만 해충에도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논에 물이 차면 물을 좋아하는 개구리와 뱀 같은 동물이 살기 좋은 곳이 되고, 개구리와 뱀은 농작물을 해치는 벌레를 잡아먹는다. 물이 덮여 있으면 제멋대로 잡초가 자라는 것도 막고 영양분이 자유롭게 흘러다녀 땅이 새로워진다.

벼농사를 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벼를 하나하나 심어야 하고, 관개에 대한 지식이 있어 해마다 적당한 때에 물이 차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맙게도 물소처럼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노동력을 자연에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어 중국 사람들은 일찍부터 동물의 힘을 이용해 논을 감고 흙을 고르고 물을 댈 줄 알았다.

3. 양잠의 시작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까지 황허 강 유역에서 살았던 양샤오 사람들은 중국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아 오랫동안 비밀에 붙여졌던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 

비단은 아주 보기 드문  천연물건이다. 비단은 빛을 반사해 매우 아름다운 광택이 나고, 무엇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비단은 벌레가 애벌레를 보호하려고 감싸는 실로 만들어진다. 애벌레는 알에서 깨면 서서히 실을 갉아먹으며 고치에서 나와 마침내 나비나 나방이 된다.

전설에 따르면 비단의 신비로운 특성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황제의 아내 누조였다. 황제는 기원전 2697년부터 기원전 2598년까지 중국을 다스린 군주다. 누조는 산책을 나갔다가 황제의 뽕나무에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알고보니 애벌레 수천 마리가 기어다니며 뽕잎을 갉아먹어 뽕나무가 큰 손상을 입은 것이었다.

누조는 고치를 몇 개 주워 와서 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러다 우연히 고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에 빠졌는데, 고치가 풀리면서 가는 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조는 이 가늘고 강한 끈을 손가락에 감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황제를 설득해 뽕나무를 숲을 만들도록 했고, 결국 물레로 실을 자아 광택이 나는 값비싼 천을 짜는 법을 알아냈다.

지금은 누에라고 하는 애벌레를 기르는 것을 누에치기 또는 양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에 엄청난 부와 번영을 가져왔다. 중국 농부들과 상인들은 3천 년 동안이나 우아하게 빛나는 비단에 반한 다른 문명들과의 교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새틴과 나일론, 아크릴 섬유같은 인조견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4. 비단의 전래

비단은 훗날 비단길로 알려진 일련의 육상 교역로가 발달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로마 제국 때에는 지중해 사람들의 비단 수요가 엄청나게 많았다. 비단은 감촉이 좋고 부드러운 광택이 나 고대 세계에서 손꼽히는 사치품 가운데 하나였다.

엄청나게 많은 금이 비단길을 통해 제국에서 흘러나갔고, 중국은 아주 부자가 되었다. 로마 사람들은 비단을 어떻게 만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로마의 유명한 역사가 플리니우스는 비단이 어떤 신비한 나무에서 자란다고 생각했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서기 550년경에야 올바른 종류의 애벌레를 기르고 뽕잎을 먹여 비단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그때도 비잔티움 시대 그리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안에 있는 황궁에서만 비단을 생산했을 정도로 비밀을 소중히 지켰다. 비단의 신비함을 유지해 높은 값을 유지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리스 역사가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서기 550년경에 수도사 둘이 중앙 아시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면서 누에 알을 몰래 대나무 통에 숨겨 가지고 들어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바친 뒤에야 비단을 만드는 방법이 서방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것은 유럽에서 소중히 지키는 비잔티움 시대의 비밀이 되었으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이 당시 중요한 비단 생산 중심지였던 코린트를 공격한 뒤 시칠리아에 전해졌다. 훗날 1204년에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을 때 비단 기술자들은 이탈리아와 아비뇽에 정착했다.

5. 철기의 사용

오랫동안 지속된 중국의 번영에 세 번째 주춧돌이 된 것은 뛰어난 철 주조 기술이다. 터키 중앙의 히타이트 사람들은 철광석을 제련하는 방법을 완전히 습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이 기원전 1400년경에 처음 대장장이의 모루에 망치질을 하기 시작하면서 유럽과 지중해의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구의 암석인 광석에서 발견되는 철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양쯔 강 유역 우라는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철을 주조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은 유럽에서는 1500년 동안이나 그것에 필적하는 것이 없었을 정도로 발전된 것이었다. 

산소가 동물의 삶에 필요한 만큼이나 철은 현대 인류 문명에 없어서는 안될 지구의 선물이다. 철은 오늘날 사용되는 모든 금속의 약 95퍼센트가 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철은 지구에서 네 번째로 흔한 원소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45억 년 전에 일어난 재앙을 떠올려보라. 그때 젊은 행성 테이아가 지구와 충돌해 달이 생겨났다. 이 귀중한 물질이 전 세계에 널리 깊게 흩어져 있는 이유다. 

그렇지만 구리와 달리 철은 순수한 형태로 발견되지 않는다. 다른 원소들이 철과 반응하기를 좋아해 철을 추출하려면 노력과 약간의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500년경에 그것을 습득해 세계 최초의 용광로를 만들었다.

철광석을 섭씨 약 1450도까지 가열하면 철이 녹아 액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면 그것을 거푸집에 부어 온갖 형태와 크기의 도구를 만들 수 있고, 식히면 철이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처음 만들어진 철제 도구는 거의 모두 농사에 쓰였다. 

철로 만든 쟁기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단단한 식토도 뚫고 나아가 잡목이 무성한 드넓은 황무지를 수확하기 좋은 논으로 만들 수 있었다. 식량이 많아지니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었고, 사람이 많아지니 영양 상태도 좋고 쉽게 공급되는 상비군을 만들어 강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6. 양쯔 강 문명

중국 남부의 양쯔 강 유역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쌀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철이 처음 나온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철을 제련하는 기술과 지식은 빠르게 북쪽으로 퍼졌다.

베이징에서 가까운 허베이 성에서 발견된 기원전 300년경의 거대한 무덤에는 병사 여럿이 무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장비와 함께 묻혀 있었다. 이것들은 거의 모두 주철로 만들어졌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은 몇 가지 장식뿐이었다. 한 왕조때는 중국의 금속 세공 기술이 크게 발달해 서양에서는 18세기까지 그것을 따라갈 수 없었다.

중국 정부는 허난 성에 일련의 거대한 용광로를 만들었고, 이것들은 저마다 하루에 수톤의 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 중국이 여러 종류의 철을 합쳐 한층 단단한 합금철인 강철을 만드는 법을 알아낸 것도 이 즈음이다.

철과 쌀이 처음에는 중국 남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지만, 비단을 짠 북부 사람들도 뒤처지지 않았다. 중앙집권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통합하고 정복해 지역 전체를 하나의 문명으로 결합하는 추진력을 발휘한 것은 북부 사람들이었다.

쌀과 비단, 철식량과 부, 전쟁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자연의 세계를 활용해 하나의 강력한 문명을 낳는 자석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